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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by 다시

돌아가신 교장 선생님이 사진관 아저씨의 첫사랑이라는 말을 하면서 사토는 말한다. “어떻게 반세기 동안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자 아키가 말한다. “멋진 일이잖아.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이런 영화다. 말에는 자리라는 게 있다. 어떤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도 어떤 자리에서는 금기어가 된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다는 말은 그러니까 사랑이란 세상의 중심에서만 말해져야 한다는 것. 세상의 중심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2004년 개봉했을 때는 잘 만든 트렌디 무비 같은 느낌이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클래식까지는 아니어도 아카이브에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편견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대부분이 사랑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영화의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의 고등학생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고 믿는 시대에 사랑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시대의 작품은 추억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도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 만약 이 영화를 다시 보는 분들이 있다면 그건 단지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서만이 아니라 좋아했던 세상을 다시 보고 싶어서이기도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남성향이나 여성향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알기로 이 말은 남자가 좋아하는 성향과 여자가 좋아하는 성향이라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구분하자면 이 영화는 초반부는 남성향이지만 후반부는 여성향에 가깝다. 예쁘고 공부도 운동도 만능인데다 연예기획사에서 사진 촬영까지 요청하는 학교의 히로인이 눈에 띄는 특징 하나 없는 소년에게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다가온다는 전반부는 남자들이 좋아할 법한 상황이지만 반대로 머리를 밀고 무균실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소녀에게 혼인신고서를 내밀고 그녀가 죽은 다음에도 오랜 세월 동안 잊지 못하는 후반부는 여자들의 취향에 가깝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남성 관객과 여성 관객 모두를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이 영화의 흥행수익은 85억엔으로 2004년 실사영화 1위다) 내가 보기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의 히로인이 단지 “너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는 이유로 방과 후에 기다리는 일은 분명 행운이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시한부 삶을 살다가 죽는 건 그에 못지 않은 불행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는 기쁨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무거운지 나로서는 답을 내리기 어렵다.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한 반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번개와 함께 당신이 내게서 떠나던 날. 내 눈은 멀고 내 귀가 안 들리게 된 바로 그날”라고 말했다. 사실 이런 말이 아니더라도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계량화하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순간에는 기쁨이 클 것이고 이별하는 순간에는 슬픔이 클 것이다. 모든 게 끝나고 돌아보는 날에도 기쁨과 슬픔의 비중은 그날의 내가 어떤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 중 어느 게 더 중요한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어느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인생의 두 가지 사건이 한 소년을 관통했을 때 그 소년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영화의 관심사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건 돈을 주고 물건을 샀다가 다시 반품하고 돈을 돌려받는 것과는 다르다. 물건을 반품하면 통장의 잔고는 그대로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가 이별한 사람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말하자면 사랑과 이별은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바꿔놓는데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할 거라는 예고가 아니라 반대로 그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나를 만든다는 데 있다.


우리의 자아는 생각보다 일찍 형성된다. 보통 2차 성징 전후이고 늦어도 스무 살 무렵에는 완성된다. 이때 만들어진 자아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또 무슨 일을 겪어도 변하지 않는다. 손자손녀를 본 할아버지가 자기는 아직도 십대 소년인데 몸만 늙어버렸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 할아버지의 자아가 십대 소년 시절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그때의 자신을 스스로의 원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특별히 나쁜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단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느끼는 비애도 역시 이 원형 때문이다. 십대 소년이 무심코 거울을 봤을 때 그곳에 늙고 주름진 노인이 있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이 영화가 사랑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아는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원형은 블록을 하나씩 쌓아서 완성되는 순간 짠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느 날 블록이 와르르 무너지고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생긴다. 이 영화로 말하자면 사토에게 아키와의 사랑과 이별이 그런 순간이다. 사진관 아저씨가 교장 선생님을 반세기가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사토가 성인이 된 다음에도 아키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순간이 자신의 원형이 생겨난 순간이기 때문이다. 아키와 이별하는 순간 사토의 마음에는 하나의 결락이 생긴다. 잃어버린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 결락이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건 바로 너는 앞으로도 소중한 것을 계속 상실하게 될 거라는 것. 말하자면 원형이란 무언가를 얻었던 순간이 아니라 처음으로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순간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원형은 반짝이는 순수한 영혼이 아니라 흉터가 아문 상처에 가깝다. 우리가 자신이 가장 눈부시던 순간이 아니라 처음으로 아팠던 순간을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왜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슬픔이야말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키가 머리를 밀고 무균실로 들어가는 날은 마을의 축제일이었다. 사토는 병원에 아키를 만나러 갔다가 머리를 삭발한 아키를 보고 다시 되돌아나온다. 축제라서 마을의 분위기는 떠들썩하다. 환한 표정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 사이를 역행하면서 사토는 운다. 마을사람들의 웃음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토의 울음은 사토만이 이해할 수 있다.(물론 여자친구가 백혈병이라고 말하면 왜 우는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 다른 사람들은 결코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우리는 스스로가 혼자라는 걸 느낀다. 말하자면 아키는 사토로 하여금 혼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토가 혼인신고서를 들고 다시 병원으로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나를 혼자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내가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말은 우리가 자기 자신의 원형을 간직하는 한 상처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반세기를 사랑한 사람의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구경하다가 아이들을 시켜서 유골의 일부를 꺼내오게 하는 사진관 아저씨나 결혼을 앞두고도 아키를 잊을 수 없다고 우는 사토의 모습은 일견 순수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울증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원형을 생각하는 일이 사실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리움이 아니라 병리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 그리움과 우울증을 명확히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진관 아저씨는 죽은 교장 선생님의 사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지만 “남겨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뒷정리를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키를 잊지 못하는 사토도 결혼준비를 하면서 살아간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원형의 정체가 아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첫사랑에 실패하지만 그걸 첫이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언가가 끝났던 기억이 아니라 시작했던 기억이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했고 헤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거기에 끝이 아니라 시작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우리는 삶이 결국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대신 앞으로도 계속 시작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처받은 기억을 우리가 스스로의 원형이라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상실에 대해 배우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님을 가르치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에게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 즉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토는 울룰루에 아키의 유골을 뿌리는 대신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우연히 서게 된 이름 모를 곳에서 아키의 유골을 뿌린다. 왜냐하면 아키의 유언은 정말로 울룰루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유언대로 울룰루에다 유골을 뿌리면 사토는 할 일을 완수한 셈이 되고 마음 속에서 아키를 사랑했던 기억을 지워갈 것이다. 그러나 울룰루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유골을 뿌림으로써 아키의 유언은 미완성으로 남는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미완성된 것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안다.


그래서 생각한다. 우리의 중심에 완성된 기억이 아니라 미완성된 기억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전부를 걸고 무언가를 원했던 최초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세상의 중심에 사랑이 있다는 영화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처음 사랑할 때 우리에게는 여분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사랑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전부를 주기 어려워진다. 원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전부를 바친 경험이 있었다는 것과 언젠가 다시 그런 순간이 올 거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원형은 중심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그때’와 ‘다시 한 번’이 필요하므로.



2025년 2월 8일부터 2025년 2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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