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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인생>

by 다시

장예모 감독의 <인생>은 위화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199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주인공 푸구이는 부잣집 도련님인데 도박을 하다 패가망신한 후 하층민이 되어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도박을 할 때 푸구이의 모습은 영락없는 중독자다. 도박 중독이든 마약 중독이든 중독자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쾌락을 느끼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이 망가져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라서 개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처음에 다 달랐을 그들은 뭔가에 중독되면서 점점 비슷해진다.


그래서 도박에 빠져 있을 때 푸구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기 어렵다. 단지 도박 중독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모든 걸 잃고 거리로 나앉았을 때 푸구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그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집을 도박으로 날리고 그로 인해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는데 별로 낙심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후안무치한 인간이라는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대개 도박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이 모든 걸 잃고도 더 깊은 늪으로 빠지는 걸 생각하면 많은 걸 잃었음에도 더 깊은 늪으로 들어가지 않는 푸구이의 모습은 어느 무엇보다도 살아간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건 부인이 돌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푸구이는 처자식이 최고야 라는 말을 하는데 부인과 아이들이 돌아오고 집에 생기가 생긴 걸 보면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이기적이라지만 세상에는 꼭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불치병에 걸린 아이를 돌보느라 잘 살 수 있었던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고 새로운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는 데도 가족 때문에 기회를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예전에 그게 윤리적으로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을 했을 때 얻는 정신의 안정이 물질적으로 다소 편해도 죄의식을 갖고 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일 거라고. 그런데 어쩌면 그런 게 아닐 지도 모른다. 윤리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가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가족이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대상이 아니고 그 존재가 곧바로 삶의 이유였기 때문에 가족은 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갈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는 이상해진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이야기란 바로 푸구이가 가족을 상실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푸구이는 도박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고 전쟁에 강제 징집되는 바람에 어머니도 잃는다. 자동차 사고로 아들 유칭을 잃었고 의료 사고로 딸 펑샤도 잃는다. 푸구이가 상류층에서 일반 하층민이 된 것은 도박이라는 개인의 과오지만 그 이후에 일어나는 비극들은 모두 역사적 사건에 의한 것이다. 국공내전으로 징집되어서 어머니를 잃었고 유칭의 사고는 대약진 운동으로 모두가 피로에 절어 강철을 만드는 와중에 생겼다. 펑샤가 아기를 낳다가 죽은 것도 문화대혁명으로 병원에 의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중국의 비참한 근대사가 일반 소시민에게 어떤 비극을 초래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고발적인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상황이 점차 안 좋아지는 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지탱하는 희망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진다는 점이다. 절망과 희망의 이 반비례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다. 가족이 최고라고 말했던 푸구이는 가족이 계속 죽어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력함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지만 그 이유 역시 가족이다.


푸구이는 전재산을 잃고 어머니와 함께 거리로 내쫓겼지만 자전이 아이들과 함께 돌아와 다시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펑샤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지만 사위와 손자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펑샤가 살아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위와 손자가 있어서 푸구이는 펑샤의 무덤 앞에서 외롭게 혼잣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억을 공유할 사람들이 있어서 펑샤는 죽었지만 여전히 가족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가족은 혈연 관계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유칭은 죽었지만 유칭을 죽인 춘성은 그 후로 내내 죄책감을 갖고 살면서 푸구이의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처음 자전이 춘성에게 “너는 우리 가족에게 목숨 하나를 빚졌어!”라고 소리칠 때 그 빚은 죽음으로 갚아야 할 빚이었지만 춘성이 자살을 생각하고 집을 떠날 때 자전이 말한 “기억해. 아직 우리한테 목숨 하나를 빚졌어. 꼭 살아 있어야 해!”라는 말에서 빚은 살아야 할 이유로 바뀐다. 가족의 목숨과 원수의 목숨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렇게 말한다. 누구나 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나 가족이 될 수 있다면 세상에 미워하고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가족이 죽는 비극이 계속되어도 푸구이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의 힘은 여기서 온다. 가족이 떠나가도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운다는 것. 혈육의 공백을 정으로 채우는 이 역학관계에서 인간을 둘러싼 비극의 역사는 배경으로 전락한다. 간단히 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장예모 감독이 <인생>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이 영화는 중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보여주면서 그 참상을 고발한다. 말하자면 절망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 절망을 버티고 꿋꿋이 살아온 자들의 희망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계속해서 잃어온 자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들은 절망과 어떻게 싸워왔는지. 절망에 맞서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대단한 게 아니다. 그것은 뻔하고 낡고 어쩌면 식상하기까지 한 말이다. 그러나 뻔한 말은 진정성있는 맥락에서 종종 새로워진다. 영화 속에서 그랬다고 생각한 말을 아래에 적는다. 춘성이 한밤에 푸구이를 찾아왔을 때 푸구이가 한 말이다.



"지금 많이 힘든 거 알아. 그래도 어떻게든 참고 견뎌야만 해.”


90년대의 장예모 감독은 파괴력이 있다. 그것은 삶이 캄캄하고 어두워서 절망의 단단한 벽으로 마음을 가둬놓았을 때 그 벽에 균열을 내는 파괴력, 곧 다시 살고 싶게 만드는 힘이다. 바로 전날 <박화영>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신기할 정도로 두 영화가 달라서 묘하다. 하나는 절망 속에서 새 길을, 하나는 절망 속에서 막다른 길을 보여준다. 둘 중 어느 것이 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영화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어떤 이야기도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현실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다.



2025년 1월 17일부터 2025년 1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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