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수녀의 차에 낙서를 했다는 의혹을 추궁받는 크리스틴은 끝까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지만 잘못을 탓하지 않을 거라는 말에 은근슬쩍 사실을 인정한다. 사라 수녀는 웃으면서 대학지원서에 쓴 글을 읽어봤다며 “넌 분명 새크라멘토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도 크리스틴은 황당한 듯이 “제가요?”라고 묻지만 이내 “뭐, 관심은 있죠.”라고 말하면서 부정하지 않는다. 여고 졸업반인 크리스틴은 이런 아이다.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
본명인 크리스틴 맥피어슨 대신 레이디 버드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크리스틴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 자기가 지은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 의식을 내세우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알리고 싶은 게 아니라 크리스틴 맥피어슨을 숨기고 싶어하는 게 크리스틴의 본심이다. 왜냐하면 크리스틴 맥피어슨은 세크라멘토의 철로변에 살지만 레이디 버드는 그 이름처럼 약간은 더 높은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땅보다 높은 곳을 동경하는 건 그 또래 소녀들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그러나 이 욕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면 된다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의 낙차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레이디 버드>가 하늘을 향 한 크리스틴의 끊임없이 도약을 보여주는 이유가 이 낙차의 폭을 새삼 강조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뮤지컬과 국기가 걸려있는 드림하우스에서 꽃미남 남자친구에 이르기까지 크리스틴이 도약하고자 하는 하늘의 위치는 매번 달라지지만 그녀가 착지하는 곳은 항상 똑같다. 언제나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은 창피한 아빠와 마주치면 싸우는 엄마 그리고 예쁘지 않고 복스러운 친구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추락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에 오르기를 실패했을 때 항상 무사히 내려앉는 곳이 어디인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착지지점의 소중함을 가르치려는 교훈적인 내용인 것만은 또 아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가 인상적인 이유는 착지지점이 동시에 발사지점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그렇다.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을 고르기 위해 엄마와 가게에 간 크리스틴은 불연중에 엄마에게 말한다. “난 그냥 엄마가 날 좋아해주면 좋겠어”. 엄마는 “널 사랑하는 거 알잖아”라고 말하지만 크리스틴이 “사랑하는 거 말고 좋아하냐고”라고 묻자 “난 네가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어”라고 대답하고 크리스틴이 다시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이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침묵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한다는 고백을 넌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거절하는 이 시퀀스에서 엄마와 딸은 모두 진심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가 자기가 누구인지보다 중요한 소녀는 결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퀀스에서 엄마와 딸이 말한 것은 상대의 진심이다. 딸은 가능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끝없이 이동하고 싶어하는 반면 엄마는 지금 그대로의 딸이 좋아서 어디론가 가지 않기를 바란다. 딸이 가능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유는 물론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지만 그게 현재의 자신을 그냥 좋아해 달라는 말과 등가는 아니다. 크리스틴은 엄마가 그냥 자신을 좋아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좋아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 그냥이라는 건 없다. 그냥은 아무것도 없을 때가 아니라 너무 많을 때 쓰는 말이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 많을 때 우리는 그냥이라고 말한다. 하나씩 모두 꺼낸다고 해도 전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리스틴이 엄마에게 그냥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말할 때의 자신이란 Nothing이 아니라 All이다. 거기에는 지금과 다른 자신이 되고 싶어서 끊임없이 하늘로 도약하는 자신의 모습도 포함된다. 바꿔말하면 크리스틴이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이유는 가족들이 최대한의 자신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조건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은 고맙지만 우리가 진정 사랑받고 싶은 자신의 모습은 언제나 최대한의 자신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초라한 자신을 사랑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뉴욕에 간 크리스틴은 이름을 묻는 친구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 대신 크리스틴이라는 본명을 알려준다.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소녀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신지를 묻는 질문에 상대가 새크라멘토를 알아듣지 못하자 샌프란시스코라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최대한 자신에는 끝이 없음을 알아챈 사람의 피곤함이 묻어나 있다. 술에 취해 응급실에 갔다가 엉망이 된 화장으로 뉴욕을 돌아다니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자신이다. 최소한의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 앞에서는 최소한의 자신을 숨기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도시에서는 최소한의 자신을 드러내는 이 아이러니는 사랑이 가진 하나의 속성을 비춘다. 그건 바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힘들게 쓴 편지를 버리고 터미널에서 딸을 모질게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새크라멘토를 사랑하면서도 새크라멘토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뉴욕으로 가야하는 레이디 버드의 역설은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해서 거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힘들어하는 이유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그건 바로 사랑하는 대상과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최대한의 자신이 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즉 최소한의 자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거리다. 뉴욕에서 성당에 들어가 그토록 싫어했던 가톨릭 미사를 그리운 눈으로 쳐다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최대한의 자신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최소한의 자신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새크라멘토에서 운전하는 엄마와 딸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둘 사이의 동일성에 대해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 사이의 동일성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차를 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시간의 거리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언젠가는 딸도 긴 시간을 넘어 엄마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될 거라는 것이다. 이 시간의 거리 없이 두 사람 사이의 연대기는 발생하지 않는다. 나란히 타고 있을 때 싸우다가 차에서 뛰어내리는 맨 앞의 시퀀스가 서로 간에 최대한의 자신을 보여주려다 발생한 충돌이라면 같은 차를 운전하는 장면이 오버랩되는 맨 마지막 시퀀스는 최소한의 자신들 속에서 닮음을 발견한 애정의 순간이다. 이 애정이 그들 사이에 놓인 물리적 시간적 거리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는 서로간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거리가 아니라 가까이 붙으면 상처를 준다는 걸 알면서도 거리를 벌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다. 테두리의 장식이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고 십자가 아래 정면이 아닌 옆면을 드러난 이 영화의 포스터는 김혜리 기자가 지적한 대로 중세의 종교화를 닮았다. 종교화 속 성인들은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거리를 좁힌 사람들이다. 영화는 보여주지 않지만 내 짐작에 아마도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로 돌아갈 것이다. 사랑은 척력이 아니라 인력이니까. 영화 <레이디 버드>는 인력에서 자유로운 새가 되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이야기다.
2025년 2월 3일부터 2025년 2월 4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