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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짱구는 못말려 : 어른제국의 습격>

by 다시

크레용 신짱. 속칭 짱구로 알려진 이 아이를 볼 때면 어쩐지 이 아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가 가리키는 것은 어른답지 않은 어른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우유를 맥주처럼 마시고 성인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 이상한 아이는 장난감을 수집하고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자라지 못한 아이의 거울이다. 아이를 초과한 아이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때 그림자에 숨어 있는 것은 어른에 미달한 어른이다. 그러니 짱구라는 캐릭터의 탄생은 곧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희미해져서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시대상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라고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영화 <짱구는 못말려 : 어른제국의 역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깊어진다. 21세기를 20세기로 되돌리고 아이가 어른을 구하는 이 이야기는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뒷걸음질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는데도 왜 우리는 점점 어려지는 것 같은가. 시간이 황혼 무렵에 고정되어버린 마을에서 20세기를 재현하며 사는 사람들은 멈춰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퇴행이다. 모두가 앞으로 달려가는 마라톤에서 서 있는 건 정지가 아니라 뒤로 물러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원을 원한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 노을이 지지 않는 마을은 이 욕망에 대한 시각적 재현이다.


21세기를 혐오하는 켄은 20세기 박물관을 만들고 거기에 20세기 냄새를 퍼뜨림으로써 어른들을 모두 아이로 만든다. 켄이 기억하는 20세기는 인간성이 살아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시대였기 때문에 세상을 20세기로 되돌리면 사람들도 선한 본성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생겨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몸에 아이의 정신을 가진 이상한 인간들이다. 이것은 얼핏 자라지 못한 아이에 대한 비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특촬물 촬영센터에서 짱구의 아빠와 엄마가 어린시절 좋아했던 만화의 주인공으로 분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대하는 영화의 시선은 호의적이었다. 그들을 이상한 인간으로 만든 것은 유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유년에 머물고자 하는 정신의 퇴행이다.


자라지 못한 아이와 퇴행의 차이는 이렇다. 전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헤매는 것이지만 후자는 시간의 흐름 자체를 부정한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책임감이다. 제니퍼 M. 실바 교수는 <커밍 업 쇼츠>에서 21세기의 성인들은 20세기와 달리 평생 직장, 결혼, 집이라는 성인의 표지를 획득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성장의 표지를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간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만약 스스로를 자라지 못한 아이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나이가 되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부재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책감은 책임감에서 비롯한다. 책임감이 없다면 자책감도 없다. 자라지 못한 아이와 아이는 다른 것이다.


영화 속에서 켄이 만들려는 세상은 아이의 세상이다. 켄은 21세기가 타락하고 20세기가 순수하다고 말하지만 이때 그가 말하는 20세기는 190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이 아니라 추상적인 유년기에 가깝다. 모두가 유년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켄의 말 속에 숨어있는 것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한 아이로 남아있을 바에야 차라리 아이가 되자는 것이다. 아침부터 과자를 먹고 아이들의 식사도 챙겨주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켄이 말하는 아이의 속성은 무책임함이다. 반대로 말하면 자라지 못한 아이란 책임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이답지 않은 아이의 위치에 짱구가 서 있다면 어른답지 않은 어른의 포지션에 서 있는 것은 신형만이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짱구에 비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 일쑤인 신형만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무능해보인다. 어른의 하한선이 낮아지면 아이는 그만큼 어른에 가까워진다. 짱구의 유능은 결국 자라지 못한 아이인 신형만에 비춰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신형만은 무능하기만 한가.


20세기 박물관으로 어른들이 모두 끌려간 떡잎 마을에는 아이들만 남는다. 아이들은 편의점을 털어 식사를 해결하지만 그뿐이다. 어른이 없는 마을에는 전기가 끊기고 아이들은 얼마 안 되는 식량을 갖기 위해 싸운다. 어른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아이들이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어른과의 실제 거리이다. 아이 이상과 어른 이하 사이는 생각보다 넓다. 짱구가 부모를 찾기 위해 20세기 박물관으로 가는 데는 그들이 부모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자신들을 책임져줄 어른이기 때문이다. 신형만이라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없을 때 짱구라는 유능한 아이는 오갈 데 없는 아이로 추락한다. 말하자면 자라지 못한 아이가 가진 책임감이란 한편으로는 아이를 지키는 울타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신형만의 회상 장면은 꼭 짱구 나이였을 때의 신형만이 지금의 신형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긴 시퀀스로 보여준다. 픽사가 자랑하는 <업>의 유명한 회상 시퀀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이 장면은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던 신형만이 짱구가 등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어른이 되었다는 표지를 제공하지만, 이 장면이 감동적인 이유는 신형만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한 아이가 안심하고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실제로 이 영화의 끝에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신형만이 아니라 짱구지만 짱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것은 신형만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라지 못한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된다.


제니퍼 M. 실바 교수가 성장의 표지가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했다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내부는 자아를 뜻한다. 말하자면 평생 직장, 결혼, 집을 갖지 못하게 된 성인들은 그런 외부의 표지 대신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성숙한 자아를 이룸으로써 스스로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평생 직장과 집을 갖지 못한 성인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반대로 집, 결혼, 평생 직장을 가진 것만으로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외부의 표지만큼이나 내부의 표지, 즉 자아의 승인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 자아의 승인이란 곧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은 아이로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어른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 이 울타리가 없을 때는 아이는 곧바로 어른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아이가 어른처럼 살아야 하는 현실을 두고 낙원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영화 <짱구는 못말려 : 어른제국의 역습>의 신형만은 유년기를 그리워하고 때론 아이보다 더 무능력하기도 한 자라지 못한 아이지만 그가 자라지 못한 아이가 된 것은 역설적으로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어른이 되기를 선택해 왔다는 데 있다. 영화 속에서 20세기의 냄새를 물리친 신형만의 발냄새는 말하자면 일상의 냄새다. 일상은 한 번도 과거였던 적이 없었다. 유년을 향해 고개를 돌려도 두 발은 오늘이라는 책임 위를 걸어갈 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간다.



2025년 2월 1일부터 2025년 2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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