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케빈의 동기가 아니라 에바의 동기였다. 에바는 왜 케빈을 떠나지 않을까. 쉬운 답을 우선 떠올릴 수 있었다. 엄마니까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 세상의 모든 엄마가 자기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자식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이용하는 부모도 얼마든지 있다. 에바가 케빈을 학대하거나 착취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한 것도 아니다. 케빈의 임신은 계획적인 게 아니었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에바의 표정도 밝지 않다. 임산부들끼리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와중에도 에바는 선인장처럼 앉아 있고 달려가는 한떼의 아이들을 보는 눈에도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임신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남의 아이만 봐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에바는 막 태어난 케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우는 케빈을 달래는 에바의 얼굴에는 짜증과 화를 간신히 참는 표정이 역력하다. 결국 참지 못할 때도 있다. 유모차 안에서 케빈이 끊임없이 울자 에바는 드릴로 바닥을 뚫는 공사 현장에 유모차를 세운다. 아기 울음소리를 계속 듣느니 차라리 드릴 소리가 편하다는 심정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도 들어봐라는 뜻이기도 하다. 에바에게 케빈은 책임의 대상이지만 애정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가 어렵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한 부모라도 케빈이 저지른 짓을 보면 오만 정이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케빈을 좋아하지 않았던 에바가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하고 이웃의 폭행과 멸시를 견디면서까지 살던 동네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의 말미에 보면 에바는 케빈의 방을 만들고 케빈이 입었던 옷을 다리는 등 케빈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다음에야 비로소 모성이 눈을 뜨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케빈에게 유일하게 갖고 있던 감정인 책임감이 에바로 하여금 케빈을 내버려둘 수 없게 만드는 것일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현재와 과거 두 개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현재는 에바의 이야기이고 과거는 에바와 케빈의 이야기이다. 과거의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에바와 케빈의 관계가 마치 사건의 원인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에바와 케빈의 이야기는 딱 두 가지뿐이다. 에바가 케빈을 싫어했던 이야기와 케빈이 에바에게 못되게 굴었던 이야기. 우리가 여기서 괴물의 탄생을 받아들이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천성이 불량한 아이가 사랑받지 못해 괴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는 익숙해서 쉽게 설득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나쁜 부모와 나쁜 아이의 조합이 끔찍한 사건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하면 영화는 쉬워지는 게 아니라 꺼림칙해진다. 케빈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에 대해서는 나쁜 부모와 나쁜 아이의 조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에바가 왜 케빈을 떠나지 않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두 개의 질문 중 하나만 답할 수 있는 건 답이라고 할 수 없다. 바꿔말하면 나쁜 부모와 나쁜 아이의 조합은 케빈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답도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에바가 케빈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케빈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에바와 케빈의 이야기는 에바가 케빈을 싫어한 이야기와 케빈이 에바에게 못되게 구는 이야기뿐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전부 다 그런 건 아니다. 잠깐이지만 둘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바로 실리아가 태어났을 때다. 에바가 자기의 토사물을 치우자 케빈은 처음으로 에바에게 “미안해, 엄마”라고 한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에바의 품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아빠가 방문을 들어오자 처음으로 아빠에게 나가달라고 한다. 영화를 통들어 에바도 환하게 웃는 장면도 이때가 유일하다.
물론 나중에는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한순간이나마 케빈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아마도 실리아의 존재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동생이 태어나자 불안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짐작대로라면 케빈이 이제까지 에바에게 못되게 군 이유는 엄마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된다. 생각해보면 케빈이 활쏘기를 시작한 것도 에바가 동화책 <로빈 후드>를 읽어준 다음부터였다. 케빈은 아빠가 설치해준 과녁을 향해 활을 쏘다가 난데없이 엄마가 보고 있는 창문으로 화살을 날린다. 난폭하지만 봐달라는 뜻이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보면 케빈이 이제까지 에바에게 못되게 굴었던 이유는 선천적으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에바가 케빈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바로 미안함 때문이다. 에바는 케빈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어린 케빈을 향해 “난 네가 태어나기 전이 훨씬 행복했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케빈의 못된 행동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엄마에 대한 복수인 동시에 자기를 사랑해달라는 왜곡된 표현이었다고 생각하면 에바가 케빈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아가 케빈이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이유가 바로 그 애정결핍에 있다면 에바의 죄책감은 케빈을 넘어 사건의 피해자들에게까지 확산된다. 마을 사람들의 폭력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감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케빈을 낳은 엄마라서가 아니라 케빈을 이렇게 만든 엄마이기 때문에 에바는 케빈도 마을도 떠나지 못한다. 자기가 케빈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은 곧 자기가 이 사건의 공범이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에바가 공범 의식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빠와 동생을 죽인 케빈이 엄마만 죽이지 않은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하지만 결국에는 당신이 무엇을 낳았는지 보라는 뜻이 아닐까. 자신의 아이를 싫어하고 억지 책임감으로 부모 흉내를 내려했던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고, 이 사건을 만들어낸 건 결국 당신이라고 케빈은 에바에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만약 에바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에바가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느끼는 것은 죄책감이지만 케빈에게 느끼는 것은 연민일 수 있다. 날더러 보라는 말은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고 이 말은 곧 날 봐달라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원한이나 분노와 같은 강렬한 감정적 동요가 필요하다. 그런데 죽은 피해자 중에 케빈이 그런 걸 느낄 만한 상대는 아무도 없다. 어쩌면 그게 케빈을 사이코패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케빈이 강렬한 감정적 동요를 느낀 사람은 죽은 피해자가 아니라 죽일 수 없었던 엄마였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미워했기 때문에 죽인 게 아니라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타인의 죽음까지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에바가 케빈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공범의식에 따른 죄책감과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 그렇다면 이제 케빈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 이유를 알아볼 차례다.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지만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케빈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 추정컨대 그 이유는 두 번째 케빈이 나타나는 걸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케빈이 왜 나타났는지 알아낼 수 없다면 케빈은 다시 나타날 테니까.
유아일 때는 제외하고 케빈이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 등장하는 순간은 에바와 공놀이를 하는 장면부터다. 에바는 공을 굴려주면서 자기에게 다시 보내달라고 하지만 케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에바의 말을 무시한다. 그러다 딱 한 번 에바에게 공을 굴려주는데 그 모습은 엄마와 공놀이를 하는 아이가 아니라 선심을 쓰는 듯한 얼굴에 가깝다. 말하자면 에바가 케빈을 훈육하는 게 아니라 케빈이 에바를 훈육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의 위치가 뒤바뀐 듯한 이런 장면은 케빈이 에바에게 못되게 구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동일하게 나온다. 케빈은 에바에게는 밉살스럽게 굴다가도 병원이나 아빠 앞에서는 태도를 바꿈으로써 엄마를 악역으로 만들거나 엄마를 일부러 화나게 만들어서 부상을 입은 뒤 그걸 숨겨주는 방식으로 엄마에게 빚을 지운다. 마치 엄마를 길들이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관심에도 종류가 있다. 케빈이 엄마로부터 받고 싶었던 관심은 말하자면 복종이다. 엄마가 자기 뜻대로 움직일 때 케빈은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엄마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케빈에게 사랑은 대등한 두 사람이 깍지를 끼듯이 얽혀가는 게 아니라 한쪽이 아래에 엎드리고 다른 한쪽이 그 위에 올라가는 쪽에 가깝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엎드릴 때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은 오만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케빈은 오만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는 대신 살기 위해 이용해야 할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아빠와 동생을 무참하게 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버릴 수 없지만 수단은 목적을 달성하면 폐기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해달라는 건 뭐든지 해주었던 아빠나 동생과 달리 처음부터 자신을 싫어하며 애정을 주지 않았던 에바는 케빈에게 반드시 점령하고 싶은 성이었을 것이다. 에바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케빈은 에바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엄청난 인간인지를. 감히 당신 따위가 싫어할 수 없는.
경찰과 소방관이 체육관의 문을 부수자 케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 순순히 바깥으로 걸어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항복이 아니라 커튼콜이다. 범행을 시작하기 전에 객석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무차별 학살은 케빈에게 일종의 쇼다. 케빈에게 세상이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연극의 주인공이 극중에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마지막에는 박수갈채를 받듯이 케빈에게 세상은 무대이고 자신은 주인공이다. 그래서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쏟아지는 사람들의 눈물과 욕설, 고함이 그의 귀에는 환호와 감탄으로 들린다. 세상이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은 세상에게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게는 자신을 함부로 대할 권리가 없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유년기부터 시작된 에바를 향한 케빈의 반항은 불량한 태도가 아니라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일에 가깝다. 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아를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적당한 이름은 겁쟁이의 자아다. 오만은 겁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오만이란 세상을 제로섬으로 인식하는 태도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너는 할 수 없다는 믿음은 나도 할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을 때 나의 할 수 있음은 의미를 상실할 거라는 두려움에서 나온다. 이 논리대로라면 세상이 나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은 세상이 너를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위에 세워진다. 요컨대 겁쟁이의 자아란 타인과 세상을 공유하지 못하는 자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아의 눈에 세계는 자연스럽게 위계질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위계란 대등한 것을 만들지 않는 구조이므로 그속에서 나는 나의 위치를 타인과 공유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실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주보는 순간 사라지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일 것이므로.
이 겁쟁이의 자아 관점에서 보면 케빈이 왜 그렇게 에바의 위에 서려고 하는지 그리고 실리아가 태어난 직후에만 에바와 평화롭게 지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케빈은 자기가 인식하는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으므로 부모라는 이유로 에바의 밑으로 내려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세계는 제로섬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에바가 실리아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자신은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버려질 것이므로 에바의 관심과 사랑이 실리아를 향하지 못하도록 잠시동안 착한 아이를 연기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겁쟁이의 자아가 사이코패스의 전형은 아니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유아기에 겁쟁이의 자아 단계를 거친다. 자기 마음대로 해주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믿음은 대부분의 유아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케빈의 문제라면 이 자아가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운 자아로 버전 업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단단히 굳어졌다는 점이다. 청소년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로빈 후드>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세 개의 화살을 하나의 과녁에 맞추고 그걸 눈동자에 깊이 각인시키는 모습은 케빈이 육체의 성장은 이뤘어도 정신의 성장은 답보 상태라는 걸 보여준다.
에바가 케빈을 떠나지 않는 동기와 케빈이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동기를 보면 두 사람이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바는 케빈이 자신의 애정을 원한다고 생각했으나 케빈이 원한 것은 복종이었고 케빈은 에바가 자신의 머리 위로 군림하려 한다고 생각했으나 에바가 원한 것은 단지 보편적인 부모자식의 관계였다. 그러나 똑같이 오해했다고 해도 여기에는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에바는 케빈을 오해했기 때문에 세간에서 괴물이라고 불리는 자식에게 연민을 품고 죽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갖는 반면 케빈은 에바를 오해했기 때문에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못한 에바에게는 마음 한 켠에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고 그 미안함이 케빈과 죽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으로까지 확장된 반면 케빈은 겁쟁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공포를 숨기기 위해 타인에게 공포를 재현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러닝 타임 내내 한 번도 기죽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케빈은 처음으로 겁먹고 초조한 모습을 보인다. 18세 생일이 지나서 이제 곧 성인 교도소로 이감되기 때문이다. 이때 케빈은 변한 게 아니라 드러난 것이다. 케빈이 세상이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이유 중 하나는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해해주는 관용적인 가족과 어리다는 이유로 항상 자신의 편에 서주었던 외부의 어른들 그리고 청소년이라는 제도적 보호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치들은 케빈의 내면 속에서 상징적으로만 존재하던 겁의 실체와 마주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겁쟁이의 자아가 고통을 겪고 버전 업하는 것을 막았다. 피학과 싸워 견뎌내는 법을 훈련하는 대신 가학의 권력에만 취해있었던 케빈에게 가족이나 청소년이라는 방어막없이 성인 교도소라는 피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견디기 어려운 공포에 가깝다. 겁먹지 않기 위해 겁을 주는 방식으로 살아왔던 케빈에게 성인 교도소는 마주보고 싶지 않아서 피해왔던 그러나 마침내 조우한 리얼 월드인 것이다.
반면 처음으로 두려움을 내비치는 자식을 보는 에바의 표정은 태연하다.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청소년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예상되는 수감기간은 2년이다. 가족을 포함해 수십 명을 죽인 대가라고 말하기에는 형평이 맞지 않는다. 에바의 표정이 태연한 이유는 케빈 때문이다. 이미 동요하고 있는 자식 앞에서 자기까지 동요하면 그 동요가 더 극대화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에바가 케빈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연민과 죄책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에바의 표정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케빈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다. 자식이 불안하지 않도록 막은 다음 에바는 묻는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질문이다. “왜 그랬니.” 그런데 여기서 케빈은 이렇게 말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이 대답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솔직한 것이다. 가족과 사람들을 향해 화살을 날릴 때 케빈은 로빈 후드를 따라하는 아이였다. 무슨 짓을 해도 세상이 자기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던. 그러나 성인 교도소로 이감을 앞둔 지금 케빈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가족도 제도도 없는 리얼 월드에서 피학의 삶이 예정되어 있는 케빈은 마침내 두려움의 실체와 조우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길로 들어섰다. 뒤늦은 자아의 버전 업이다. 성인이 된 아이는 아이 때 했던 행동의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그때는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케빈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종종 어른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어른이 되면서 그걸 잊어버린다. 누군가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른이 아니라도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2025년 2월 13일부터 2025년 2월 17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