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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캐스트 어웨이』

by 다시

제목에 어웨이가 들어가 있어서, 뭐, 주인공이 사람들과 떨어져서 무인도에 갇히는 이야기니까, 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검색해봤더니 캐스트 어웨이란 낭비하다 또는 포기하다, 라는 뜻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척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무인도에 불시착했지만 4년이 넘는 시간을 홀로 버틴 끝에 자기가 살던 도시로 돌아온다. 말하자면 제목과는 다르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셈인데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시간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죽어서 남은 시간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에 비하면 그다지 낭비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신이 가져가려고 뻗은 손을 물리치고 자기 시간을 지켰다는 점에서 보면 시간을 낭비한 게 아니라 벌었다는 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척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예컨대 결혼을 목전에 둔 여자친구를 잃어버렸고 직장을 잃어버렸으며 친구들도 잃었다. 무엇보다도 도시에서는 척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정보를 말소시켰고 장례식까지 치른 상태다. 생명은 지켰지만 삶은 잃어버렸다고 하면 정확한 말이 될까. 척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시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돌아가기만 하면 원래의 삶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을 텐데 정작 거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막막한 삶이다. 가족도 없고 직장도 없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을 필요로 했지만 세상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캐스트 어웨이라는 제목의 주체는 척이 아니라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는 불우한 사고를 겪고도 불굴의 정신으로 귀환한 인간 승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의 생존기가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척이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필요로 하지만 세상은 딱히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물도, 음식도, 집도, 자동차도, 친구도, 아내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없다고 해서 세상이 멈출 일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등바등 고생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우리가 없어서 세상의 어디 한 곳이 멈추거나 마비되어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만 별로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냥 우리가 살고 싶어서 밖에 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꽤나 이기적인 이유다.


멤피스로 돌아온 척을 사람들은 딱히 반기지 않는다. 놀랍다고, 대단하다고, 다행이라고는 말하지만 사실은 불편하다. 가장 불편한 사람은 아마도 켈리의 남편이겠지만 나머지도 죽어서 마음 속에 묻은 사람이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관계가 끝났고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적어도 척을 둘러싼 세상의 입장에서 척은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척도 느낀다. 자기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해졌는지 그리고 특히 켈리와 켈리의 가족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그래서 사고로 죽을 뻔하고 무인도에 갇혀서 겨우겨우 돌아온 건 자신인데도 척은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은 마치 살아서 미안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하는 말은 분명하다. 살아야 한다고.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도시가 아니라 섬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섬에 도착한 척에게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물도, 음식도, 잘 곳도 전혀 없다. 물을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코코넛 속에 있는 물을 마시거나 빗물을 모으는 것뿐이다. 먹을 것이라곤 딱딱한 코코넛 과육과 게 그리고 생선뿐이다. 그마저도 처음에는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코코넛 과육 외에는 먹질 못했다. 페덱스 상자가 조류에 떠밀려온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그속에 딱히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없다. 망사로 된 드레스, 배구공, 스케이트 다위 뿐이다. 그러나 척은 이 물건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살아나간다. 망사 드레스는 그물로, 스케이트는 도끼로, 배구공은 말상대로 삼는 식이다. 다행히 나중에는 불을 피울 수 있어서 게도 굽고 생선도 굽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크게 좋아진 건 아니다. 4년 뒤를 보면 척은 생선을 잡아서 굽지 않고 생으로 먹고 있다. 딱히 회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진 않고 아마도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척은 해변에 불도 피워놓고 나무로 구조 신호도 보내는 등 섬을 탈출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해봤다. 그러나 한 번도 외지의 배가 섬에 도착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배를 기다리는 동안 척은 살아있는 생선을 날로 먹을 수 없는 인간에서 날로 먹을 수 있는 인간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척이 죽을 생각을 안 해봤던 건 아니다. 밧줄을 만들어 목을 맬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바다로 나간 것은 바다 너머에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켈리의 사진을 봤다. 그건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인 동시에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삶의 얼굴이기도 했다. 켈리의 사진을 보면서 척은 생각했을 것이다. 돌아가기만 한다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결국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그때가 오면 이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낸 걸 자랑스러워하게 될 거라고. 말하자면 켈리의 사진은 약속과 같았다. 돌아가기만 하면 그곳엔 이 힘든 시간을 모두 보상해줄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약속.


그렇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뭔가를 기대하는 것도 정신의 균형이 잡혀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즐거운 일을 떠올리면서 힘을 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그것도 매일매일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생활을 계속하는데 정신이 붕괴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이제 끝이라고, 더 이상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척이 단지 켈리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생존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을까. 음… 아닐 것 같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고. 이대로는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고 말 거라고. 그런 두려움과 불안감이 급습하면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그럴 때는 정신의 밧줄을 놓고 깊은 심연 속으로 하릴없이 추락하는 수밖에 없다.


척이 바다로 나간 데는 아마 이 두 가지 힘이 둘 다 작용했을 것이다. 바다 너머에 진정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여기서 계속 있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생각. 요컨대 출항은 희망과 우울이 협업한 결과다. 그리고 큰 파도를 넘어 마침내 바다로 나가는 척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는 아직 척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다. 그가 고생은 하겠지만 마침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우리는 당첨된 복권을 수령하러 가는 사람을 응원하는 기분으로 척을 응원하는 것일까.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척을 보면서 환호했던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불을 피우는데 성공했을 때도 그랬다. 그때 우리가 척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던 이유는 그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건 단지 작은 변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안간힘을 써서 그 작은 변화라도, 뭐라도 상황을 낫게 만들어보려는 의지와 성공에 우리는 열광한 것이다. 파도도 마찬가지다. 척이 마침내 구조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만약 정말 그게 다라면 애초에 파도를 넘은 것 따위는 아무 느낌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더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았고 설령 죽더라도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하고 성공한 거기에 우리는 열광했다. 말하자면 누가 봐주지 않아도, 누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면 잘될 거라는 보장 같은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는 불확실한 확신을 가지고 거기에 몸을 던지는 것에 우리는 반응한 것이다.


켈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사람들이 너의 장례식을 이미 치렀다고 말했을 때 어쩌면 나는 척이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척이 돌아가기만 하면 기대하던 삶이 펼쳐질 거라는 희망 하나로 그 모든 걸 견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상 도착하니 기대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마저 잃어버렸다면 도대체 살아갈 힘은 이제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척은 자살하지 않는다. 그건 도시 생활이 무인도의 생활에 비하면 훨씬 쉬워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들어 보려고 애썼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켈리가 결혼했고 사람들이 자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척의 심정은 또다른 무인도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뀐 게 있다면 바다의 무인도에 있을 때는 먹을 게 없고 갈 곳은 분명했는데 도시의 무인도는 먹을 건 풍부하지만 갈 곳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아무튼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만은 틀림없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기답게 살기 위해서는 또 한 번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막막하고 등대 하나 없는 검은 바다를 향해 한 번 더 나아가야 한다고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필요로 하는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곳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그것이 척의 물음표였을 것이다.


결국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지만 그래서 영화는 묻는다. 세상이 너를 캐스트 어웨이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심지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그런 곳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우리를 우리답게 살 수 있는 곳을 끝까지 찾을 수 없다고 하면 대체 우리는 왜 이 길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다시 생각해봐도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척이 무인도에 표류한 후 계속 다칠 때 피가 나고 피부가 벗겨질 때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지 않겠냐고 생각하기도 했다. 거기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척이 불을 피웠을 때 마침내 바다로 나갔을 때 감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이 외면한 인간이 소외 속에서 죽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척의 그런 행동들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요컨대 세상은 확실히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확실히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척을 보면서 감동하는 이유는 바로 척의 그런 행동들이 우리 내면에 있지만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그 이유와 호응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쉽게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가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위엄과 감동을 느끼며, 그 위엄과 감동은 우리 안에도 그것과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요컨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모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블랙박스 같은 것이어서 있다는 것만 알 뿐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마치 척이 끝까지 열어보지 않았던 페덱스 상자처럼. 척이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게 페덱스 직원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척은 그 상자를 자기 자신으로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 보잘 것 없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는 이것을 어떻게든 도착해야 하는 장소에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왜냐하면 무엇인지는 몰라도 거기에는 분명히 뭔가가 들어있고 그것은 어딘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2025년 7월 22일부터 2025년 7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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