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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정무문>

by 다시

대학 시절 문창과에서 소설 창작 수업을 들었을 때 일이다. 문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돈키호테 읽은 사람?” 내 기억이 맞다면 손을 든 사람은 서너 명 남짓이었다.


글을 쓰러 대학까지 온 학생들이 <돈키호테>도 안 읽었다니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별로 이례적인 일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지나치게 유명한 책은 읽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읽은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부분적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고 영화나 공연 등으로 재창작된 사례도 적지 않아서 이런저런 퍼즐 조각이 여러 개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 퍼즐 조각들을 맞춰 놓으면 빈 곳이 많아도 전체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실제로 책을 읽었다고 해도 모든 퍼즐을 맞출 수는 없다는 점이다. 책을 한 번 읽고 그걸 다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여러 번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남는 기억만 남고 사라질 건 사라진다. 책을 읽어도 모자란 퍼즐 조각으로 전체를 상상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읽지 않은 책도 이런저런 정보를 들으면 읽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내게 이소룡은 <돈키호테> 같은 존재였다. 한 번도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잔뜩 인상 쓴 얼굴과 시조새를 연상시키는 괴성, 쌍절곤과 노란색 트레이닝 복으로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언제인가부터 내 머릿속에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TV나 영화에서 수없이 인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인터넷에 수없이 돌아다니는 패러디 때문일 것이다. 주로 희화화된 그의 패러디를 볼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이런 사람이 왜 20세기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올랐고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소비되고 있는건가. 내가 생각하는 이소룡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말하면 ‘과장’ 그 자체였다. 필요 이상으로 주먹을 부르르 떨고 쓸데없이 “아뵤”를 외치며 등근육을 부풀려서 과시하는 모습들은 강함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허세를 부리는 걸로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희화화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쯤은 희화화되거나 패러디한 모습이 아닌 온전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허세를 부린다고 했지만 허세를 부리는 데도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허세는 조롱의 대상일 수 있어도 허세의 이유는 조롱하기 어렵다. 동물의 세계에서 원래 자기보다 몸집을 크게 부풀리는 행위는 과시로 여겨지지만 이 과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열이 밀리거나 짝짓기를 할 수 없거나 혹은 생명이 위협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같은 말을 이소룡에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그가 과시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수십 명의 적에게 둘러쌓였을 때다. 또한 헐리우드에서 실패하고 홍콩으로 돌아온 그로서는 홍콩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뭔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나 바깥에서나 그는 위협에 포위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영화 <정무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무도인들에게 스승을 잃은 제자의 복수극이다. 스파이를 침투시키고 강자를 독살하며 앞잡이를 포섭하는 기토류 도장이 비열한 승자라면 무도의 목적은 공생과 화합이라며 모욕을 감내하는 정무관은 청렴한 패자다. 무력으로 상대의 도장을 짓밟는 도장깨기는 제국주의의 은유로 볼 수 있는데 영화 <정무문>에서 제국주의는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이 아니라 권모술수와 정의의 대결이다. 이 대결에서 정무관은 늘 패하지만 진진이 단신으로 기토류 도장을 박살냄으로써 중국은 힘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켰다고 웅변한다. 그러나 기토류 도장이 정무관을 공격했을 때 번번이 자리를 비웠다는 점에서 사실상 진진은 중국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력이 아니라 오히려 천벌에 가깝다. 말하자면 진진은 정무관 소속이지만 그 속성은 윤리의 화신이다.


진진이 기토류 도장을 깨부수는 이유는 정무관을 모욕했기 때문이 아니다. 장례식에 와서 고인을 모욕하고 도장을 도발했기 때문이다. 개와 중국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공원의 입구에서 조롱하는 일본인을 공격한 것도 그가 중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차별과 멸시를 당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진이 대표하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윤리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중국과 윤리는 완강히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되지 않는다. 사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 일본보다 더 윤리적이었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정무문>은 힘과 힘의 대결이라는 포맷을 선악이라는 포맷으로 재구축한 뒤 윤리를 중국 쪽에 둠으로써 승자와 패자의 지위를 역전시킨다. 다시 말해 진진이 한 행동은 중국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권선징악적인 것이지만 진진, 즉 윤리가 중국 측에 있으므로 이것은 마치 윤리의 승리가 아니라 중국의 승리처럼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뜻밖인 점은 진진이 대표하는 이 윤리가 얼핏 일관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열되어 있고 서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진진은 사랑하는 여인과 솔직한 애정 표현을 나누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사부라고 말한다. 예정했던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도 사부의 복수 때문이다. 그는 이 복수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복수를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사부의 복수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살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부가 사랑하는 여인보다 우선이라는 명제가 군사부일체로 대표되는 전통 윤리에 기반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솔직한 애정 표현이나 법을 중시하는 태도는 근대 윤리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진진은 전통 윤리를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전통 윤리와 근대 윤리가 서로 충돌하는 대결의 장이기도 하다. 사부의 복수를 완수하지만 경찰의 총에 죽고 마는 결말은 그래서 비극적이다. 비극이란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나머지를 포기하는 극적 양식이다. 진진은 사부의 복수라는 전통 윤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그 순간 근대성에 함몰되어가던 전통 윤리는 찬란한 빛을 발하지만 이것은 여명이 아니라 석양이다. 진진은 이겼지만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필요 이상으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거나 괴성에 가까운 기합소리를 내는 것은 강함의 과시가 아니라 고통의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싸움에서 이길수록 진진이 가까워지는 것은 낙원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진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주먹을 쥐고 괴성을 지른 게 아니라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맞서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고통을 견디기 위해 몸에 힘을 주고 때론 소리를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사부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한 세계의 일이 아니다. 사형과 사제 중에서 아무도 진진에게 사부의 복수를 위해 네 한 몸을 바치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진진의 고통은 전통 윤리가 당연하지 않은 세계에서 전통 윤리를 짊어진 자가 겪는 고통이다. 어차피 떨어질 돌을 다시 정상까지 올려놓는 시지프스처럼 이 모습은 무모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미는 인간을 볼 때 우리는 숭고함을 느낀다. 그건 아마도 삶이란 결국 무의미와의 싸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온몸에 힘을 주면서 버티는 이소룡의 모습은 인간이 무의미와 싸우는 하나의 인상 깊은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영화의 제목처럼 정무精武, 즉 삶을 정성과 투쟁으로 인식하는 태도다.



2025년 2월 18일부터 2025년 2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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