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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진문화연구소 Oct 15. 2018

[3호] 나루생활사_10월 어느 오후의어린이대공원


10월 어느 오후의 어린이대공원


가을이 오면 공원을 걷는 일을 기대한다. 걸어서 십 오분 거리에 공원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가을 바다가 다른 계절의 바다와 달리 우아한 것처럼. 가을 공원도 성숙한 정서가 있다. 특히 늦은 오후의 공원. 벤치에 앉아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면 낮고 서늘한 바람에 무수한 잎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럴 때는 몸이 소리를, 소리가 몸을 듣는다. 어쩌면 방문객의 기억이 공간에 스며 다채롭게 사물과 생물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무겁고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산란할 땐 걷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우울하거나, 슬플 때 또한. 걷는 것이 내겐 일종의 치유법이다. 하지만 걷기 이전에 단단해져야 한다. 고통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상태가 되어서야 길로 나설 수 있다. 아무렴 생각은 어떤 때이고 할 수 있지만, 고통에서 빠져 나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누구나 자신 밖에 있어야 하니까. 특히 나는 연(緣)과 관련된 일에 취약해서, 이별을 겪고 나서 산책하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엄마가 죽고 산책을 마음 먹기까지 계절이 네 번 바뀌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어린이대공원이었다. ‘아, 어린이대공원을 걷고 싶다.’ 생각해보면 어린이대공원은 내게 특별한 곳이었다. 이별이 나를 휩쓸어 모든 기억을 헤집어놓고 나면 언제나 폐허의 마음으로 공원에 갔다. 



왼쪽 종아리에 오래 전에 생긴 화상 자국이 있다. 오백 원 동전 보다 큰 분홍색 흉터.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면 표면이 아주 매끄럽다. 아팠던 만큼 상처가 아무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일종의 화학화상이었다. 열 자국이 울긋불긋한 상태로 두 달 이상 딱지가 앉지 않았다. 병원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혼자 치료하는 것을 택했다. 매일 소독약으로 상처를 닦고, 거즈를 덮으며 상처를 보살폈다.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들이 좋았다. 붉은 화상흔에 피부가 덮이고, 살이 차오르는 시간 동안 나는 상처로 인해 몸과 가까워졌고. 통증으로 마음을 씻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어린이대공원에 왔다. 분수광장을 지나 식물원 쪽으로. 버드나무 그늘을 지나 코끼리 우리 쪽으로 오래오래 걸으며 은밀한 기억을 공유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이 가진 흉터들에 대해. 그 흉터가 가진 이야기들도. 누군가를 좋아할 때 나는 그런 상처의 흔적에 끌렸다. 피부에 남은 질감이 다른 흠집들이 그들을 나만의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별의 고통을 혼자서 견뎌서는 안 된다고, 잊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조언이 틀렸다고 하고 싶진 않다. 다만 각자의 슬픔과 선택이 있을 뿐. 하지만 우리는 그 뒷모습들을 영영 잊을 순 없다. 잊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기억하는 것과 다름 없으니까. 다행히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은 부표처럼 거기 그곳에 있다. 이별 후 겪은 여러 층위의 아픔 또한. 그것이 내겐 위안이었다. 꼭 쥐고, 그러안고 있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 그것들을 모두 잊어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어느 시월 오후 나는 어린이대공원을 걸을 것이다. 당신, 또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처의 자리가 각자가 흉터들처럼 몸 한 구석에 깊이 뿌리 내리길 바라며. 




사이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단발머리. 걸음마를 시작한 군자동의 낡은 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3년 전부터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글로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해서 편집하지 않은 필름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 Instagram : only iphone photo @sai_rin 
                                     35mm film @square_eight_8
∙ e-mail        : square.eight.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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