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긴장도 느끼지만 안도감도 느낀다.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만 못한 저기에 비해 여기는 얼마나 안전한가. 영화 <웨이 백>은 표면상 재난 영화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재난 영화다. 주인공 일행은 시베리아의 혹한을 견디고 고비 사막의 혹서를 견뎌 인도까지 6,500km를 걷는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동료의 죽음이라는 이 참혹한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아내의 증언으로 수용소에 갇혔다. 정확히는 아내를 고문해서 거짓 증언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의 간첩 행위를 거짓으로 증언하고 남편은 하지도 않은 간첩 행위로 생존율이 거의 없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은 재난이다. 정치가 삶을 재난으로 만들 때 살아가는 일은 생존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절박함을 느꼈을지언정 안도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른 재난 영화에 비해 스펙타클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일반적인 재난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긴박함과 초조함은 거의 없지만 반대로 절망감과 무력함은 강한 압력으로 어깨를 누른다. 안도감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긴박함과 초조함을 느끼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절망과 무력함을 느끼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긴장감은 특별한 일에서 느끼지만 무력함은 일상에서 느낀다. 만약 영화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정서에 공감했다면 그건 시베리아의 혹한과 고비 사막의 혹서를 통과해 본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삶이 생존이라 느끼고 거기서 무력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웨이 백, 직역하면 귀로歸路가 될텐데 귀로란 곧 돌아가는 길이고 돌아가는 길은 다시 사는 일이다. 그래서 수용소를 탈출해 고향으로 가는 표면의 이야기는 이면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살아가는 이야기로 바뀐다. 우리는 주인공 일행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 묻게 된다. 방법을 묻는 게 아니다.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 주인공 일행은 오직 걷기만 한다. 차를 얻어타거나 말이나 낙타를 탄 적도 없다. 우리가 묻는 건 어떻게 하면 가장 느린 수단으로 가장 먼 곳까지 갈 수 있는지.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지이다. 영화는 많은 시퀀스로 대답하지만 그중에서도 야누즈와 스미스가 밤에 나누는 대화는 이 물음에 대한 흥미로운 답 중 하나다.
사막에서 체념하고 죽어가는 스미스에게 야누즈는 스미스의 아들 이야기를 꺼낸다. 아들은 야누즈의 아내처럼 고문받아서 아버지를 고발했다. 비밀 경찰은 아버지를 수용소에 가두고 아들을 총살했는데 그로 인해 스미스는 아들에게 영원히 용서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고발한 건 아들인데 아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미국을 떠나 소련으로 아들을 데리고 온 게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야누즈는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고. 돌아가서 당신처럼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을 아내를 용서해야만 한다고.
야누즈의 말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윤리가 아니다. 자신의 간첩행위를 거짓 증언한 아내를 기독교적 윤리로 용서한다는 박애의 뜻으로 야누즈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영화의 말미에도 나오지만 폴란드는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에 도착한다 해도 야누즈가 당장 폴란드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야누즈에게 용서란 당장 수행해야 할 과업이 아니라 삶의 동기다. 스미스가 자신의 삶을 징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과 반대로 야누즈는 아내를 용서하기 위해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 아내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그는 아내를 용서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내의 증언으로 망가진 자신의 삶까지 용서한 것이라고.
수용소에 있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적응은 할 수 있었겠지만 그걸 납득하거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납득할 수 없는 죄목으로 끌려왔다. 그들이 수용소에 갇힌 건 그들의 탓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스스로를 과연 조금도 탓하지 않았을까. 가령 영화에서 귀족 연기를 했다는 이유로 잡혀온 카바로프는 자기가 억울하게 갇혔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하필 그때 귀족 연기를 했을까 하고 자기를 탓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탓이 아니더라도 곤란한 상황이나 억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학대하기 시작한다. 누구 탓을 하지 않는다는 건 꼭 아무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 말은 유일하게 탓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뿐이라는 말도 된다.
자기를 탓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리 없다. 야누즈가 무슨 일이 있어도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자유를 원해서도 아내를 용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이 무력함과 자학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탓하고 있다면 사실은 아무도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아내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자기부터 용서해야 했다. 그러니 아내를 용서하기 위해 반드시 돌아가야한다는 야누즈의 말은 윤리적 낭만이 아니라 실존적 동기이다. 이것은 자유를 얻기 위한 여정이지만 여기서 자유는 꼭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바로 자책과 혐오로부터 해방된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이 해방된 영혼을 찾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많은 새 삶을 꿈꾸는 것이다.
사막에서 지치고 탈진해서 자기를 두고 가라고 말했던 스미스가 다시 걷게 된 건 물을 찾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찾아낸 건 진흙에 섞인 아주 소량의 물뿐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아내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끝까지 갈 거라는 야누즈의 말을 들은 다음날 오랫동안 눕혔던 몸을 일으킨다. 그건 아마도 세상에 자기를 용서해줄 사람은 없지만 자기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용서할 자격도 있는 거니까. 스미스가 걷기 시작한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물을 발견하지만 이 장면은 스미스가 다시 걷는 장면에 비하면 큰 감흥은 없다. 왜냐하면 걷기 위해 물이 존재하는 것이지 물을 위해 걷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히말라야에 도착한 일행은 기존에 비하면 안락하고 먹을 것도 충분한 숙소를 제공받는다. 숙소의 주인은 눈이 많이 와서 위험하니 석 달 정도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걸 생각하면 석 달 정도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피로와 고통이 쌓인 몸도 요양이 필요할 지 모른다. 그러나 야누즈는 기다리지 않고 출발하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떠올랐다. <설국열차>에서 윗계급과 싸우며 한 칸씩 전진하던 주인공은 마지막 칸에 도착하기도 전에 중간 칸에서 싸움을 멈추고 스시를 먹는다. 그때 그 장면에서 내가 느낀 것은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기까지 그들을 오게 만들었던 무언가가 종료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인도는 지척이다. 그러나 아직 인도에 온 것은 아니다. 야누즈는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석 달을 쉬는 순간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던 그 무언가가 사라져버릴 거라는 걸.
혹한과 혹서, 배고픔과 갈증, 동료의 죽음과 추격의 불안을 넘어 야누즈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것은 아내를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 곧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살아가야한다는 의지였다. 목적지는 인도지만 인도가 종착지는 아니다. 야누즈는 폴란드까지 가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 치하에 있는 폴란드에는 언제 가게 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도에 가면 뭘 할 거냐는 물음에 야누즈는 이렇게 말한다.
"계속 걸을 거야."
왜냐하면 다시 살아가야한다는 마음에는 끝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자, 여기까지 라고 말하고 누군가에게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쭉 편안히 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6,500km가 아니라 65,000km를 걸어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얼만큼 가느냐가 아니라 언제까지 갈 수 있느냐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야누즈에게 아내가 그랬듯이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025년 1월 20일부터 2025년 1월 20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