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챗GPT를 검색하니 연관 검색어로 ‘챗GPT 사주’가 나왔다. 역술인을 찾아가지 않아도 어플이나 사이트에 개인정보만 입력하면 1분도 안 되서 사주를 보여주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사주를 본 적이 있다. 어플로도 해봤고 꽤 잘 맞춘다고 소문난 집을 소개받아서 가보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대략 5년 정도가 흐른 지금 그들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결과적으로 맞은 건 하나도 없었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정보를 추출하는 어플이나 실제 사람을 만나서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역술인이나 둘 다 과거는 생각보다 꽤 맞혀서 놀랐지만 미래는 하나도 맞히지 못했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 없이 그냥 재미 삼아 챗GPT에다 내 사주를 넣고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점이 언제일 것 같냐고 물어보았다. 복잡한 분석 끝에 장황한 설명을 내놓았지만 요점만 말하자면 지금부터 앞으로 5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될 거라는 얘기였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이번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냐고 물었다. 그리고 내심 그 시기가 이미 지나갔기를 바랐다. 그러나 챗GPT가 말한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다름 아닌 지금부터 앞으로 5년이었다.
기대하지 않길 잘했다고,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어도 어떻게 AI가 사람의 미래까지 맞추겠냐며 휴대폰을 끄고 누웠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힘든 순간을 이겨낸 경험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내가 했던 생각은 어떻게 AI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는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바로 앞에 지금부터 5년이 당신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가 될 거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는 지금부터 5년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될 거라니. AI가 가장 먼저 학습해야 하는 건 자기 모순에 대한 죄의식이 아닐까 싶었다.
영화 『노틀담의 꼽추』에도 AI와 비슷한 인물이 나온다. 파리의 영주이자 재판관인 프롤로는 파리가 지옥으로 타락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며 집시를 잡아들이지만 오히려 집시를 잡아들이려는 와중에 파리를 불바다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은 집시에게 있다고 말하는 인물인데 이런 프롤로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벽난로 앞에서 <헬파이어>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 노래에서 프롤로는 자신을 사랑의 고통 속으로 밀어넣은 것은 에스메랄다이므로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든지 아니면 지옥불에 떨어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쁜 인간이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생긴다. 그는 자기가 악인이라는 것을 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중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영혼은 아이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아이는 조금만 자기가 불편해도 주위에 해결을 요구하는 폭군이기도 하다. 아이는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단지 자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을 원망하고 해결하라고 종용할 뿐이다. 영화의 초반에 프롤로가 갓난아기인 콰지모도를 보고 “괴물”이라고 불렀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꼭 외모에 대한 촌평이 아니라 아기가 가진 괴물로서의 본성을 가리킨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호명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프롤로가 어떻게 해서 재판관에 영주까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짐작컨대 그것은 쟁취한 것이 아니라 부여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15세기 프랑스에서 귀족이 아닌 일개 시민이 재판관과 영주를 겸임하기란 불가능했을 테니까. 프롤로는 아마도 귀족으로 태어나서 소위 말하는 꽃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을 테지만 그것마저도 주위 사람들이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프롤로에게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커지고 늙었지만 영혼은 태어났을 때 그대로인 것이다. 요컨대 그는 아기이거나 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프롤로가 집시의 아들이자 추한 외모를 지닌 콰지모도를 키우는 것은 마치 신이 악마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신이 악마를 성역에 가두어놓고 종을 치라고 시킨 것이다. 프롤로는 콰지모도에게 항상 자신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며 너를 버린 엄마는 얼마나 몰인정한 사람인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너에게는 자식을 버린 여자의 피가 흐른다는 것까지. 그러므로 콰지모도의 종치기란 악마의 반성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영화에서 반성하는 것은 악마뿐이다.
다만 영화 속에서 프롤로가 반성하는 장면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딱 하나 있긴 하다. 바로 콰지모도의 엄마를 살해한 후 콰지모도를 우물에 던지려고 할 때 신부가 자신의 죄를 지적하자 노트르담 성당의 모든 석상이 자신을 쏘아보는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프롤로는 콰지모도를 죽이는 대신 성당에 가두어 기르기로 결정한다. 신부의 말대로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장면은 프롤로가 죄의식을 느끼고 반성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도 생긴다. 프롤로는 왜 하고 많은 곳 중에서 성당에 콰지모도를 가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프롤로는 콰지모도를 죽이려다 죄의식을 느꼈다. 즉 콰지모도는 프롤로의 죄의식이다. 요컨대 프롤로는 자신의 죄의식, 다시 말해 스스로 반성해야 할 부분을 성당에 위탁한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하는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 후회, 눈물, 분노와 같은 정당한 채무를 스스로 이행하는 대신 성당에다가 위임하고 그 자신은 가벼운 마음으로 홀연히 떠나가버린 것이다. 마치 고해성사를 함으로써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면죄부를 사서 천국행 티켓을 끊는 것처럼.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프롤로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성당에 기도하러 온 사람들은 스스로 반성하는 대신 기도함으로써 자신이 치러야 할 정당한 대가를 성당에 위탁해 버린다.
에스메랄다의 노래처럼 성당은 “버림받은 자들을 돌봐주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성당에 기도하러 오는 자들은 집시를 쫓아내고 종치기를 추방한다. 버림받은 자들을 돌보는 대신 가진 자들의 죄를 세탁해주는 곳이 된 것이다. 이제 노트르담 성당은 성역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맡기고 간 죄의 창고이다. 영화의 후반에 병사들이 문을 깨고 난입하자 온몸에서 용암을 흘리는 노트르담 성당의 모습은 더 이상 성역이란 이름으로 포장할 수 없는 지옥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온몸에서 용암을 분출하며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보이는 그때야말로 노트르담 성당이 ‘버림받은 자들을 돌봐주는’ 원래의 역할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문이 꽁꽁 봉해져 있었을 때 죄의 창고였던 노트르담 성당은 모든 문이 열리고 용암이 흘러나올 때 진정한 성당이 된다. 이것은 콰지모도와 마찬가지로 외모와 본질은 인과관계가 없다는 전언이기도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란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가장 뜨거운 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챗GPT가 한 말이 아예 틀린 말 같지는 않다. 가장 뜨거운 것들을 내보내려면 가장 힘든 시기를 통과해야 할 테니까. 이제까지 미래를 예언한 사주가 맞은 적이 없었으므로 앞으로 5년 안에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올 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지 않을까. 그렇지만 만약 반만 맞춰서 가장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고 한다면 그때 이 영화를 떠올리면 조금은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건 그렇고 AI는 반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니라면 내가 좋은 질문을 해야 하는 걸까?)
2025년 5월 10일부터 2025년 5월 10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