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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도라에몽 : 스탠바이미』

by 다시

일전에 나무위키에서 박평식 평론가에 대한 글을 보다가 1년에 우리나라에서 극장에 걸리는 영화의 수가 대략 800편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정말 800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는 극장도 많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영화나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등 꽤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니까 확실히 적지 않은 수의 영화가 매년 극장에 걸린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사실 고민이 된다. 가급적이면 좋은 영화만 보고 싶은데 어떤 게 좋은 영화인지 알아내기가 어렵다. 포털 사이트 평점이 높아서 기대하고 봤다가 실망한 적도 있고 평론가 평점을 보고 봤다가 언제 끝나는지만 기다렸던 적도 있다. 의외로 전혀 기대하지 않고 봤지만 생각보다 재밌어서 이 영화 괜찮은데? 하고 찾아봤더니 관객 점수도 평론가 점수도 상당히 낮았던 것도 있었다. 요컨대 무엇이 좋은 영화인가 판단하는 기준이란 말 그대로 오리무중인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한다면 추려내기가 좀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볼 때는 정말 지독하게 지루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문득문득 생각나서 다시 봤더니 와, 이게 이런 영화였어? 하고 경탄했던 적도 있고, 몇 번을 다시 봐도 재미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뭔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영화도 있다. 소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는 재미는 없지만 좋은 영화에 속한다. 좋은 게 무엇이냐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 중 하나는 환기이다. 창문을 열어서 안에 있는 공기를 내보내고 바깥에 있는 공기를 불러들일 때의 그 환기다. 그건 재미있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과는 다르다. 말 그대로 영화가 느닷없이 내 몸의 창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준비할 틈도 없이. 그 순간 바깥의 공기가 내 속으로 쑥 밀려들어오고 그 공기는 순식간에 내 몸을 한 바퀴 돌아서 사라져버린다. 그때의 기분은 꼭 환희나 열정 같은 긍정적인 기분인 것만은 아니다. 슬프거나 우울해지거나 막막하거나 이상한 공허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방금 전까지 기분이 상당히 좋았는데 오히려 영화를 보고 심하게 다운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바깥의 공기이다. 영화가 문을 열고 바깥의 공기를 안으로 들여보냄으로써 내 안에 돌고 있던 공기를 전과는 전혀 다른 성질로 바꿔버린다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의 기준이다. 기분이 좋고 나쁘거나, 즐겁고 우울하고는 나중의 문제다.


그러나 그렇게 나름대로의 기준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 본 영화에 대한 판별법이지 아직 보지 않은 영화를 판단하는 방법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확실히 타율을 높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은 존재한다. 가령 ‘죽기 전에 보아야 할 X가지 영화’라든가, ‘아카데미 작품상 리스트’, ‘황금종려상 리스트’ 같은 것이 그렇다. 실제로 이런 영화들은 재미 여부와 상관없이 창문이 열리는 빈도가 높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싶으면 나도 모르게 이런 영화들 중에서 끌리는 것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보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건 틀림없이 좋은 영화야, 라는 확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끌리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예를 들어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들은 대부분 관객의 평점도 높고 평론가 점수도 높다. 상도 여럿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품들에는 이상할 정도로 손이 잘 안 간다. 겨우겨우 의지를 동원해서 『마스터』도 봤고 『팬텀 스레드』도 봤지만, 좋은 영화라는 것도 확실히 알겠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깥의 공기도 분명히 느꼈지만, 어쩐지 다음 작품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제도 원래 보려고 했던 건『추락의 해부』였다. 진작부터 보리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영화였고 볼 시간도 충분했다. 느닷없이 걸려올 전화를 걱정할 일도 없었고 불안하거나 신경 쓰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본 것은 앞에도 써놓은 것처럼 ‘도라에몽’이었다. 도라에몽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어렸을 때는 같은 만화를 여러 번 빌려볼 정도로 좋아했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도구를 보고 있으면 꼭 미래엔 저런 게 정말로 생길지도 모른다고 상상하지 않아도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창문을 열어주는 영화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내가 이 영화를 보기로 결정한 이유가 창문을 열 가능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창문을 열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도라에몽 : 스탠바이미』는 평범한 초등학생 진구에게 어느 날 자기가 고손자라고 주장하는 한 아이와 도라에몽이라는 고양이형 로봇이 나타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책상 서랍 속에서 나타난 아이는 진구가 미래에 실패해서 거액의 빚을 지는 바람에 자손들이 모두 어렵게 살고 있다고, 그래서 고조할아버지인 진구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미래에서 왔다고 말하며 도라에몽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도라에몽은 자기는 여기 혼자 남기 싫다며 미래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진구의 고손자가 진구가 행복해지지 못하면 도라에몽이 미래로 돌아갈 수 없도록 조건을 설정해버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남게 된다.


일단 도라에몽이 남기 싫어하는 이유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아까 평범하다고 했지만 사실 진구는 아무리봐도 평범보다는 좀 모자란, 나쁘게 말하면 약간 문제가 있는 게 아닐 정도로 또래에 비해서 어리숙한 아이다. 지각하면 혼난다는 걸 알면서도 꾸준히 지각하고, 퉁퉁이와 비실이가 끊임없이 괴롭히는데도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또 같이 어울린다. 공부를 잘하거나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신경이 좋은 것도 아니며 이렇다 할 특기도 없는데 하필 또 좋아하는 아이는 학교에서 가장 예쁜 이슬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안쓰러워서 그렇다.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 지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의외로 고집도 세다. 착하지만 욕심 많고, 나쁜 의도는 없는데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타입이다. 이런 타입은 옆에서 보고 있으면 괜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무래도 불편하다.


잘은 모르지만 도라에몽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미래에서 온 덕분에 기술력은 있다. 운동신경은 없지만 어떤 공이든 척척 잡아내는 글러브는 있고, 공부는 못하지만 써서 먹기만 하면 저절로 외워지는 암기빵도 있다. 심지어 누군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게 만드는 희한한 알도 있다. 기술이라는 건 사람이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도구들을 보고 있으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어쩌면 피지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예전에 보았던 신형철 평론가의 책『몰락의 에티카』에도 상담을 받으러 온 여자 환자들이 의사에게 사랑에 빠지는 ‘전이 사랑’의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이처럼 감정이라는 것도 물리법칙처럼 조건만 구비되면 저절로 작동하는 성질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이 그렇게 피지컬한 것으로만 채워진 존재라면 피지컬을 극한까지 발휘하게 해주는 도라에몽의 도구들을 사용하면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공중을 날 수 있게 해주는 대나무 헬리콥터는 엉뚱한 곳에 부딪혀서 사고가 날 뻔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각인시켜주는 알은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전혀 다른 아이를 좋아하게 만든다. 심지어 이슬이가 자기를 싫어하도록 만들기 위해 먹었던 약은 과복용하는 바람에 이슬이뿐만 아니라 엄마와 도라에몽까지 도피시키게 만드는 걸로 모자라 자기 자신까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처음에는 대체 어떻게 하면 저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도 저것밖에 못할까 싶기도 하고 도구가 아니라 사용자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컨대 똑똑한 영민이 같은 아이가 도라에몽의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까지도 훨씬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진구가 또래에 비해 ‘조금’ 모자란 아이라면, 도라에몽의 도구는 현 시대의 도구들에 비해 ‘많이’ 발달된 것이다. 도라에몽이 주머니에서 사탕 꺼내듯 꺼내니까 아기자기해 보이는 것이지, 사실 그 위력은 도무지 적당히라는 걸 모른다. 예컨대 설정만 하면 누구든 맹목적으로 좋아하게 만드는 알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장치이고 사람의 나이를 조절하는 타임 보자기는 시간을 조종하는 장치이다. 진구는 기껏해야 친구들보다 약간 모자란 정도인데 도라에몽이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것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갓난아이 손에 장인이 만든 일본도를 쥐어준 것 같다고 할까. 아마 진구가 아니라 다른 아이가, 혹은 아무리 현명한 어른이 그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미래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그 도구들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진구가 그렇게 계속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쩐지 다음 번엔 도라에몽이 주머니에서 어떤 도구를 꺼낼까 기대가 된다. 그게 무엇이든 그게 진구를 행복하게 만드는데 실패할 거라는 사실은 뻔하다. 그러나 어쩐지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도라에몽의 이번 도구는 뭔가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정말로 진구의 인생을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줄 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른 기대도 있다. 그것은 과연 도구가 만드는 문제를 이번에는 진구와 도라에몽이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것이다. 이번 영화도 그렇지만 원작에서도 도라에몽이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도구들은 대부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진구와 도라에몽은 그걸 필사적으로 수습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 그 과정이 지나고 나면 사실 원점으로 돌아왔으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쩐지 뭔가 좋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뭔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를 해결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면 처음보다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건 어쩌면 우리가 생각보다 좋은 결과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나쁜 결과를 원한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결과보다는 얼마나 흥미진진한 과정을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스티븐 잡스는 “과정이 보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그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진구는 이슬이와 결혼하는 미래가 바뀌는 걸 막기 위해서 미래로 달려가 고군분투하는데 우리가 흥미를 느끼고 진구를 응원하기 시작하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얼마나 열심히 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얼마나 인생에 대해 진지해질 수 있느냐가 우리를 좀 더 기분 좋게 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도라에몽이 내미는 도구들은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문제들이다. 이 악의없는 푸르딩딩한 고양이 로봇은 순진한 얼굴로 진구에게 문제를 내밀고 오롯이 진구가 가진 능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구는 조금 다른 아이가 된다. 변신을 하거나 진화해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아이가 된다는 게 아니다. 진구는 언제나 진구일 뿐이다. 게으르고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또 같이 어울리는, 그러면서도 가장 예쁜 아이를 좋아하는 조금 모자란 아이다. 하지만 도라에몽의 도구를 사용하다가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진구는 그러면서도 약간은 다른 아이가 된다. 말하자면 원래 진구 안에 약간의 틈 같은 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은 우리가 알고 있던 진구의 안에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치 도라에몽의 주머니처럼.


그리고 자꾸 모자란다고 해서 좀 미안한데 꼭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구에게는 굳이 틈을 열어보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꽤 괜찮은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다. 예컨대 도라에몽이 왔을 때 진구는 이슬이는 물론이고 비실이나 퉁퉁이처럼 자기를 괴롭히던 아이들에게까지 도라에몽을 소개시켜준다. 미래의 도구를 마음껏 꺼낼 수 있는 도라에몽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마치 당첨된 복권과도 비슷할텐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서 보여주는 것이다. 혹시 아이들이 도라에몽을 빼앗으려 하거나 자기들 마음대로 이용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건 조금도 없이. 거기다 진구는 도라에몽을 기계로 여기지 않는다. 분명 처음 소개할 때 로봇이라는 말을 들었고, 고손자가 마음대로 설정을 세팅하는 것까지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진구에게는 자기가 도라에몽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없다. 때로는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진구에게 있어 도라에몽은 친구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나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나 모두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요컨대 진구의 세상에 적은 없다. 종류가 다른 친구만 많을 뿐이다.


마지막에 퉁퉁이와 한 판 승부를 벌이긴 하지만 그것도 퉁퉁이를 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그 싸움의 목적은 오직 도라에몽이 마음 편하게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말하자면 자기를 괴롭혀서 싸운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싸운 것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도라에몽은 제품이다. 아마 제조사가 있고 생산년월도 있고 모델명도 있을 것이다. 잘 찾아보면 엉덩이 같은 곳에 제품 정보가 표기된 스티커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도라에몽을 제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이자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 생각하는 이유는 진구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친구처럼 대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도라에몽을 제품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게 기계든 생명체든 모두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구의 세계관은 세계를 다정한 곳으로 만든다. 이 아이는 확실히 다른 아이보다 조금 모자랄지도 모르지만 언제 올 지 모르는 로봇 친구를 위해 항상 서랍을 열어두는 아이다. 그리고 그 열린 서랍을 통해 우리는 마음에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유년을 다정하게 추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 우리가 세계를 다정하게 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때는 그렇게 뭔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넓은 집이나 큰 텔레비전, 외국에서 만든 자동차가 꼭 필요한지 몰랐다. 그러나 친구는 확실히 필요했고 뭔가가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어떤 바람은, 그렇게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불어온다. 그 바람은 신선하고 맑고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가움은 없지만 따뜻하고 졸립고 편안하다. 영화『도라에몽 : 스탠바이미』는 말하자면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창문을 여는 영화가 아니라 서랍을 여는 영화다.



2025년 7월 16일부터 2025년 7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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