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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이레셔널 맨>

by 다시

철학 교수인 에이브 루카스는 우울증에 걸려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는 철학자이면서도 강의에선 “철학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고 말하거나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한다. 철학이 비현실적인 학문이고 자유가 우리에게 주는 건 불안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평생 철학을 공부하고 타인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사람에게 이 말은 자기 부정이다. 그의 발기 부전과 러시안 룰렛은 삶에 대한 충동은 거의 없고 죽음 충동이 지배적이라는 병리적 현상이다.


그런 에이브에게 이 불균형을 역전시키는 사건이 생긴다. 제자인 질과 식당에서 밥을 먹던 에이브는 우연히 뒷테이블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다름아닌 판사의 비리로 양육권을 상실하게 된 여자의 이야기였다. 여자의 말에 따르면 남편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데도 판사는 남편의 변호인과 친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양육권을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에이브는 이 말을 듣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 판사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세 가지를 이룰 수 있다. 첫째로 여자는 아이들의 양육권을 지킬 수 있고, 둘째로 세상에 해를 끼치기만 하는 비리 판사를 없앨 수 있으며, 셋째로 사건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종결된다면 완전범죄의 창작자가 될 수 있다. 이 여자는 일면식도 없는 남이므로 목격자만 생기지 않는다면 자기는 용의선상에서도 배제된다. 말하자면 다치지 않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면서 자기 자신까지 조금 더 특별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모르는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 계획은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같은 말이라도 다치지 않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까지 특별해질 수 있다고 하면 어쩐지 솔깃해진다. 왜냐하면 에이브가 자기 부정에 빠져 알코올 홀릭이 된 이유는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온힘을 다해 싸웠음에도 얻은 것이라곤 아내의 부정과 친구의 죽음 그리고 뇌막염뿐이기 때문이다. 온갖 상처를 입으면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에게 다치지 않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유혹적이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에이브가 만들려고 했던 그 더 나은 세상이 과연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어쩌면 그건 에이브만의 더 나은 세상이 아니었을까. 질의 피아노 독주회에서 만난 질과 에이브는 식당에서 들었던 판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못된 판사지만 좋은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질의 말에 에이브는 “박멸해야 할 바퀴벌레”라고 일축한다. 나아가 “세상에는 죽어야 할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죽으면 세상이 더 좋아지지 않”냐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파시즘과 나치의 그림자마저 비친다. 나치와 파시스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이유도 바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에이브가 과거에 실패한 이유는 수단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목적을 오인해서다. 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의 창작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당에서 뒷테이블의 이야기를 들으며 에이브는 생각한다. 내가 판사를 죽이면 저 불쌍한 여자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이 말에는 숨어있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이제까지 세상을 바꾸는데 실패했던 이유는 엉뚱한 것을 희생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며 지적인 자신을 희생시켜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세상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없애야 하는 건 고결한 자신이 아니라 불결한 타인이다. 요컨대 에이브는 목적은 그대로 둔 채 수단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남을 없애는 쪽으로.


영화 <이레셔널 맨>이 에이브 루카스라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악의 평범성에 관한 것이다. 판사를 죽이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에이브는 질이 학생이고 또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그녀의 구애를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리타와 동침한 것도 욕정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함에 가깝다. 그러나 판사를 죽이기로 결심한 순간, 즉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아닌 남을 해치기로 마음먹은 순간 에이브는 리타와 불륜을 저지르고 질과의 연애도 시작한다.


에이브가 리타와 질을 거절했던 이유는 자기 부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상대의 세계를 보호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가정이 있는 리타나 학생인 질과 성적관계를 맺으면 두 사람의 일상이 얼마나 뒤틀리게 될 지는 명백하니까.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인을 해치기로 마음먹은 순간 보호의 대상이었던 리타와 질은 욕망과 쾌락의 대상으로 바뀌고 영화의 말미에 가면 생존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도구로까지 전락한다. 악인을 세상에서 없앤다는 행위의 본질은 누가 악인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나한테 있다는 믿음, 즉 오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스스로를 희생해서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꾸려고 했던 에이브가 악인이 되는 이유는 자신에게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믿음의 근거가 윤리성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비브가 판사를 죽이려고 결심한 것은 단지 모르는 여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 여자의 인생을 구원해줄 수 있다는 전지전능함. 바로 그것이 에이브로 하여금 살인을 결심하게 만든 동기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이 동기는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은 타인의 인생을 자신이 구원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다. 에이브가 자기 부정에 빠져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구원하는데 실패했다는, 이른바 오만의 증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타인을 해쳐서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한 순간 에이브는 자기 부정에서 일어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에이브가 죽이게 되는 대상이 판사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판사는 여자에게 양육권을 빼앗음으로써 여자의 인생을 결정하고 에이브는 판사에게 생명을 빼앗음으로써 판사의 인생을 결정한다. 판사가 남편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남편의 변호인과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하듯이 에이브는 판사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가 비리 판사라는 사실에만 주목한다. 말하자면 둘은 같은 사람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을 위해 타인의 삶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정의 근거가 윤리적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타인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인간은 그렇게 믿는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만이 윤리로 포장될 때 보통 사람은 얼마든지 평범한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이레셔널 맨>은 윤리와 오만을 구분하는 한 가지 유의미한 기준점을 제시한다. 그건 바로 윤리적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상처입는 쪽이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올바르다고 믿는 것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할 때 그것은 오만이다. 반대로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때 비로소 그것은 윤리가 된다.


에이브가 스스로를 희생하고도 자기 부정에 빠졌던 이유는 그 희생의 목적이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은 열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의 제목인 이레셔널irrational은 그런 의미다. 우리는 종종 열정에 사로잡힐 때 자신이 윤리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때론 어떤 열정은 광기가 되기도 한다. 이성을 잃은 사람이 윤리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25년 2월 10일부터 2025년 2월 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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