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웹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고태호 작가의 <당신의 과녁>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남자가 17년 만에 출소한 후 자기에게 누명을 씌운 진범의 손녀를 17년 동안 가두려 한다는 내용이다. 언뜻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떠오르지만 작품의 결은 사뭇 다르다. <올드 보이>가 복수하는 이야기라면 <당신의 과녁>은 복수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모든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진범의 손녀를 납치하려고 하는 순간 주인공의 친구들은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그를 말린다. 그때 주인공과 친구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갑자기 차 한 대가 나타나 진범의 손녀를 태우고 사라진다. 저항하는 걸로 보아 아는 사이는 아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친구들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던 주인공이 손녀를 납치한 차량을 쫓아달리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차량을 쫓아가는 이유는 손녀를 납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하기 위해서다. 최근에 연쇄납치범이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뉴스가 있었고 아마도 진범의 손녀를 태우고 사라진 차는 바로 그 연쇄납치범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범죄라는 것을 확신해도 범인을 쫓아가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지금 납치당한 사람은 자기를 억울하게 17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던 범인의 피붙이이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납치해서 17년 동안 가둬놓으려고 했던 대상이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 납치범들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할 지는 뻔하니까. 어쩌면 이건 하늘이 내린 심판일지도 모른다. 이편을 억울하게 17년 동안 가둬두었다면 저편에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리는 게 공정한 것 아닌가. 하지만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달린다. 납치범들에게 죽을 뻔한 위기까지 참고 견디면서. 오직 하나. 납치당한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주인공이 진범을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다.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동적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우리는 그 누군가와 연관된 사람들까지 미워하게 된다. 하물며 17년 동안 감옥에 가둬둔 장본인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다. 원한에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손녀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것은 원래 주인공이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주인공이 17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상실한 본래의 선한 모습을 되찾는 장면이기 때문에 이 장면은 감동적이다.
웹툰의 제목처럼 주인공은 신이 자신을 ‘당신의 과녁’으로 삼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 하필 자기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지 신이라는 존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범인의 손녀가 납치되는 것 역시 신의 뜻이다. 아니 오히려 손녀가 납치당해야만 신은 비로소 공정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주인공이 손녀를 구하는 일은 거꾸로 신의 뜻에 반하는 일이다. 나아가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억울하게 고통을 받았다면 상대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게 주인공이 감옥에서 내린 결론 아니었던가. 그러나 주인공이 손녀를 구함으로써 신의 공정성을 스스로 해칠 때 비로소 세상은 공정한 신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필사적으로 서로를 지켜내는 곳이 된다. 공정을 위해 또 하나의 인간이 다치는 것보다 불공정하더라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 쪽을 택할 때 선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산물이다. 이 작품에서 신은 인간을 쏘지만 인간은 아무도 쏘지 않는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선이다.
같은 이야기를 영화 <아이스 에이지>에도 할 수 있다. 인간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려던 매머드 매니는 동굴에서 인간이 매머드를 사냥하는 벽화를 발견하고 인간에 의해 자기 가족이 학살당한 기억을 떠올린다. 자기가 이 아이처럼 어렸을 때 인간들은 창과 화살을 들고 부모를 사냥했다. 지금은 두 발로 걷지도 못하지만 이 아이도 언젠가는 창과 화살을 들고 동물들을 사냥하러 뛰어다닐 것이다. 어쩌면 그때 처음으로 창을 던지는 대상은 바로 자신일지도 모른다. 빙하기가 와서 모든 동물이 서둘러 남쪽으로 향하는 상황에 적이 될 지도 모르는 아이의 부모를 찾아줄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매니는 아이를 향해 미소짓는다.
매니가 웃는 이유는 자신의 기분보다 아이의 기분을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부모를 잃었을 때 매니가 느꼈을 감정은 복수심과 원한이 아니라 두려움과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졌다는 점에서 눈앞의 아이는 부모를 살해한 종족의 핏줄이 아니라 바로 어린 시절의 매니 자신이다. 매니는 아이에게서 적이 아니라 자신을 본다. 두려움에 떨던 자신과 달리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진실로 알려주는 거울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타인일 것이다.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겁에 질린 아이였던 자신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어른이 된 매니의 모습을 비춘다. 매니의 미소는 어른이 된 자신에 대한 보상이다.
영화의 처음에 빙하기가 와서 모든 동물이 남쪽을 향해 내려가고 있을 때 매니는 홀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왜 혼자서 북쪽으로 가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인간 아이를 발견하자마자 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방향을 트는 걸로 봐서는 반드시 가야 할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각한다. 어쩌면 매니는 홀로 남쪽으로 가는 대신 가족이 있었던 북쪽에 남는 것을 택한 것은 아닐까. 따뜻한 남쪽에 도착해도 혼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매니에게 혼자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가족과 함께 있었던 북쪽에서 생을 마감하는 게 더 행복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북쪽을 향해 홀로 걸어가던 매니가 나무늘보 시드와 호랑이 디에고가 일행이 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인간 아이를 부모에게 데려다주는 여정에서 이 셋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된다. 외양도 종족도 먹이도 삶의 양식도 다른 이들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서로 간에 이질성을 제거하고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미국의 패밀리즘을 연상시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삶이란 생존이 아니라 공존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만약 매니가 정말로 가족이 묻힌 곳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다면 그를 살린 것은 따뜻한 남쪽 햇살이 아니라 무리에서 쫓겨난 또 다른 외톨이들이다.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아서 심지어 가족마저 내버린 이들이 누군가의 삶을 구원한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에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자리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정말 필요없는 존재라서가 아니라 그곳이 우리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매니의 최초의 선택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매니가 선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혼자가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시카 M. 실바 교수는 <커밍 업 쇼트>에서 평생 직장을 구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양육하는 전래의 성인 모델이 불가능해진 지금 사람들은 성인이 된 증표를 개인의 자아 속에서 발견한다고 말한다. 즉 평생 직장과 결혼 여부 대신 자신이 이제까지 받았던 상처를 어떻게 갈무리했고 그 상처를 디딤돌 삼아 어떤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지가 성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장은 자아라는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 속에서 이뤄짐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제시카 M. 실바 교수는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관계라는 ‘바깥’ 대신 자기라는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이유는 어쩌면 바깥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 <당신의 과녁>의 주인공이 진짜 범죄자가 되지 않고 세상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말려주고 곁에 있어준 친구와 가족 덕분이었고 <아이스 에이지>의 매니가 죽지 않고 남쪽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처지의 아웃사이더들 덕분이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란 우리를 혼자로 만들지 않는 자리이다. 무리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때, 혼자 있어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 상상 속에서 혼자 말하던 이야기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오랜 여정이 끝났음을 알게 된다. 물론 우리는 변하고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도 변해서 여정은 또 한 번 시작될 수도 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왕 덕분에 죽지 않았다. 사람은 서로에게 늑대일 수 있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삶은 잡아먹히지 않는다. 만약 늑대조차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삶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 될 것이다.
2024년 12월 30일부터 2025년 1월 2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