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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30. 2024

영화 이야기 <장화, 홍련>

영화가 시작되면 의사가 손을 씻는다. 대수롭지 않은 이 장면은 뜻밖에 낯설다. 손을 씻는 의사가 외과의가 아니라 정신과 전문의이기 때문이다. 외과의도 아닌 정신과 전문의가 굳이 손을 씻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의자에 준비된 수건을 보면 이 손씻기는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진료의 일부다. 말하자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절차라는 말이다. 외과의가 손을 씻는 이유는 감염의 위험 때문이다. 전에 했던 수술이나 바깥에서 묻은 세균이 환자의 몸에 들어가서 염증을 일으킬 수 있으니 손을 씻는다.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보자. 외과의가 환자의 육체에 들어간다면 정신과 전문의는 환자의 정신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외과의의 손에 균이 묻는 것처럼 정신과 전문의의 정신에도 무언가가 묻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과거와 절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흔히 ‘손을 씻었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같은 말을 ‘정신을 차렸다’는 표현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손씻기는 육체의 위생만이 아니라 정신의 위생을 가리키는 은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과수술이 필요한 환자와 같이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의 정신은 찢어지고 벌어져 있다. 그 상처는 감염되어 있고 피를 흘린다. 정신과 의사는 이들의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하기 위해 상처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그러다 보면 그 속으로 들어간 손, 즉 의사의 정신에도 피와 균이 묻을 수밖에 없다.


정신과 전문의가 손을 씻는 이유는 바로 이 피와 균을 닦아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심연은 늪이다. 온전한 사람의 심연을 들여다보아도 거기에는 끈적하고 떼어내기 쉽지 않은 뭔가가 묻어나온다. 하물며 피 흘리는 심연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피와 균을 닦아내는 방법이 손씻기, 즉 과거와의 절연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이 말은 정신의 위생을 지키는 방법이 다름 아닌 과거를 끊어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의사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손씻기를 마치고 수미와 마주한 의사는 묻는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이 질문은 질문이기도 하지만 진단이기도 하다. 수미의 병은 바로 ‘그날’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해서 발병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수미는 그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고 이 감옥에서 나오는 방법은 손을 씻듯 과거와 절연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사의 질문에 수미는 사선으로 고개를 들어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쳐다본다. 이것은 대답이 아니라 회피이다. 그러니 이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플래시백은 의사가 물은 그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수미는 의사가 수미를 데리고 나오려고 하는 그 감옥, 바로 그날 속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수미가 수연과 함께 차에서 내리고 저택에서 은주와 조우한 뒤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수미가 의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미의 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아마 실제로 수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미는 수연과 함께 그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수연은 예전에 죽었고 은주는 그 집에 살지 않는다. 그 집에 돌아간 것은 자신과 아버지뿐이며 수연과 은주의 존재는 물론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들까지 모두 수미의 망상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수미가 갇혀 있는 그날의 모습이다.


이상한 점은 수미가 갇힌 그날이 실제 그날과 다르다는 점이다. 먼저 계모인 은주는 수연을 살해하지 않았다. 수연이 죽은 것은 은주가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들어온 날 수연의 옷장에서 어머니가 목을 매어 자살했고 수연은 어머니를 꺼내려다 옷장이 쓰러지는 바람에 압사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미가 갇힌 그날에서 수연은 계모로부터 학대받다가 포대에 갇힌 채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차이는 바로 수미가 갇힌 그날 속에 등장하는 은주가 다름 아닌 수미의 또 다른 분신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수연을 지키려고하는 수미도, 수연을 학대하다 마침내 죽이고 마는 은주도 사실은 둘 다 수미라는 말이다.


실제 그날과 수미가 갇힌 그날이 이토록 상이한 이유는 전자가 현실이라면 후자는 죄책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 그날 수연이 어머니를 꺼내려다 옷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당연히 은주도 수미도 그 소리를 듣고 수연의 방으로 향한다. 다만 시간 차가 있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은주였다. 은주는 옷장 밑에 깔린 수연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수연을 덮친 시체가 다름 아닌 남편의 전처라는 사실을 알고 밖으로 나와버린다. 그러나 아이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다시 수연의 방으로 향하려던 순간 마찬가지로 수연의 방에 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온 수미와 마주친다.


만약 두 사람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가 먼저든 수연의 방으로 들어갔다면 아마도 수연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치는 바람에 은주는 멈춰서고 수미는 방향을 바꿔 밖으로 나간다. 은주는 나가려는 수미를 붙잡으며 “너 지금 이 순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라고 말하지만 수미는 차갑게 쏘아붙이며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나중에 수연의 죽음을 알았을 때 수미는 비로소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걷지 말았어야 할 걸음을 걸은 대가는 어디로도 갈 수 없도록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수미가 그날로부터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니 이 죄책감의 공간에서 은주가 수연의 살해자로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은주는 수연이 옷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살릴 수 있었는데 죽게 내버려 두었다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은주는 “너 지금 이 순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수연의 죽음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후회에 대한 경고이다. 왜냐하면 은주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시인했고, 이 ‘앎’은 반대로 수미의 ‘무지’를 지적함으로써 수미로 하여금 수연의 죽음을 사고가 아닌 ‘책임’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수미가 갇힌 그날 속에서 은주가 수미의 또 다른 분신으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미는 수연의 방으로 가려다가 은주와 갈등을 일으킨 후 밖으로 나가버린다. 수미가 은주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새로운 부인이 됨으로써 기존 가족을 해체의 위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특히 “2층”이나 “엄마 노릇”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수미가 지키려고 하는 가족은 다름 아닌 동생 수연이다. 말하자면 수미는 수연을 지키기 위해 은주와 싸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수연은 죽고만 셈이다. 수미에게 이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동생을 죽인 것은 은주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죄책감이다. 즉 은주와 자신은 공범이다.


수미가 갇힌 그날 속에서 수연을 살해하는 사람이 표면적으로는 은주지만 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인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표면과 이면의 차이는 앎과 무지에서 기인한다. 은주는 알면서 방치했고 수미는 모르면서 방치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죄책감을 갖는 것은 후자 쪽이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누가 알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상실감을 느끼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주에게 수연은 지켜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수미에게 수연은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미의 무지는 면피가 아니라 책임 사유가 된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무지는 죄이기 때문이다.


은주가 수연의 살해자로 등장하는 것은 그녀가 수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수미로 하여금 수연의 죽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날 속에서 수미는 수연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수연은 은주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현실에서 이미 끝나버린 수연의 죽음은 이렇듯 은주에 의해 수미에게 끝없이 반복되고 수연의 죽음이 반복되는 한 이 죄책감의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은주는 수미로 하여금 수연의 죽음을 망각하지 않게 함으로써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 한편으로 은주는 수미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수미는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는 게 아니다. 수미는 은주를 이용해 스스로를 그날이라는 감옥 속에 유폐시키고 있다. 이 유폐는 자발적이다.


수미가 그날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킴으로써 현실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징벌이다. 요컨대 그것은 몰랐기 때문에 걸을 수 있었던 ‘돌이킬 수 없는 걸음’과 달리 모든 것을 알아버린 지금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걸음’이다. 병원에서 넋이 나간 듯한 수미의 표정은 현실을 완전히 망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수미의 이러한 유폐는 동생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자각함으로써만이 가능해진다. 병원을 찾아온 실제 은주의 소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미에게 은주란 동생의 죽음을 상기시켜주는 대상으로서 말하자면 감옥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은주의 사라지면 감옥도 사라진다. 은주는 수미가 갇혀 있기 위해서는 결코 놓아줄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은주가 수연의 귀신에게 살해당하는 시퀀스는 수미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일까. 왜냐하면 이때의 은주는 실제 은주가 아니라 수미의 망상 속 분신이고, 이 분신이 수연의 귀신에 의해 죽는 것은 죄갚음인 동시에 감옥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로의 복귀가 아니라 반대로 현실과의 완전한 결별이다. 왜냐하면 은주의 존재는 감옥인 동시에 수연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은주가 사라진 이상 수미에게 수연의 죽음은 더 이상 상기되지 않고 표지가 사라진 이상 무엇이 현실인지 자각할 방법도 없다. 이제 수미는 아마도 수연이 살아있는 어느 망상의 공간에서 영원히 현실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장화, 홍련>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장화홍련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원작과 공통점은 계모로 인해 자매가 죽는다는 점이고 차이점은 원작에서 최후의 징벌이 계모에게 내려지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수미에게 내려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원작과 영화 모두 자매가 죽는 사건은 똑같이 일어나지만 징벌을 받는 대상은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다. 원작의 세계는 유교 윤리가 지배하는 권선징악적 세계다. 이곳에서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의붓딸을 죽이는 개인의 욕망은 설 자리가 없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 개인의 욕망은 그로 인해 전처가 자살하고 의붓딸이 죽거나 정신병에 걸려도 징벌당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개인의 욕망은 윤리의 적이 아니라 생을 추동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아버지가 계모를 들인 이유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였다.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부장제 윤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옳고 그름을 떠나 개인의 욕망보다 우선하는 공공 윤리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 속 아버지에게는 그러한 공공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은주를 후처로 맞은 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욕망 때문이다. 아버지는 전처와 딸들이 버젓이 있는 집에 은주를 데리고 들어왔다.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 같은 행동이 가능한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욕망이 타인에게는 비윤리적인 것이라도 스스로에게는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작과 달리 영화 속 세계는 윤리보다 욕망이 우선시되는 세계인 것이다.


윤리보다 욕망이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성취 여부이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킨 자는 승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패자가 된다. 아버지의 전처, 즉 수미와 수연의 어머니가 자살할 때 그 죽음이 패배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녀의 죽음은 아버지와 은주가 보여준 욕망에 대한 윤리적인 항거이지만 이 죽음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이 죽음이 자살의 형식을 띠고 있어도 실제로는 타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욕망이 주관하는 세계에서 윤리적 항거는 무력한 자의 자기 위안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갈 곳이 없어 죽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죽음은 끔찍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원작과 달리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수미가 가장 큰 징벌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원작의 장화나 영화 속 수미나 계모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원작에는 장화를 귀신으로 부활시키고 계모에게 형벌을 내릴 판관을 소환함으로써 잘못된 선택을 보상해주는 권선징악적 윤리가 존재하는 반면 영화에서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수미의 몫이다. 중재자는 없고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검투장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무지’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개인의 과오이며, 은주에게 패배한 수미는 그 패배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수미가 받은 징벌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의 대가인 것이다.


개인의 선택이 삶과 죽음을 양분하는 세계에서 잘못된 선택은 치명적이다. 이 영화가 공포영화인 이유는 귀신이 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후회’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포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후회이다.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싸우는 투쟁의 장에서 선택은 칼과 같아서 제대로 찌르면 살고 잘못 찌르면 죽는다.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후회가 두려운 것이다. 이는 설령 잘못된 선택을 내렸더라도 그를 보상해주고 중재하는 윤리가 있는 원작의 세계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러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가 승자인 세계에서 역설적으로 윤리를 지켜내는 쪽이 승자인 은주가 아니라 패자인 수미라는 점은 흥미롭다. 은주는 수연이 죽을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치했지만 수미는 수연의 죽음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죄책감의 감옥으로 유폐시킨다. 스스로가 몰랐던 죄에 대한 책임을 진 것으로 가장 유명한 자는 아마도 오이디푸스일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신에게 대항했다는 이유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농락해버린 인간의 윤리를 지켜내기 위해 눈을 찌른다. 그렇다면 수미가 모르고 저지른 죄를 짊어짐으로써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미가 수연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은주와의 대립으로 인해 원래 살릴 수 있었던 수연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미는 수연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살릴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서가 아니라 언니로서 동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수연이 어떤 방식으로 죽었어도 수미는 그 죽음에 책임을 느꼈을 거라는 얘기다. 자기 탓이 아니라도 가족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것은 공동체의 윤리다. 이는 은주가 전처와 자매가 없어지면 좋겠다는 개인적 욕망으로 움직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리한 은주와 달리 몰랐기 때문에 패배한 수미는 역설적으로 그 무지에 책임을 짊으로써 공동체의 윤리를 지켜낸다. 개인의 욕망이 우선되는 세계에서 공동체의 윤리는 수미가 보고 있는 망상처럼 병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수미는 스스로를 병리적인 상태에 가둬둠으로써 그러한 윤리적인 세계를 지켜낸다. 그 세계는 귀신이 죄지은 자를 벌하고 개인의 욕망을 가진 자가 무력해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누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손을 씻고 과거와 절연해야 한다고 배우지만 그렇게 나아간 곳은 미래가 아니라 욕망을 놓고 싸우는 검투장이었다. 검투장에는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므로 그곳으로 향하는 걸음은 종래에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다. 뒤에 있는 자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는 자는 언제나 나아가는 자뿐이다.



2024년 5월 17일부터 2024년 5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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