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와 처음 데이트를 하던 날 레이놀즈는 옷의 솔기에 뭔가를 감추어두는 버릇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가슴께에 어머니 머리칼을 넣어두고 늘 그분의 숨결을 느낀”다고. 알마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시나봐요”라고 말하지만 표정은 떨떠름하다. 첫만남에서 엄마 이야기를 하는 남자는 말하자면 나는 엄마 같은 여자가 좋아요 라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자기에게 원하는 게 여자라면 몰라도 엄마라면 곤란하니까. 그러나 레이놀즈가 알마에게 원한 건 여자도 엄마도 아닌 모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착각하고 있는 쪽은 알마라고 나는 생각했다.
제작 중인 드레스를 알마가 입었을 때 레이놀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주 좋아요”라고 말한다. 알마는 기쁨을 숨기지 못한다. 레이놀즈의 찬사는 바로 자신을 향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알마에게 레이놀즈는 시골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준 구원자다. 그런데 레이놀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기 어렵다. 알마를 향해 “아주 좋아요”라고 말할 때 그것이 드레스를 입은 알마인지 아니면 알마가 입은 드레스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처음에 나는 레이놀즈가 칭찬한 것이 드레스라고 생각했다. 알마를 좋아한 게 아니라 알마가 자신이 만든 드레스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한 거라고. 요컨대 사랑스러운 연인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옷걸이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치수를 재는 장면을 보면 그런 정황이 잘 드러난다. 가슴이 없다는 레이놀즈의 말에 알마는 “죄송해요”라고 말하는데 레이놀즈는 괜찮다며 “가슴은 내가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꼭 필요하면”이라고 답한다. 알마의 사과가 당신의 기대에 내가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이라면 레이놀즈의 격려는 중요한 건 너의 몸이 아니라는 뜻이다.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말하자면 옷의 재료다.
런던에 오면 이런 경향은 더 심화된다. 알마는 전날 늦게 잠들었어도 새벽 4시가 되면 일어나서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입은 옷의 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 취향이 없는 거라고 면박을 당하고 아침 식사 때 소리를 내면 정신 사납다고 꾸중을 듣는다. 잠자리를 같이 한 사이지만 허락없이는 방에 들어갈 수도 없다. 레이놀즈가 알마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때는 자기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뿐이다. 그러나 레이놀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알마에게 그의 시선은 언제나 드레스를 넘어서 자신에게 닿는다. 영화의 제목인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는 바로 이 착시에 대한 은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패션쇼 장면에서다. 런던의 고객들 앞에서 패션쇼를 하는 날 모델들에게 옷을 입히기 바쁜 레이놀즈는 딱 한 번 외시경을 통해 고객 앞에 서 있는 알마를 훔쳐본다. 이 장면이 이상한 이유는 레이놀즈가 모든 모델을 훔쳐보는 게 아니라 단 한 번 알마가 나갔을 때만 훔쳐보기 때문이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훔쳐볼 이유가 없다.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레이놀즈는 알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면에서 볼 때 보이는 것과 훔쳐볼 때 보이는 것은 다르다. 레이놀즈가 알마를 훔쳐보는 것은 바로 훔쳐볼 때만 볼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함이다. 그건 바로 자신의 욕망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훔쳐보는 이유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훔쳐볼 때 비로소 상대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확인할 수 있다. 레이놀즈가 정말로 알마를 예쁜 옷걸이 정도로만 생각했다면 굳이 외시경으로 알마를 훔쳐볼 이유가 없다. 옷걸이는 어느 방향에서 봐도 옷걸이니까. 그러나 레이놀즈에게 옷걸이 이상의 욕망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안을 주고 식탁을 박차고 나가는 일련의 행위가 알마를 옷걸이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옷걸이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였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알마가 아니라 레이놀즈였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왜 레이놀즈는 정직하게 알마를 욕망하지 못할까. 내가 생각하는 원인은 레이놀즈가 가슴에 넣어둔 어머니의 존재에 있다. 레이놀즈의 어머니는 레이놀즈가 16살 때 재혼했는데 아마 이때의 경험은 레이놀즈로 하여금 새로운 가정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어머니의 상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꿈에 나오고 꿈에서 깨면 눈물범벅이라는 레이놀즈의 말은 그리움이 아니라 상처 자국이다. 웨딩 드레스를 직접 지은 이유도 재혼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애원의 표지로 읽힌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두려움은 레이놀즈로 하여금 여성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만들었다. 레이놀즈의 의상실에는 레이놀즈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뿐이지만 레이놀즈가 이들과 상하관계 외에 다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것을 먹으며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레이놀즈의 모습은 강한 인간이 아니라 두려운 인간에 가깝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은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담배를 끊으려는 사람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담배를 두는 것처럼 레이놀즈는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여성을 가장 가까운 곳에 둠으로써 경계심을 잊지 않는다. 수많은 모델을 곁에 두었지만 마음을 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특별한 관계에 있는 여자에게조차 자신의 규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거리를 두고, 여자가 아니라 옷을 사랑한다고 믿음으로써 버림받는 공포와 싸워온 것이다.
누나인 시릴과의 관계가 각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이놀즈의 말에 따르면 웨딩 드레스에는 여러 가지 미신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웨딩 드레스를 만지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블랙 데스가 바느질 돕는 것을 거부한 반면 시릴은 레이놀즈를 도와 어머니의 재혼 드레스를 만들었다. 레이놀즈에게 그런 시릴의 모습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실제로 의상실의 주인은 레이놀즈이고 시릴은 그의 충실한 보조처럼 보이지만 알마를 유령 취급하는 문제로 다퉜을 때 시릴은 이렇게 말한다. “나와 싸우면 넌 살아남지 못해. 이 마룻바닥에 쓰러지는 건 너라고.”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레이놀즈가 가지고 있는 여자로부터 버림받는 공포를.
그래서 영화 <팬텀 스레드>는 중반까지 이 유령의 실로 드레스를 만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즉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찾게 만든다. 상황이 반전되는 것은 알마가 의상실의 식구를 모두 내보내고 레이놀즈를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가 레이놀즈와 격렬하게 대립한 이후다. 자신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당신과 나 사이에는 항상 무언가가 있었다며 그것을 “거리감”이라고 표현한다. 바꿔말하면 알마가 준비한 깜짝 파티는 이 거리감을 없애기 위한 것이지만 레이놀즈에게 둘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는 일은 곧 버림받는 공포에 잠식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격렬하게 화를 낸 뒤 알마를 유령 취급하기 시작한다.
마음에 안 들면 저택을 나가라는 레이놀즈의 말에 알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레이놀즈에게 독버섯을 먹인다. 얼핏 황당한 복수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더 이상 착각의 주체가 누구인지 판단하는 기존 노선을 바꿔 착각을 진실로 만드는 길로 선회한다. 레이놀즈의 폭언을 들은 알마는 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절망하는 대신 남자를 약하게 만듦으로써 그 누구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게끔 만든다. 지난 번 패션쇼에서 알마는 그가 지치고 약해졌을 때만 운전대를 자신에게 넘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한 게 아니라면 사랑하게 만들겠다. 이것이 알마의 생각이다.
알마의 전략은 유효해서 독버섯을 먹고 고열에 시달리던 레이놀즈는 어머니의 환영을 보지만 알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환영은 사라진다. 그가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했던 주체가 어머니에서 알마로 바뀌는 순간이다. 좋은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 <대부 2>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친구는 가까이 둬라. 적은 더 가까이 둬라.” 말하자면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상대는 시선 밖으로 나가게 하지 말라는 뜻인데 같은 이야기를 레이놀즈에도 할 수 있다.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이제 가장 가까이 두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청혼하고 둘은 결혼한다.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여자는 독버섯을 조리하고 남자는 그 버섯을 먹고 중독되는 이 괴이한 관계에서 사랑은 흔히 알려진 대로 애정과 애정의 결합이 아니라 가학과 피학의 조합이다. 독버섯이 등장하기 전에도 두 사람의 관계에는 가학과 피학이 존재했었다. 단지 그때 레이놀즈가 때리는 쪽이었다면 이제는 맞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이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학대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얼핏 말도 안 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유효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상처 입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히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다. 상처의 깊이는 곧 사랑의 깊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상처받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팬텀 스레드>는 묻는다. 사랑하는 당신아, 이 상처는 정말 우연한 것이 맞습니까? 당신은 내게 상처를 줄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상처에서 내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상처를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한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실로 만든 드레스는 보일까.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재단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은 어리석은 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맹목盲目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 중 하나는 사랑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짓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실로 허공을 가른다. 그러나 거기에 옷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바늘에 찔려 피가 나는 순간이다. 옷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으므로.
2025년 2월 12일부터 2025년 2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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