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정말 귀여웠다. 디즈니와 픽사 그 모든 애니메이션을 통틀어서도 제일 귀여운 주인공이었다. 역시 레서판다다. 아무 이야기 없이 러닝 타임 내내 주황색 레서판다만 보고 있으라고 해도 불만이 없을 정도였다. 정말이지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캐릭터에 푹 빠져서 영화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화면에서 잠시도 눈을 뗀 적이 없는데도 레서판다로 변한 메이를 보느라 중간중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깜박 잊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럴 때 보면 잘 만든 캐릭터는 이야기보다 훨씬 힘이 세다는 걸 느낀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재미있다. 굳이 맛있는 걸 먹거나 특별한 걸 보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먹으면 딱히 맛을 느끼기 어렵지만 평소에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흥미진진해진다. 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아랍어 사전을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내게는 그랬다. 부모와 사춘기 자녀 사이의 불화와 성장을 다루었거나 말거나 그저 붉은색 레서판다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던 것이다.
꼭 영화 속 캐릭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 레서판다도 귀엽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한 번은 그저 사육사가 사과를 먹이로 주고 있을 뿐인 영상을 하염없이 재생했던 적도 있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얼굴과 뭉툭한 꼬리가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어서 마치 얼굴은 화가 나서 얼른 달려들고 싶은데 꼬리가 무거워서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사육하는 동물원도 그리 많지 않지만 일단 들여왔다 하면 단번에 인기 1순위라고 하는 까닭을 알겠다.
레서판다는 멸종위기 종이다. 확실히 그럴 만하다. 레서판다의 귀여움은 분명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천적들에게는 먹히지 않을 테니까. 판다의 경우 덩치라도 커서 다른 동물들에게 잡아먹힐 염려가 덜한 반면에 레서판다는 판다에 비해 번식력이 그렇게 왕성하지도 않으면서 체구도 작다. 이빨에 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협적인 손톱이나 발톱을 가진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레서판다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연에서의 생존율은 급격히 낮아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 단점이 보완되었다. 아직 청소년인 메이만 해도 변신하면 건물 1층 높이 정도로 커진다. 메이의 엄마의 경우 돔 운동장을 내려다 볼 정도로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한다. 레서판다로 변하는 능력은 가족과 마을을 지키게 해달라는 조상의 기도로 얻게 된 것인만큼 아무래도 귀여움보다는 파괴력이 우선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요컨대 영화 속 레서판다에게는 약점이 없다. 귀여워서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을뿐더러 몸집도 크고 힘도 강해서 설령 야생 숲에 떨어진다고 해도 천적에게 잡아먹힐 염려가 없다. 말 그대로 완전무결한 동물이다.
그런데도 메이를 제외한 나머지 모계 가족들은 자신들의 레서판다를 영원히 봉인시킨다. 마치 레서판다와 인간 중 하나를 고르라면 인간을 골라야 한다는 것처럼. 그러고보면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 구미호 같은 요괴를 보면 인간으로도 변할 수 있고 여우로도 변할 수 있는데 굳이 인간이 되려고 할까. 그것도 힘들게 사람이나 짐승의 간을 훔쳐 먹으면서까지. 구미호로 살면 필요할 때 사람도 되었다가 위험하거나 초인적인 능력이 필요할 때는 구미호의 능력도 쓸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이 되면 아무래도 손해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이제까지 내가 본 구미호들은 한결 같이 구미호가 아니라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 심지어 그 때문에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경우에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라기보다 상징으로서의 인간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흔히 인간이 되어라 혹은 인간답게 살아라 라고 할 때의 인간 말이다. 즉 구미호가 가진 영원한 젊음, 무시무시한 파괴력,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변신술 같은 능력보다도 인간답게 사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것이라고 구미호 이야기는 말하는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초인적인 능력보다도 범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뜻도 될 것이다. 마치 특별한 일을 하는 것보다 당연한 일을 하는 게 더 어려울 때가 있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본다면 메이를 제외한 나머지 모계 가족들이 레서판다 대신 인간을 선택한 이유는 특별한 삶 대신 당연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메이의 엄마가 그렇게 메이를 감시하고 훈계했던 이유도 딸이 특별한 것에 눈이 멀어 당연한 것을 놓칠까봐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돌이라든가 힙합이라든가 하는 반짝이는 것들을 쳐다보느라 꾸준히 공부하고 조상의 사원을 쓸고 닦는 경건한 삶의 가치를 잊어버릴까봐. 인생은 콘서트장보다는 사원에 가깝다는 사실을 잊으면 시간이 흘러 마음은 불꺼진 콘서트장을 쓸쓸히 배회하게 된다. 딸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 엄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메이는 마지막에 레서판다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면서 레서판다인 삶을 선택한다. 말하자면 특별한 것과 당연한 것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둘 다를 선택한 것이다. 구미호 이야기로 따지면 여우로 사는 것도 인간으로만 사는 것도 아닌 구미호의 삶을 택한 거랄까. 아마도 삶은 보편성과 특수성 그 모든 것으로 이뤄진다는 게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
구미호는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그냥 특수한 존재다. 레서판다로 변신할 수 있는 메이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둘 다 포기하지 않은 게 아니라 특수성을 택한 것이다. 영화는 메이가 엄마와도 친구들과도 화해하면서 통합을 이루는 것으로 끝나지만 내 생각에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동물원에 가서 레서판다를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레서판다와 함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레서판다는 개나 고양이가 아니다. 말 그대로 레서판다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절반은 레서판다인 인간과 함께 지내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적어도 사원관람료를 모아 스카이돔을 짓는 시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2025년 5월 6일부터 2025년 5월 7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