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부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화마에 휩싸인 건물을 향해 다가갈 때 나는 불현듯 이 건물이 사람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타들어가는 건물은 재가 되어 날아가거나 균형을 잃고 무너져내린다. 우리가 감정이 격화되었을 때도 그렇지 않을까. 격화된 감정은 주워담을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들고 간신히 만들어놓았던 균형을 무너뜨린다. 불타는 건물 위로 영화의 제목이 오버랩 될 때 괴물이란 우리를 우리가 아니게 만드는 불이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이 불에 대한 탐구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사오리는 아들인 미나토와 함께 불타는 건물을 구경하고 있다. 고층 사다리 위에서 진화를 시도하는 소방관을 향해 사오리는 “파이팅!”이라고 외치는데 이 응원은 소방관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스포츠 선수를 향한 그것에 가깝다. 높은데서 위태롭게 진화 작업을 하는 소방관도 소방관이지만 불타고 있는 건물 안에는 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물 주변에는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가 있을 수도 있고 화마로 재산 피해를 입게 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이 “파이팅!”은 응원이 아니라 조롱이다. 사오리가 무신경한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녀가 사건 속에 있지 않고 사건을 구경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사오리가 구경하고 있는 것은 불이 난 건물만이 아니다. 옆에 있던 미나토가 “돼지의 뇌를 이식한 사람은 사람일까 돼지일까”라고 물었을 때 사오리는 무심코 “그건 사람이 아니지”라고 답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때 미나토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고백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오리는 그것이 아들의 자기지향적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구경하는 입장에서 말했기 때문에 미나토가 알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들이 머리를 가위로 자르고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려도 차분함을 잃지 않던 사오리가 이성을 잃고 미나토를 추궁하는 것은 자기의 뇌가 사람이 아니라 “돼지의 뇌”라는 미나토의 말을 들은 다음이다. 비일상적인 아들의 행동을 일시적인 일탈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일탈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머리는 자라고 까진 팔은 새살이 돋지만 보이지 않는 곳을 다치면 손쓸 도리가 없다. 아들의 뇌 CT 결과에 안도했던 사오리에게 자기의 뇌가 돼지의 뇌라고 말하는 아들의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어떤 결손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미나토 때문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구경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구경할 수 없다. 말하자면 아들의 결손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을 때 미나토는 몰라도 되는 것을 몰라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손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때 사오리는 더 이상 아들을 구경할 수 없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체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오리의 흥분은 말하자면 아들의 일이 본인의 일이 되었을 때 느끼는, 이른바 바깥에서 구경하고 있을 때는 알 수 없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체감하게 되는 뜨거움에 기인한다. 불이 난 건물을 보면서 “파이팅!”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이전과 다르게 사오리는 불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학교를 방문한 사오리는 호리 선생님의 폭력에 대해 항의하고 교사들로부터 사과를 받지만 이 사과는 사과라기보다 조롱에 가깝다. 질문을 회피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기 거부한 채 한 명의 학부모 앞에 다섯 명의 교사가 몰려와 고개를 숙이고 묵묵부답하는 모습은 사죄가 아니라 더 이상 귀찮은 일을 만들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사들이 악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소방관을 향한 사오리의 응원과 사오리를 향한 교사들의 사과는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같다. 그건 바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 자기 일로 만들기보다는 사건의 바깥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싶은 마음이다. 사과하는 교사들의 태도가 정중하고 영혼이 없는 반면 호리 선생만 웃거나 사탕을 먹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구경할 수 없는 자신의 일을 구경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괴물>은 동일한 사건을 등장인물 각각의 시점으로 재조명하는 방식을 취해 진실이 무엇인지 추적해간다. 흔히 라쇼몽식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원래 영화 <라쇼몽>의 원작이기도 한 아쿠타카와의 소설 <덤불 속>에서 유래된 것이다. <덤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부재를 검증한다. 진실의 부재란 곧 객관 세계의 부재다. 말해져야 할 진실이 없을 때 진실은 말해지는 것이 된다. 호리 선생이 미나토를 때린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폭력 교사로 학교에서 퇴출되는 일이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날조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진실이란 각자의 숨겨진 사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진실은 바로 그 숨겨진 사정에 의해 왜곡된다. 사오리에서 호리 선생 그리고 아이들로 이어지는 라쇼몽식 연출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왜곡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장치이다.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생기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게 발화되었을 때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는 아이러니는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이 말하여진 쪽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쪽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미나토와 요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요리는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확인받았고 미나토는 어머니에게 확인받았다. 요리의 아버지는 요리에게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말하며 학대를 일삼고 사오리는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의도치않게 미나토를 인간의 바깥으로 밀어냈다. 마치 뒤집어진 글자처럼 미나토와 요리는 형태는 뒤틀려도 본질은 간직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 본질이란 우리가 어떤 것이 되더라도 우리가 아닌 것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호리 선생은 요리가 제출한 숙제에서 뒤집어진 글자를 바로 적다가 미나토의 이름이 적힌 걸 발견한다. 그가 이 뒤집어진 글자에서 깨닫는 것은 두 아이의 서로를 향한 마음만이 아니라 그 마음이 뒤집힌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인식까지 포함된다. 가장 나다운 것이 거꾸로 나를 내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역설은 호리 선생도 체험한 바가 있다. 그는 미나토를 학대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미나토를 옥상까지 쫓아가 “내가 너한테 뭘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잖아? 응?”이라고 말하는 호리 선생의 모습은 사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괴기스러워 보인다. 말하자면 인정받지 못하는 진실의 모습이 저토록 괴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진실을 말하는 대신 거짓말을 택했고 호리 선생은 뒤집어진 글자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불타오르는 건물에서 시작해 호리 선생이 요리의 숙제에서 뒤집어진 글자를 발견하는 이 장면까지가 말하자면 영화의 전반이다. 이 전반부를 일컬어 불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오리는 아들이 선생에게 폭력을 당하고 이상해졌다는 생각에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극성스러운 학부모가 되고 호리 선생은 아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걸 주장하는 과정에서 폭력 교사로 퇴출당한다. 솔직한 자기 자신을 꺼내려고 할수록 자기가 아니게 되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화의 도입부에 나온 불타는 건물의 모습과 같다. 주워담을 수 없는 말과 행동이 재처럼 흩날리는 와중에 두 사람은 점점 균형을 잃고 붕괴해간다. 나는 처음에 이 불이 억울함이라고 생각했었다. 억울할수록 사람은 격화되고 그로 인해 자기가 아닌 행동을 하게 되지 않던가. 그러나 지금와서 생각하면 이 불은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니게 만드는 자신이다. 불은 스스로를 연소시키면서 커진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을 태우는 자신인 것이다.
영화의 전반이 불의 영화라면 후반은 물의 영화이다. 태풍이 찾아와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호리 선생은 미나토의 집을 찾아가고 사오리와 함께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나선다. 두 사람이 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 화해는 갑작스럽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이해한 것이다. 자신에서 솟아나온 것이면서 자신이 아니게 만드는 불이 아이들 속에서도 타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의 자각은 바로 자신들이 겪었던 불의 경험에서 나온다. 이 경험은 두 사람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일찍이 스포츠 선수를 응원하듯 “파이팅!”이라고 외쳤던 소방관의 위치에 두 사람을 데려다 놓는다. 마치 소방관처럼 이제 두 사람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싸운다.
불이 자기가 가진 것을 태우면서 솟구친다면 물은 자기가 아닌 것을 섞으면서 하강한다.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미나토의 집을 찾아와 “너는 아무런 문제없어!”라고 소리칠 때 히로 선생은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내려놓는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은, 자신과 아이들이 모두 겪고 있던 불의 경험이다. 반드시 무언가를 공유하지 않더라도 나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너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보다 덜 뜨거워진다. 우리가 곤경에 처했다고 생각할 때 비슷한 경험을 겪은 사람을 찾아보는 이유도 말하자면 열을 식히기 위한 것이다. 나에게만 있는 문제는 불이지만 모두에게 있는 문제는 물에 가깝다. 네 안에도 뒤집힌 글자로 쓰인 문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우리는 섞이고 식는다.
영화의 후반부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미나토는 같은 반이 된 요리에게 끌림을 느끼지만 의도적으로 그 끌림에 저항한다. 여자애를 좋아하는 건 창피한 일이지만 남자애를 좋아하는 건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규칙과 질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세상은 어른들의 손으로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어른의 세계에서 이상한 일은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이상하다. 오히려 갱도의 카나리아처럼 아이들은 이상의 징후를 더 민감하게 감지하기도 한다. 미나토가 요리를 좋아하는 걸 두고 “행복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그렇다. 남자애를 좋아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며 이 이상한 일을 계속하는 한 자신은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미나토는 생각한다.
이것은 통념이 아니라 경험에서 배운 것이다. 남자애들한테는 괴롭힘을 당하지만 여자애들과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남자애들이 요리를 두고 “외계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요리의 성정체성은 아마 폭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진입하는 이 시점에 2차 성징 등 신체의 변화를 겪으면서 성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나는 일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요리나 미나토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어쩌면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고 반드시 성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말하자면 괴롭힘을 당하는 요리를 보면서 미나토가 느끼는 것은 동성애자가 사회에서 겪는 현실의 예고가 아니라 이질성을 가진 대상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회의 폭력성에 가깝다. 미나토는 요리를 좋아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 이질성을 제거하기 위해 요리를 밀쳐내지만 그럴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이질성이야말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만큼 생생하게 느끼는 사회의 폭력성은 미나토로 하여금 솔직해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미나토가 잊고 있는 점은 바로 자신의 이질성이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류이기 때문에 서로만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만약 영화가 동류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Same이 아니라 All이다. 이질성은 동성애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개성을 가졌다는 말은 우리 모두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학대당한 요리를 구하는 것은 미나토지만 그 미나토를 구하기 위해 산이 무너지는 와중에 뛰어드는 것은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다. 이질성으로 연대하는 사회의 고리는 이렇듯 특정 집단 내에서 동일성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다. 요컨대 내가 이상한 존재라면 나는 사회의 바깥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상한 존재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음악실에서 교장은 미나토에게 말한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미나토는 자기가 남자애를 좋아하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아이들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건 미나토뿐이다. 그래서 미나토의 두려움은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행복이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인한다. 행복은 행복이 사라지는 찰나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바꿔말하면 미나토가 가질 수 없는 행복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승민과 서연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버려진 집을 꾸미는 순간이었다. 이 영화에서 폐전철을 꾸미는 미나토와 유리의 모습이 그것과 다르지 않다. 행복은 밝은 곳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자라난다.
영화 <괴물>의 결말은 아이들의 생존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나는 죽었다고 보는 편이다. 폭우 속에서 그치지 않는 사이렌 소리는 세계를 향해 울리는 경종이다.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폐전철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폐전철을 나왔을 때 세상은 맑게 개어있고 선로를 막고 있던 하늘색 철문도 보이지 않는다. 미나토와 요리의 대화도 신빙성을 더한다.
“우린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
“없다고?”
“없어. 원래 그대로야.”
“그래? 다행이다.”
세계가 바뀌어도 우리는 그대로라서 다행이라는 요리의 말은 이 영화가 화마와 홍수를 통과하면서 어렵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건 바로 네가 누구라서 다행인 게 아니라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 아이들이 죽었다고 해도 나는 이 영화가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소방차는 불이 난 다음에 달려오고 엄마와 선생은 아이들이 사라진 다음에야 찾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어른의 늦음이 아니라 세상에는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전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이들이 환희에 가득 차서 사용하지 않는 철로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을 다시 볼 때마다 나는 울었다. 그건 아마도 지금 막 터널을 나왔음에도 너와 함께라면 다시 터널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마음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2025년 2월 6일부터 2025년 2월 7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