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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진문화연구소 Oct 10. 2019

[10호] 나루생활사_이곳에서 흩어진 나의 발자국과 말



나루생활사



이곳에서 흩어진 나의 발자국과 말들          

뉴욕의 맨해튼 중앙에는 센트럴 파크가 길게 위치하고 있다. 그곳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장소이지만 개인적으로 꽤나 인상 깊다. 센트럴 파크는 약 300편이 넘는 영화에서 바쁜 도심 속 운동으로 여유를 찾는 사람들을 전경화 한다. 몇 년 전 친한 친구가 뉴욕을 다녀와서 선물해준 엽서에는 바로 이 곳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 기이한 도시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이에 비하는 푸름 덕분이다.” 


지금 살고 있는 자양동은 주택과 빌라 그리고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자연적으로 조성된 공간이 몇 군데 있다. 한강으로 걸어가면 뚝섬유원지가, 건국대학교로 들어가면 일감호 산책로가, 그곳을 넘어가면 어린이대공원이 광진구의 푸름을 채워준다. 다른 구는 어떨까 하고 서울 지도를 살펴보았는데, 광진구에 속한 녹지공간이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곳에서 살면서부터 이곳저곳 산책을 많이 다녔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한강을 걷기도 하였고, 아침 일찍 친구와 어린이대공원도 걸었다. 대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많은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일감호 주변을 걸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다. 막연하게 산책을 생각했을 때 조금 낮더라도 산과 같은 언덕을 걷는 게 아닐까 했지만, 산책의 산은 ‘뫼 산’이 아니었다. 흩어질 산에 채찍 책. 낱말을 풀면 흩어지는 채찍인가? 책이라는 한자는 지팡이 혹은 낙엽 소리의 뜻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산책의 의미까지 연결되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든 흩어진다는 앞 글자의 의미에 집중해보면 그럴듯하게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흩어지는 걸음’으로 말이다.

      

이처럼 산책을 할 때는 발걸음이 흩어진다. 명확한 목적지를 정해놓고 걷지 않기 때문에 나를 여기저기 흩뿌리게 된다. 가을방학의 <속아도 꿈결>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가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어디 갈지 생각하지 않고 나온 적이 있다. 그때 무작정 한강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당시 나에겐 통금 시간도 없었고, 주어진 일도 없었다. 그저 마냥 걸었다. 발을 터덜터덜 내딛다 보니 어느샌가 눈앞에는 검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거기서 나는 또다시 방향을 틀었다. 그리 오래 걷지는 않았지만 얼마간의 산책은 나에게 조금의 숙면을 선물하였다.

     

고향에서 살 때는 아파트 사이로 산책하곤 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아파트 단지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곳이라 탁 트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들이랑 저녁 운동 삼아 걷고는 했는데, 아파트로 둘러싸인 비탈길을 올라갔다가 고가도로가 지나는 내리막길로 걸어 내려오곤 했다. 그러나 더 어릴 때는 일부러 흙과 나무를 찾아 걷곤 했다. 동네 곳곳에 나무가 심어져 있었지만 뛰어 놀 공원은 없었다. 대신 동네 아이들은 나무로 둘러싸인 비탈길에서 놀거나 울타리 쳐진 잔디 구역에서 흙을 밟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굳이 들어가지 말라고 막아놓은 곳을 친구들과 같이 들어가 이미 누군가가 밟아 놓은 길을 따라 횡단하곤 했다. 그때 나무로 둘러싸인 길에서 신발에 흙을 묻혀가면서 친구들과 무언갈 조잘거린 기억이 난다. 그건 아마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며, 그때 유명한 만화영화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커가면서 그런 곳을 부러 찾아가지 아니하였다. 동네에서 산책이 가능한 길, 즉 건물로 둘러 싸인 딱딱한 길만 걷게 되었다. 

    

회색 시멘트 사이를 거닐던 나는 서울에 와서 일감호 주변을 걷게 되었다. 확실히 일렁이는 것을 옆에 두고 걸으니 더 산책에 생기가 더해졌다. 어느 대학교가 통째로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는 화양동의 호수에서는 유독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돌았던 기억이 난다. 멈추어 있는 호수의 기운 덕인지 마음속 우물에서 계속해서 말들을 길어 올렸고, 그 물들로 목마름을 채워가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걸었다. 자연을 옆에 두고 걷는 산책에서는 발걸음만 흩어질 뿐만 아니라 만들 또한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얼마 되지 않은 내 인생에서 역사적인 산책을 꼽으라면 2018년 초여름의 어느 이른 아침 어린이 대공원에서의 산책일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아침 헬스장을 같이 다니던 운동 친구가 있었다. 꾸준히 잠에서 깨어 운동을 나가던 와중 어느 날 그 친구가 밤새 잠에 들지 못했다고 하였다. 나는 햇빛이나 받으며 어린이 대공원을 한 바퀴 돌자고 하였고 고민 끝에 우리는 푸르러지는 녹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딱 걷기 좋은 그날의 날씨를 감상하며 맥락 없는 얘기들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린이대공원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반대 방향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날 던져진 대화의 주제 중 하나는 최근 방문한 어떤 교수님의 개인 작업실이었다. 그곳이 군자 어느 지하에 위치해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고 또 월세도 싸더라는 얘기를 최근에 친구가 들은 참이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동산 가볼래?”

      

그렇게 산책을 해서 몇 주 뒤에 부동산 계약을 하게 되었고 어설픈 준비 끝에 책방이 하나 만들어졌다. 그날 우리가 산책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책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명확한 목적지를 설정하고 걸었어도, 또한 산책을 공원이 아닌 다른 장소로 갔더라도 같은 결과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 그곳에서의 산책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다.

      

광진구에는 발걸음과 말을 흩뿌리기 좋은 장소들이 있다. 산책은 휴식을 위해 천천히 걷는 것이지만, 싱그러운 풀 내음 그리고 반짝이는 물결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해진다. 언젠가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쉽게 발에 닿는 녹지들이 많이 생각날 것이다. 그러고는 내 마음속에서 더욱 푸르러질 것이다. 



박광택 | 생산적헛소리 책방지기 Instagram : hutsorylab
'파랑새는 가까이 있다'와 '그대는 내가 아니다'라는 두 문장을 품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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