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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귀여운 여인>

by 다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다, 라는 통념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성공한 사람들이 저녁에 일찍 잤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수면 시간이 부족하면 치매가 올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어서 어떤 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확실히 푹 자지 못한 날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많이 잔 날도 그리 기억력이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역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결정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보면 대개 새벽 5시면 일어나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고 되어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을 봐도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은 대략 5시 전후로 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자수성가의 표본 같은 인물이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건 나 역시 그 시간에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전에 다니던 회사는 출근 시간이 8시까지였고 우리집에서 회사까지는 거의 2시간이 걸렸으므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평일에는 5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12시 아니면 1시였으므로 5시에 일어나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도 5시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대신 주말에는 아무 죄책감 없이 12시까지 자곤 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둘 때 다른 건 몰라도 일어나는 시간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낮에 무얼하든 밤에 몇 시에 자든 아무 상관않겠다. 하지만 일어나는 시간만큼은 5시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이 일어났던 시간이니까. 그런데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고 직장도 없는데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것도 없다면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가버릴 것만 같았다.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 원래 있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낯선 곳에서 눈을 뜨고 싶진 않았으니까. 시간의 흐름이 강물이라면 습관은 노와 비슷하다. 5시에 일어나는 건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증받은 최고급 노와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그 노를 손에 넣어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습관은 정말로 몸에 익히기 어려운 것이다. 2주쯤 지나자 나는 굳이 5시에 일어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5시에 일어날 때 입안에 모래가 낀 것 같았다면 9시나 10시에 일어날 때는 충분히 잔 것 같은 충만감이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9시나 10시에 일어나는 것이 내 몸에는 훨씬 맞는 게 아닐까. 관념에 나를 끼워맞추기보다는 몸의 솔직한 반응을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부터 알람시간을 설정해두지 않았다. 눈이 떠지면 떠지는 대로 그게 9시면 9시에 일어났고 11시면 11시에 일어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는 시간은 거의 비슷한데 일어나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그리고 한 번 늦어진 시간은 다시 앞당길 수가 없었다. 12시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9시나 10시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알람을 맞춰도 도저히 그 시간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물며 5시에 일어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줄리아 로버츠 배우가 연기한 비비안이 첫 등장하는 장면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집안은 어질러져 있고 창문으로는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고 있다. 남들이 슬슬 잠자리로 들어갈 시간에 비비안은 일어나는 것이다. 직업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 비비안의 직업은 말하자면 잠자리 보조 같은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에드워드와 호텔 생활을 시작한 뒤 비비안은 일찍 일어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으니 새벽 5시에 일어나겠어, 라고 다짐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밤에 일어나던 이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햇살이 반짝일 때 눈을 뜬다. 영화는 일주일 동안 거리의 여자였던 비비안이 상류층의 여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의복과 헤어 스타일, 화장기술의 변화도 있지만 기상 시간의 변화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에드워드가 비비안에게 하룻밤을 제안한 이유도 가발과 짙은 화장 속에 숨겨진 그녀의 생기발랄하고 당당한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한 사람의 가장 투명한 모습은 아무래도 밤보다는 아침에 훨씬 잘 보이는 법이니까.


상류층 남성과 하층 계급 여성이 서로가 가진 매력(자본과 자연)에 이끌렸다가 사랑을 통해 순수한 본성을 회복한다는 게 이 영화의 이야기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영화 같은 결말이 아니라 돈이 한 인간을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로이 오비슨의 <Pretty Woman>이 흘러나올 때 명품 쇼핑으로 순식간에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버리는 비비안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압도적인 돈의 힘을 본다. 요컨대 돈만 있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심지어 영화 같은 인생을 사는 것도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베벌리힐스의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침에 가발도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비비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비비안을 깨우는 에드워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까지도. 거리의 여자를 귀여운 여인으로 바꾸는데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시작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아침에 나를 깨워주는 부드러운 목소리임에는 틀림없다. 일어나면 나가라는 차가운 태도가 아니라 다가와서 귓가에 얼굴을 대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 우리는 비비안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임을 직감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건 무엇보다도 아침을 깨워주는 목소리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내게는 5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는 있었어도 귓가에 대고 말해주는 목소리는 없었다. 비비안과는 다르게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야. 일어나야지’라고 속사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었지만 실은 그걸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 일을 하면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잠이라도 더 자고 싶다는 게 진짜 나의 속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새롭게 출근하는 직장도 거리가 멀어서 평일에 나는 다시 5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주말에는 12시나 오후가 되어야 일어난다. 말하자면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걱정했던 대로 멀리 떠내려가진 않았지만 아침을 깨워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면 그날 해야 할 것을 한다. 비비안이 에드워드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늦은 시각이라도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랫층에서 월세를 독촉하는 주인을 보고 나오기가 싫어져 다시 방에 틀어박혔다면 거리의 여자는 귀여운 여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도 늦으면 늦는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날 해야 할 일을 한다. 언젠가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귓가에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새로운 인생의 목소리가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2025년 5월 1일부터 2025년 5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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