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 솔로>는 암벽 등반가 알렉스 호놀드가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900m 수직 암벽 앨 캐피탄을 오르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자연은 신성하다는 말은 상투적인 관용어 같지만 어떤 자연은 눈앞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과 위압감을 느끼게 만든다. 네팔에 있는 구름을 뚫은 봉우리들에 원주민들이 괜히 신의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알렉스 호놀드는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긴 편이어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체격이지만 엘 캐피탄 앞에서는 한낱 점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엘 캐피탄을 오르는 그의 모습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거대한 세상의 벽에 맞서 싸우는 전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실로 놀랍다. 나는 실내 암벽장에서 두어 달 클라이밍을 해본 적이 있는데 실제 암벽의 모서리를 흉내 낸 홀드는 뾰족하거나 뭉툭해서 손으로 잡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손을 기형적으로 뒤틀어야 하는 데다가 잡을 수 있는 면적이 적으니까 필연적으로 손가락에 부하가 걸린다. 손에 부하가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리가 안정감 있게 버텨줘야 하는데 다리 역시 홀드를 딛고 서 있기 때문에 사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리보다 손을 쓰는 데 능숙하다. 그래서 같은 상황이라면 손으로 잡은 부위가 얼마나 좁든 간에 다리보다는 손에 의존하게 된다. 당연히 손에 걸린 부하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고 손보다는 사정이 낫다지만 다리 역시 금세 경련이 인다. 그 사이에 있는 허리는 오도가도 못한 채 뻣뻣해지는데 그나마 이것도 홀드를 잡고 있을 때의 얘기다. 불안정한 자세로 움직이다 홀드를 놓치거나 발을 헛디디면 즉시 떨어진다. 그래서 클라이밍은 그렇게 많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체력 소모가 극심한 운동이다.
실내에서도 이 정도인데 아무런 안전 장비도 없이 수직 높이만 거의 1km에 달하는 암벽을 올라간다는 것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일이다. 여기에는 손가락 몇 개만으로 체중을 지탱할 수 있는 악력, 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할 수 있는 유연함,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내는 시야,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죽는다는 공포를 견뎌내는 용기, 극한의 상황 속에서 패닉에 빠지지 않는 안정감 등 인간이 가진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다. 사실 안전장비 없이 암벽을 오르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도전 정신을 일깨우고 강한 동기부여를 일으켜 삶에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게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냉소적으로 보면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길은 굳이 어렵고 위험하게 올라가는 쇼라고도 할 수 있다. 그걸 한다고 해서 경제가 나아지거나 전쟁이 멈추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의 삶이 좀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의미를 축소시켜 말한다면 단지 어려운 길을 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다. 똑같은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고통이 있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나을 수도 있다. 가령 똑같이 10억이 생겨도 일을 해서 10억을 버는 게 복권에 당첨되어 10억을 버는 것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복권에 당첨되어 얻은 10억은 금전적 가치 외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일을 해서 10억을 벌면 금전적 가치는 오히려 부수적인 것이 된다. 돈은 생활에 꼭 필요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돈이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이라는 과정을 어떻게 의미있는 경험으로 만드는가이다. 몸과 머리를 사용하고 주변 사람들과 협동하여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많은 실패와 적은 성공을 겪으면서 만들어내는 삶은 귀하다. 이런 삶은 의미로 충만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치를 꺼내보여줌으로써 세상을 놀라운 풍경으로 만든다. 그런 사람에게 10억은 일종의 상장이다. 벽에 걸거나 서랍에 넣어둘 수는 있어도 꺼내다 쓸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복권으로 10억을 얻게 되면 이 10억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금전적 가치가 생의 핵심 가치가 되면 물건을 사는 것 외에 다른 식의 자아 실현을 할 수가 없다.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 구매 밖에 없는 삶은 시한부나 마찬가지다. 10억이 0원이 되는 순간 삶은 소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똑같이 엘 캐피탄의 정상을 올라가더라도 등산로 대신 암벽을 수직으로 타고 올라가는 것은 가장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자기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 일을 잘하기 위해 모든 시간을 쏟아붓는 것도 멋지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망설임, 절망과 체념, 무기력과 우울함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 꾸준히 어떤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동시에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여러 가지 불순물도 함께 감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알렉스 호놀드는 괴짜지만 그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이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는 하나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다양한 종류의 라이프 케이스가 존재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여러 개의 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이 여러 개 있다면 모두가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각자 마음에 드는 문으로 들어가도 되고 들어갔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와서 다른 문으로 들어가도 된다. 자유로운 세상이란 문이 많은 세상인 것이다.
알렉스 호놀드는 운이 좋은 편이다. 암벽을 오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걸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암벽에 최적화된 긴 팔다리와 맨몸으로 암벽에 매달려도 공포심 대신 희열을 느끼는 뇌를 가지고 있다. 타고난 재능인지 노력의 결과인지는 모른다. 원래 팔다리가 긴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장기부터 암벽을 꾸준히 타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편두엽 역시 유전자의 결과인지 반복된 연습의 결과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긴 팔다리와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편두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 등반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미국에서 프리 솔로를 하고 있는 수많은 등반가 중에는 그보다 더 팔다리가 긴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보다 공포를 덜 느끼는 편두엽의 주인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긴 팔다리와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편두엽, 반복되는 연습을 이겨내고 몸에 새길 줄 아는 근면함과 목표를 정하면 포기하지 않는 의지, 등반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를 돋보이게 촬영해주는 동료와 자본력을 가진 제작사. 이런 것들은 개인의 재능이나 노력 어느 한 쪽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다. 둘 다 영향을 끼쳤겠지만 일단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두자.
알렉스 호놀드는 암벽 등반가로 성공하고 싶었을까. 잘 나가는 치과의사 정도의 수입을 올리면서 잡지와 신문에 오르내리는 일은 과히 나쁜 일이 아니니까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물어볼 수도 있다. 알렉스 호놀드는 유명한 등반가가 되지 못했다고 해도 암벽 등반을 계속 했을까. 이 질문에는 좀 더 분명히 답할 수 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재능인지 실력인지를 떠나서 매스컴이 주목하고 높은 수입을 올리고 영화에 출현하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암벽을 오르는 것뿐이다. 내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만 열심히 몰두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의 힘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 것 얻었기 때문이다. 영화 <프리 솔로>의 주인공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엘 캐피탄이 아니라 다른 암벽을 오른 누군가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엘 캐피탄을 올랐을 거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하나의 유의미한 케이스로 만들 것인가. 암벽을 오르는 것과 성공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전자는 통제할 수 있지만 후자는 통제할 수 없다. 알렉스는 후자를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면 성공이 찾아온다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성공한 암벽가라는 휘장을 걷어내면 거기에 있는 것은 단지 맨몸으로 벽을 오르는 한 인간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벽을 오를 것인가다.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사람은 유토피아의 독재자라고 말했다. 우리가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때 거기에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독재자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알렉스 호놀드가 통제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육체이지 암벽이 아니다. 통제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영역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여러 영역과 협상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하나의 유의미한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성공 여부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놀라운 암벽가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철저하게 고독한 개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도 있고 여자친구도 있고 친구처럼 지내는 촬영팀 그리고 동료 등반가들도 있지만 산을 마주하고 올라가는 사람은 알렉스 호놀드 단 한 사람뿐이다. 이것은 우리 주위에 아무리 좋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결국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 같다. 세상에 각자 자기만의 몫이 있다는 말은 좋은 말이다. 주위의 그 누군가도 도와줄 수 없는 혼자만의 영역이 있다는 말 역시 그렇다. 그러나 거대한 산에 맞서 스스로를 전사로 규정하며 인생을 목숨을 건 싸움에 비유하는 이 모습은 어쩐지 신자유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모든 책임 역시 개인에게 있다는 말은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알렉스 호놀드는 엘 캐피탄을 맨몸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우리는 알렉스 호놀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도전, 강인한 정신력과 용기, 게으름이 끼어들 틈이 없는 자기 관리 등은 분명 미덕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떨어지는 순간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도와줄 필요도 없으며 그 모든 것은 선택한 나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은 혼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것이 알렉스 호놀드라는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알렉스 호놀드가 다치거나 죽지 않고 무사히 엘 캐피탄에 오르는 모습은 감동적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리 솔로로 엘 캐피탄을 오르지 못한다. 로프를 사용해도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인생을 오로지 홀로 올라가야 하는 거대한 암벽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암벽을 올라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짜릿한 동기부여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네 상처와 죽음에는 다른 누구의 책임도 없다는 말도 된다. 그들에게 암벽은 기회의 땅이 아니라 사지이다.
한 개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을 묵묵히 최선을 다해 걸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두려움과 공포, 부상과 인간관계의 손실 같은 것을 불만없이 껴안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점에서 영화 <프리 솔로>는 인상적이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의 삶과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며 다 같이 힘을 합쳐 안전한 등산로를 조성하는 대신 인생을 위험하고 불안한 길로 상정한 채 도착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는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제목처럼 맨몸으로 암벽을 오르는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유(프리)와 개인(솔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안전 장치 없이 암벽을 오르는 일이 자유와 개인이라고 말할 때 자유와 개인은 위대하면서 불안해진다.
2024년 12월 28일부터 2024년 12월 30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