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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코다>

by 다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러스트 앤 본>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여주인공이 하반신에 장애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여주인공의 섹스 장면을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궁금한 일이다. 조제처럼 하반신이 마비된 여자나 스테파니처럼 아예 하반신이 없는 여자도 섹스를 하는 게 가능할까. 두 영화는 그 장면을 정성스럽게 묘사함으로써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된다. 장애가 있는 여자도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욕을 느끼고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두 영화가 굳이 이런 대답을 하는 이유는 장애인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하반신에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일러 단순히 ‘같다’고 말하는 건 사실을 이야기한다기보다 도덕을 강제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니 두 편의 영화가 대답한 말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같다’가 아니라 ‘다르지만 같다’고 해야 한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만 같다. 그렇게 말해야 이 대답은 비로소 우리에게 닿는다. 왜냐하면 우리도 서로 다르지만 같기 때문이다. 우리끼리도 다르지만 같고, 그들과 우리도 다르지만 같다면 그들과 우리의 이 ‘다름’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로 환원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두 편의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같음’이 아니라 오히려 ‘다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차별의 다름’이 아니라 ‘차이의 다름’이고 ‘차별’과 다르게 ‘차이’는 누구나에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같음’이 된다.


영화 <코다>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섹스에 관대하다. 사타구니에 염증이 생겼기 때문에 2주 동안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루비의 부모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을 내젓고 심지어 노래 연습을 위해 마일스가 집을 방문했을 때는 격렬한 행위 중에 들켜서 루비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두 사람의 왕성한 성욕은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와 같이 농인과 청인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장애에 대한 공포’가 없다는 뜻이다. 루비의 부모는 사고를 당해 청각을 잃은 게 아니라 선천적인 농인으로 태어났다. 유전자에 장애 코드가 있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을 법도 한데 두 사람은 첫째인 레오가 농인이라는 걸 알고도 루비를 낳는다. 그런데 엄마의 말에 따르면 두려웠던 것은 귀가 안 들릴까봐가 아니라 “들릴까봐”였다. 자기가 농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루비의 할머니와 불화했다고 믿는 엄마는 거꾸로 청인으로 태어난 딸이 농인인 엄마와 불화할까봐 두려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비의 부모가 두려워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장애로 인한 ‘소외’다. 고통은 귀가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귀가 들리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데서 느낀다. 그런 점에서 루비의 부모에게 섹스란 생식의 영역에서는 자기 편을 생산하는 일이고 감정의 영역에서는 일체감을 경험하는 행위다. 말하자면 루비의 부모에게 가족이란 사회로부터 안전한 피난처인 셈이다. 그런데 모든 가족이 구성원들에게 피난처인 것은 아니다. 거티의 부모는 이혼했고 마일스의 부모는 함께 살지만 서로를 싫어한다. 두 사람의 가족이 해체된 이유는 아마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루비의 가족이 구성원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차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차이를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같음’이 있기 때문이다. 루비의 가족에게 청각 장애는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차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을 단단하게 뭉치게 하는 ‘같음’이기도 하다. 영화 <코다>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루비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귀가 들리는 청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루비는 가족과 같지 않다.


루비의 가족에게 이 차이는 균열을 상상하게 한다. 특히 장애로 인해 엄마와 불화했다고 믿는 루비의 엄마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딸을 청각 장애인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루비의 가족은 다른 방법을 통해 루비와 자신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화시킨다. 그건 바로 루비를 세상과 소통하는 가족의 창으로 삼는 것이다. 영화 내내 나오듯이 루비의 가족은 루비 없이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다. 중개인과 생선 가격을 흥정하는 것도 루비이고 회의에서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것도 루비이다. 인터뷰도 루비 없이는 할 수 없다. 루비가 한 번 자리를 비운 날 무전을 듣지 못한 루비의 아버지와 오빠는 배를 빼앗겼다. 이것은 루비가 가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루비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가족이 세상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청각 장애라는 압력 때문이라면 루비를 세상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다. 이 책임감은 청각 장애와 동일한 무게로 루비를 짓누른다.


루비가 가족과 세상을 연결하는 창의 역할을 맡게 된 다음부터 가족들의 신체적 장애는 사실상 장애로 기능하지 않는다. 장애가 계속해서 장애로 기능하는 이유는 신체적 불편함 때문이 아니라 장애의 소유자를 소수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신체적 불편함은 익숙해지지만 소외감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루비가 가족의 입과 귀가 되어 이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장애는 더 이상 신체가 아니라 루비에게 달려 있게 된다. 루비가 있을 때 가족들은 청인들로부터 소외당하지 않는다.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 회의에서 루비의 아빠가 목소리를 내서 어부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은 루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루비가 없으면 가족들은 즉시 농인으로 환원되어 청인들로부터 소외된다. 말하자면 이제 가족을 농인으로 만드는 건 신체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가족이 농인이 되느냐 청인이 되느냐는 루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가족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루비가 가족의 입과 귀가 되는 일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스럽지 않다. 농인들이 청인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일스가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던, 어린 루비가 레스토랑에서 온 가족을 대신해 주문하는 장면 같은 것은 굳이 말이 아니라 글로도 충분히 전달이 가능했을 일이다. 오빠 레오의 말처럼 루비가 “태어나기 전에도 가족은 잘 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비가 가족의 귀와 입이 된 것은 그것만이 청인인 루비가 다른 가족들의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루비는 루비의 인생을 살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고용하자는 오빠의 말에 “돈이 없다”고 말하는 엄마의 모습은 가족에게 있어 루비의 필요가 기능에 한정된 것으로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로 엄마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건 루비의 귀와 입이 아니라 루비다. 딸이 청각 장애가 아닐까봐 두려웠다던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청인인 딸이 농인인 다른 가족과 불화함으로써 가족의 바깥으로 이탈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엄마가 루비에게 요구하는 것은 귀와 입이 아니라 가족이다.


루비는 다수자인 청인이지만 가족이 모두 농인인 집에서는 오히려 소수자다. 그래서 루비는 가족과 수화로 대화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 가족이라는 프레임을 벗으면 여기에 있는 것은 농인 세 사람과 청인 한 사람이다. 단지 다수란 이유로 청인이 농인의 소통 방식을 따를 이유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루비의 집에서는 소수자가 다수자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이 다수자의 방식이 가족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킨 주범이라는 점이다. 청인이 다수라는 이유로 청인의 방식이 소통의 주류가 되고 그로 인해 소외당하고 있는 가족이 딸에게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는 점은 아이로니컬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루비의 가족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은 가족만이 세상의 유일한 버팀목이라고 믿는 선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신이 겪은 방식을 딸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이유는 바로 그 방식이 단순히 다수결의 방식이 아니라 동일시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동일시의 원리는 이렇다. 너와 내가 같이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방법은 바로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왜냐하면 차이야말로 온갖 불화를 일으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러스트 앤 본>의 사례에서 말한 것처럼 차이는 궁극적으로 같음으로 귀속된다. 너와 나를 같게 만드는 것은 너와 내가 모두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오히려 불화를 만들어내는 진짜 요인은 바로 그 차이를 없애기 위한 동일시에 있다. 동일시는 말한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방법은 바로 네가 내가 되는 거라고. 그래서 청인들은 농인에게 청인의 방식을 요구하고 농인인 루비의 가족은 루비에게 농인의 방식을 요구한다. 그들은 같아야만 불안하지 않다고 믿는다. 루비의 노래는 그런 점에서 가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는 가족에게 노래란 바로 차이의 극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비의 노래는 가족으로 하여금 분리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킨다. 이 모습은 특히 엄마에게서 많이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엄마와 불화했지만 사실은 불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루비가 가족을 위해 대학을 포기함으로써 가족이 루비를 희생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앞에 했던 말을 빌리면 가족의 동일시를 위해 루비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는 것은 학교의 가을음악회에서다. 딸이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데 가족들은 딸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살핀다. 왜냐하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심지어 노래가 끝났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타인이 눈물을 흘리고 기립 박수를 치는 와중에 그 박수를 따라쳐야 하는 가족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딸의 노래가 모두를 감동시키고 가족만 감동시키지 못할 때 역설적으로 가족은 딸로 인해 소외된다. 루비의 엄마가 딸이 농인이기를 바랐던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공감할 수 있다. 바깥에서 그토록 자신을 괴롭힌 그 소외감을 집에서까지 느껴야 한다면 그건 정말 어디로도 갈 데가 없다는 뜻이니까. 루비는 가족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인 동시에 집을 위태롭게 만드는 불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비의 가족은 말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루비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가족이 루비가 집에 남기를 원하는 이유는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루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다. 딸이 꿈을 이루고 싶다는데 그걸 가로막으면서 어떻게 보호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건 이제까지 가족에게 세상은 꿈을 이뤄주는 곳이 아니라 상처를 입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들이 상처 입은 몸을 치유하는 곳은 가족이었다. 실제로 루비는 청인이지만 지역 사회에서 미스터 V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농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그녀가 농인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CODA에서 알 수 있듯이 루비에게는 Human이나 Girl 혹은 Student와 다른 또 하나의 이름이 있고 루비는 그 이름으로 인해 청인도 농인도 아닌 중간 지대에 산다. 그 중간 지대는 청인에게도 농인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몰이해의 공간이다. 가족은 루비가 있는 몰이해의 공간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곳에서만 받을 수 있는 상처가 있다는 것은 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은 루비가 상처를 회복하는 공간으로서의 가족을 이탈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다치지만 상처를 치료해줄 곳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비의 아빠는 차 위에서 루비의 노래를 듣고 마음을 바꾼다.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노래를 들을 수는 없지만 그는 루비의 목에 손을 올려놓음으로써 진동으로 노래를 듣는다. 마치 갱스터랩의 진동을 느끼는 것처럼. 이때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손으로 느낄 수 있는 게 되고 그리하여 소리의 세계는 확장된다. 원래 루비의 아빠에게 소리는 자기를 소외시키는 대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손을 통해 진동을 느낌으로써 소리는 처음으로 그를 감동시킨다. 세상을 향해 완강하게 닫혀 있던 마음이 루비의 노래를 통해 흔들릴 때 닫힌 세계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그 균열을 통해 알지 못했던 빛이 들어온다. 그 빛이 비추는 것은 막다른 길 너머의 세계다. 상처 밖에 받은 게 없다고 생각했던 세계에 감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마침내 아빠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너머로 딸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아빠의 변화는 차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이기도 하다. 소리와 진동은 다르면서 같다. 사람들은 딸의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지만 자신은 감동을 받을 수가 없다. 반면에 자신은 딸의 목에서 울리는 진동에서 감동을 받지만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든 진동이든 그게 루비의 노래라는 점은 같다. 소리와 진동이라는 차이가 있어도 본질은 같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입으로 말하든 손으로 말하든 그게 말이라는 사실은 같고, 귀로 듣든 손으로 듣든 듣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어선에서 고기를 잡든지 버클리 대학에서 노래를 부르든지 루비가 가족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입과 귀 그리고 손이 눈에 보이는 ‘차이’라면 듣고 말하고 사랑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같음’이다. <코다>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 네가 내가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변해도 우리가 우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마음이다. 오히려 네가 내가 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가로막는 진짜 장애라고 영화는 말한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섹스에 대한 이야기로 끝내려고 한다. 대개 대중매체에서 성욕은 불필요한 과잉이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결핍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누구나 성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욕에 대한 인상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코다>에서 장애라는 공포로부터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운 것은 바로 이 성욕이다. 루비의 엄마 아빠도 그렇거니와 특히 거티가 루비의 오빠인 레오와 관계를 맺는 장면은 성욕이 장애라는 허들도 가뿐히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욕이란 요약하면 “나는 당신의 신체를 원해요”라는 말이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소외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신체를 원한다는 말보다 정확한 구원은 없다. 그리고 이 구원이 루비의 부모가 레오를 낳고도 루비를 낳음으로써 가족의 변화를 불러오는 동인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성욕은 인간을 생산하기도 하지만 재생산하기도 하는 욕망이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인간이 되기도 하고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 이 영화에서 섹스를 통해 짐승에서 인간이 되는 사람들은 있어도 반대는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코다>가 보여주는 것은 절반뿐이다. 다만 나는 다 보여주는 영화가 꼭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보여주는 영화보다 좋은 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좋다. <코다>는 섹스의 좋은 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2025년 3월 3일부터 2025년 3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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