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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슈퍼 배드>

by 다시

3D 애니메이션 특유의 반짝거리는 색감으로 채워져 있지만 영화 <슈퍼 배드>의 세계관은 어둡다. 이 세계에는 착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악당만 존재한다. 주인공 그루는 아이에게 풍선 인형을 선물한 뒤 터뜨리는 데서 쾌감을 얻고 가게에 줄을 서기 싫어 순번을 새치기하며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을 훔친 걸 자랑하고 비타민 캡슐을 닮은 부하들과 다음에 무슨 짓을 할까 모의하는 악당이다. 주인공만 그런 게 아니다. 피라미드를 훔치는 악당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고아원 원장도 있다. 심지어 그루의 옆집에 사는 보통 사람 프레드조차 개가 아무데서나 볼일을 본다는 항의에 “개는 원래 아무데서나 싸잖소”라며 얼버무리는 인물이다.


문제는 이게 개인 차원의 타락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루의 수입원은 투자금인데 은행은 악당이 가져온 범죄의 규모를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범죄는 은행장의 말처럼 “사업”이다. 범죄와 사업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고 차이점은 합법성의 여부다. 말하자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죄는 사업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도 피라미드를 훔치는 게 합법은 아니다. 그러나 훔친 피라미드는 버젓이 개인 정원에 전시되어 있고 은행은 그걸 실적이라고 표현다는 점에서 비록 합법이 아니어도 이익이 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통념처럼 적용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악당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세상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체제로 돌입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는 악당이 아니라 강자이며 빼앗긴 자는 윤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약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루를 비롯한 악당들은 살아남기 위해 ‘슈퍼 배드’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루가 달을 훔친다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세우는 이유도 은행에서 투자를 받지 못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비타민 캡슐을 닮은 수백 명의 부하들을 먹여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슈퍼 배드>는 처음에 달을 훔치는 악당과 아이들을 착취하는 악당을 나란히 세워둠으로써 전자의 비현실성에 대조하여 후자의 현실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핏 전혀 달라보이는 이 두 가지 범죄는 비교선상이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다. 그것은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아이들을 착취하는 일부터 시작하다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달을 훔치는 황당한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는 전언이다. 요컨대 현실적인 타락은 비현실적인 타락까지 현실의 범주로 끌어온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화 <슈퍼 배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우화처럼도 보인다. 공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복지가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고 믿으며 오직 경쟁만이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습은 달을 훔치기 위한 계획을 짜느라 쿠키를 팔아달라고 방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어른의 모습과 닮았다. 어머니에게 그토록 관심받길 원했으면서도 아이들 대신 달에만 관심을 보이는 그루의 모습은 1929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주먹을 쥐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서도 다시 한 번 그 손과 악수하려고 하는 현 시대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애정을 받기 위한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달은 말하자면 그루가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한 조건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루는 당장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의 애정을 외면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풍경을 묘사하던 영화가 대안을 제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건 그루가 아이들을 입양한 다음부터다. 그루가 아이들을 입양한 이유는 벡터에게 빼앗긴 축소 광선기를 되찾기 위해서인데 왜냐하면 온갖 무기와 방범장치로 무장한 벡터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쿠키를 파는 아이들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양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용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데려온 셈인데 아이들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인해 그루는 조금씩 변해간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들 역시 그루를 이용한 거라고. 왜냐하면 아이들도 고아원에 살면서 매일 쿠키를 팔러 다니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들을 양육해 줄 성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되물림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루가 아이들의 이용가치를 축소 광선기의 회수로 한정한 것과 다르게 아이들은 그루의 이용가치를 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일부를 원하는 것은 욕망이지만 전체를 원하는 것은 사랑이다. 말하자면 아이들은 그루를 이용한 게 아니라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루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엄마에게 원했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갖고 싶었던 단 한 가지이기도 하다.


손익적인 부분에서 아이들은 그루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아이란 소모하는 존재지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모하기만 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루가 은행장에게 투자를 거절당한 후 모두를 모아놓은 자리에서 파산을 선언하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보물인 저금통을 내민다. 그 저금통에서 그루가 얻는 것은 돈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싶은 희망이다. 이 희망으로 그루는 돈이 없으면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주선을 집을 개조해서 만든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하늘을 날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눈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눈을 뜨게 해준 것은 바로 아이들이다.


영화의 말미에 그루는 그토록 어렵게 손에 넣은 달을 아이들과 바꾼다. 달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상징이라면 아이들은 인간의 상징이다. 그래서 달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벡터는 달에서 살게 되지만 그루는 아이들과 함께 지구에 남는다. 1969년에 인류가 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닐 암스토롱은 말했다. 이것은 “위대한 도약”이라고. 그 말처럼 달에 도착한 이래 인간은 인간 이상이 되었다. 다만 그 이상以上이 이상理想과 같은지는 알 수 없다.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는 그루의 모습은 인간 이상은 아닐지 몰라도 인간적이다. 영화 <슈퍼 배드>에서 방점이 찍힌 부분은 슈퍼Super가 아니라 배드Bad다. 상한선에 가까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한선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2025년 2월 4일부터 2025년 2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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