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결정권, 독립적 권리를 주장하는 건 디즈니 공주들의 일관된 DNA인 것 같다. 봉건제 이전의 부족연합체 사회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배경은 아무리 봐줘도 중세이고 그냥 보면 고대이다. 실제 역사가 아닌 가상의 세계를 두고 시대 운운하는 건 안경 낀 샌님처럼 보일 지 모르겠지만 실제 안경 낀 샌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정치제도부터 결혼문화, 의복과 주거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대의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오직 사람만이 근대적 캐릭터라는 게 더 이상하다. 이 영화는 고대(혹은 중세)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왕과 왕비 그리고 메리다의 가족 관계는 21세기 미국 핵가족의 형태에 더 가깝다. 가정에 무관심한 아버지와 자식 교육에 열성인 어머니, 사춘기에 들어가 반항하기 시작한 딸까지. 메리다가 하기 싫은 게 결혼이 아니라 과외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좀 바꿔보기로 했다. 결국 이 영화는 메리다가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다가 가정을 파탄내고 그것을 수습하면서 화합에 이르는 이야기 아닌가. 메리다가 애초에 왕비와 대립한 이유는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강제로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그런 부모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여전히 세상에는 부모가 결혼하라는 상대와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켜서 하는 결혼이 아닐 뿐이지 결혼 전에 양가의 허락을 받는 문화는 여전히 건재하다. 나아가 결혼이라는 영역을 벗어나면 부모가 자녀의 삶에 관여하는 영역은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성인이 되기 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 영화가 굳이 배경을 고대(혹은 중세)로 설정한 것은 단지 옛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모가 자녀의 삶에 관여하고 심지어 결정하는 문화는 마치 고대의 이야기처럼 낡고 오래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말은 남자들이 치마 입고 도끼를 휘두르던 시절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영화의 결론이 아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시작한다. 메리다는 강제로 자기를 결혼시키려는 어머니를 피해 말을 타고 무작정 달리다 마녀의 집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어머니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약을 얻는다. 그런데 정작 그 약을 먹은 어머니는 생각이 바뀌는 게 아니라 몸이 바뀌게 되는데 바로 왕, 즉 아버지가 그토록 사냥하고 싶어하는 거대한 곰으로 변하고 만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어머니는 사실상 메리다에게 ‘곰’ 같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곰 같은 어머니라도 어머니와 곰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아이에게 생명을 주고 지키고 헌신하는 존재지만 후자는 이해가 불가능한 다른 종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어머니가 인간일 때는 도무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곰처럼 느껴졌지만 정작 어머니가 곰으로 변한 다음부터는 자기를 사랑해주고 아껴준 어머니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곰으로 변한 어머니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생선을 잡을 줄도 몰라서 잡아주어야 했고 심지어 날 것을 먹지도 못해서 구워줘야만 했다. 사람에 비유하면 밥을 먹을 줄 모르는 아기에게 이유식을 만들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곰이 되면서 동시에 아기가 되었다. 메리다는 그런 어머니를 돌보면서 딸이 아닌 어머니의 위치에 서게 된다. 두 모녀의 위치가 서로 역전된 것이다. 이것은 서로의 입장을 바꿈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발판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는 딸의 결혼을 원했고 딸은 자유를 원했지만 어머니가 곰이 된 이후 두 사람의 목표는 하나로 모아지는데 그건 바로 어머니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결혼이나 자유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진정한 목적은 바로 두 사람이 서로를 상처입히지 않고 아끼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메리다가 주장하는 자기결정권은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지만 그게 정말 당연한 것인지는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는 협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명한 권리처럼 여겨지는 천부인권조차도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 그리고 숱한 투쟁과 협상을 거쳐 비로소 공인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공인된 인권조차 지금도 특정 국가에서는 허울뿐인 개념으로 취급하는 데가 많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게 아니라면, 모든 권리는 그 권리가 영향을 미치는 모든 영역의 협의물이다. 예를 들어 메리다가 부모가 시키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서구권 관객에게는 당연한 주장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마 당연한 게 아닐 것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 권리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 협의가 되지 않은 것이어서 그렇다. 메리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배경은 부모가 시키는 결혼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세계다. 영화 속에서 이단자는 왕비가 아니라 메리다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이 세계에 맞서 권리를 주장할 때 어떻게 그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지 그 협의의 과정을 그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개 개인이 세계와 맞서는 이야기에서 상처를 입는 건 세계가 아니라 개인이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다가 다치는 것은 돈키호테고 여의봉을 휘두르다 화과산에 묻히는 것은 손오공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상처를 입는 건 개인이 아니라 세계다. 곰으로 변하는 건 메리다가 아니라 왕비인 것이다. 메리다는 끝까지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 왕비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마녀의 약이라는 방법을 사용했고 그 결과 왕비는 곰이 되었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갑자기 돌봐야 할 대상이 된 셈이다. 메리다로서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겠지만 나는 이 현상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는 데는 투쟁이나 혁명 같은 방식도 물론 있겠지만 그 반대쪽에는 자기로 인해 갑자기 달라져버린 세계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결혼은 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겠다는 주장은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일단 이 세계에서는 생소한 것이다. 특히 메리다의 어머니, 즉 왕비에게는 듣도보고 못한 생각일 것이다. 왕비는 지금까지 부모가 딸의 결혼을 결정해주는 게 당연한 세계에서 자랐고 본인도 그 세계의 질서를 따라 결혼했다. 왕비가 왕을 마음에 들어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설령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결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의 질서이고 자신은 그 질서를 내면화함으로써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안정감을 얻었으니까. 말하자면 왕비에게 결혼문화란 필요할 때 얼마든지 바꿔입을 수 있는 겉옷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토대에서부터 받쳐준 정신의 척추다. 그런 의미에서 메리다는 단지 새로운 주장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왕비가 가진 정신적 근간을 뒤흔든 것이나 다름없다. 왕비가 곰으로 변한 게 메리다가 가져온 마법의 약 때문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메리다의 주장은 곧 왕비를 질서가 잡힌 세계의 인간이 아니라 무질서한 세계의 짐승으로 바꿔놓았다는 은유로도 읽힌다. 즉 메리다는 세계의 질서에 정면으로 대항함으로써 세계의 척추를 꺾었다. 그러니 메리다에게 무너진 세계를 돌보고 다시 일으켜세울 책임이 생기는 것은 일견 당연하지 않을까.
숱한 디즈니 공주 중에 메리다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아마도 이 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디즈니 공주들은 자신이 원하는 권리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상처입힌다. 그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그녀들의 이야기였다고 해도 아마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메리다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기가 아닌 세계를 상처입히고 그 상처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이야기는 시사점이 크다. 왜냐하면 우리와 대치한 세계는 우리를 위협하거나 괴롭히는 세계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를 사랑하는 연약한 세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뭔가를 요구하는 상대는 싸워야 하는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싸우지 않을 게 분명한 사람들, 이른바 가족이나 친구들인 경우가 더 많다. 단지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세계를 깨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억압적인 세계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겠다는 철의 의지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뚫고 나가야 할 세계가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세계라는 인식 그리고 자기가 구멍 낸 세계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하는 책임감 또한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그건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음에도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흐느끼는 메리다의 모습은 우리의 주장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권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권리는 비로소 협의된다.
2024년 12월 15일부터 2024년 12월 17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