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은 데뷔작 이후 치정극만 발표하며 삼류라고 천대받던 감독 김열이 이미 찍어둔 영화를 재촬영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구분을 위해 영화 속 동명의 영화를 흑백영화로 부르겠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김열은 왜 흑백영화를 다시 찍으려고 하는가.
영화의 설명은 이렇다. 흑백영화를 완성한 후부터 김열은 자꾸 꿈을 꾼다. 꿈에서 보는 것은 이미 완성한 영화와 다른 결말을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꿈에서 깬 김열은 이 결말대로 영화를 찍으면 비슷한 치정극이 아니라 데뷔작을 뛰어넘는 걸작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김열이 영화를 재촬영하려는 이유는 걸작을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영화 감독이라면 누구나 걸작을 찍고 싶어하지만 김열이 걸작을 만들려는 이유는 일반적인 경우와 좀 다르다. 그는 신상호 감독의 유작을 훔쳐 데뷔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김열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썼”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비평가는 물론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들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훔쳤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혐의가 집중되는 이유는 데뷔작 이후 발표하는 그의 작품들이 데뷔작에 비해 너무나도 저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열은 걸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걸작이야말로 그에게 씌어진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열이 이미 완성한 영화와 다른 결말을 꿈에서 상상하고 결말을 바꾸기 위해 무리하게 재촬영을 강행하는 모습은 소위 ‘신상호 콤플렉스’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지는 영화의 결말 부분, 즉 김열이 꿈에서 보고 재촬영을 감행하게 만들었던 그 장면은 백회장의 말에 의하면 “신상호 감독이 죽을 때 모습”과 동일하다. 신상호 감독은 세트에 불이 붙은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다가 타죽었고 김열은 조감독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꿈에서 본 흑백영화의 결말은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기억인 셈이다. 김열은 무의식적으로 꿈을 통해 기억을 허구적 상상물로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신상호 감독의 유작을 훔쳐서 데뷔했다는 세간의 혐의가 사실이기 때문이다. 신상호 감독이 불에 타서 쓰러진 순간 김열은 감독을 구하는 대신 사무실에서 시나리오를 훔쳐 달아났고 훔친 시나리오로 데뷔했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백회장과 자신뿐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훔쳤다고 할 때마다 그는 잊고 싶은 자신의 잘못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김열이 가지고 있던 것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죄의식’이다. 이 죄의식이 그로 하여금 신상호 감독의 마지막 순간을 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죄의식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데뷔작인 신상호 감독의 유작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것. 걸작을 만들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면 훔친 시나리오로 데뷔했다는 이야기는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점에서 김열이 무의식을 통해 신상호 감독의 마지막 순간을 흑백영화의 마지막 순간으로 가져온 이유는 명백하다. 죄의식의 순간을 걸작의 순간으로 전도시키기 위해서다. 인생의 과오를 상징하는 얼룩을 영화사의 걸작을 탄생시키는 화룡점정으로 바꾸는 순간 그의 죄의식은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무의식적 욕망은 바뀐 시나리오를 보면 더 선명해진다. 원래 흑백영화의 내용은 남편이 첩을 들이고 본처를 내쫓자 갈 데 없는 본처가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바뀐 내용은 이렇다. 본처가 쫓겨난 후에 첩은 아이를 낳지만 아이를 빼앗기고 쫓겨난다. 본처는 첩과 함께 남자의 집안을 몰락시킬 음모를 꾸미고 마침내 시어머니와 남편을 죽이고 집안의 금고를 차지하게 되지만 금고를 차지가기 위한 첩과의 싸움에서 패해 죽는다. 홀로 남은 첩은 금고를 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던 거대한 거미로 인해 죽고 집안은 거대한 거미집으로 변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본처가 의미하는 것은 신상호 감독이고 첩은 바로 김열 자신이다. 원작의 내용은 자기고백적이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김열은 신상호 감독이 죽은 후 그의 시나리오를 빼앗아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바뀐 시나리오를 보면 이 내용이 달라진다. 집안을 몰락시키고 금고를 차지할 계획을 세운 것은 첩이 아니라 본처이다. 게다가 첩이 본처를 죽이게 되는 것은 그녀의 원래 의도가 아닌 본처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정당방위에 의해서다. 즉 김열은 바뀐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이 시나리오를 훔친 것은 고의적인 잘못이 아니라 정당방위라고 쓰고 있는 셈이다.
신상호 감독의 죽음은 화재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자신이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시나리오는 재가 되었을 거라는 것. 자신이 촬영하지 않았다면 시나리오는 영원히 묻히고 말았을 것이니 이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정당방위라는 것. 아마도 이것이 김열이 스스로를 설득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뀐 시나리오에서 첩은 영광의 자리를 누리는 대신 거미에게 물린 채 계단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말하자면 시나리오를 가져간 대가는 영광이 아니라 죽음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누린 게 없다. 오직 고통만 받았을 뿐이다. 이것이 바뀐 시나리오를 통해 외치는 그의 목소리이다.
흑백영화를 재촬영하는 이유가 죄의식을 없애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김열의 재촬영은 ‘속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속죄를 작동시키는 원리는 ‘합리화’의 양식이다. 김열은 바뀐 시나리오에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그는 잘못했다고 말하는 대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며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로 하여금 꿈에 다른 결말을 보여주고 재촬영을 강행하도록 만드는 무의식은 죄의식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대신 죄의식으로부터 탈각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영화 중간에 재촬영이 벽에 부딪힌 김열은 신상호 감독의 환상과 마주하는데 이때 신상호 감독이 그를 질타하는 대신 격려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화를 내야 마땅할 당사자가 역으로 그를 격려한다는 것은 이 재촬영, 즉 합리화가 정당한 것임을 스스로에게 세뇌하는 자기암시적 행위이다. 이때 말할 것도 없이 이 신상호 감독의 환상은 김열의 무의식의 재현이다.
<거미집>에서 합리화는 김열만의 특수한 결함이 아니라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공유하고 있는 속성이다. 호세는 바람을 피워놓고도 “그럼 난 얼마나 힘들겠냐”고 항변하고 유림은 뱃속의 아이가 호세의 아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를 이용하기 위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조감독은 이만희 감독에게로 갈 예정이지만 김열에게 “충성”한다고 말하고 미도는 걸작을 만들기 위해서라며 공무원에게 술을 먹이거나 여배우를 폭행하면서까지 촬영을 강요한다. 심지어 흑백영화 속 본처는 자신이 사생아임을 밝히면서 일이 이 사태까지 번진 것은 “당신들 탓”이라고 외치고 첩 또한 자신의 운명이 기구한 까닭을 “남자들”에게서 찾는다.
특정 인물만이라면 모르겠으나 등장인물들 거의 전체가 같은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속성이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공통의 양식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는 이유는 각자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기원은 이 재촬영이 허가받지 못한 데 있다. 문화공보국에서 허가하지 않은 재촬영을 몰래 빨리 끝내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합리화를 내면화하게 만든 것은 검열이라는 제도이다.
영화의 배경은 유신시대다. 제4공화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독재시대라고 부른다. 검열을 하는 이유는 체제에 반대하거나 조롱하는 작품을 차단하기 위해서인데 이 말인즉슨 독재라는 체제에 맞게끔 작품을 수정한다는 뜻이다. 합리화는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합성을 만드는 양식이다. 따라서 체제의 정합성을 위해 작품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검열은 그야말로 독재의 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 속 인물들의 합리화는 개인의 윤리 부재가 아니라 사회의 도덕적 해이에 따른 반영이다. 그것은 개인의 얼굴이 아니라 독재라는 거울에 비친 군상의 얼굴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김열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듯이 이 합리화는 성공하지 못한다. 언론시사회의 뜨거운 반응과 달리 김열의 표정은 공허하다. 그는 걸작을 만드는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죄의식을 없애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 영화를 재촬영함으로써 내면의 죄의식을 소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화라는 객관물로 등장시킨 셈이 되었다. 이 영화가 살아있는 한 그의 죄의식은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무의식이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움직인 게 아니라 죄의식이 무의식을 통해 자신의 억압을 풀고 회귀한 것이다. 말하자면 김열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실패는 김열만의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모두 겪는 현상이다. 호세는 바람 피운 사실을 숨기는데 실패하고 유림은 아이의 아버지가 호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추는데 실패한다. 미도는 영화 속 자신의 지분을 높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흑백영화 속 본처와 첩 역시 금고의 재산을 갖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이 흑백영화는 본처가 복수의 대가로 돈을 원하고 첩 또한 빼앗긴 아이를 찾기보다 금고의 열쇠를 먼저 찾는다는 점에서 조감독의 말처럼 반공영화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영화이다. 즉 문공부는 반체제 영화를 검열하는데 실패한다.
그들은 왜 실패하는가. 합리화란 그 내적 구조상 불가능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김열이 합리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책임의 전가를 통한 죄의식으로부터 탈각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과거의 김열이므로 이 책임의 전가는 곧 과거를 수정하는 행위이다. 즉 그는 고통스러운 현재를 바꾸기 위해 현재를 개선하는 대신 과거를 수정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검열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검열이란 이미 씌여진 작품, 즉 과거를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재촬영과 검열이라는 합리화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시간을 역행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하지만 누가 시간을 역행할 수 있는가.
흑백영화를 재촬영하는데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문공부 국장이나 주사가 아니라 ‘시간’이다. 김열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이틀이며 유림과 미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 역시 유림에게 내일 드라마 촬영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는 카메라의 임대 기간이 종료되어 회수하러 온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으며 이 세트장은 곧 이만희 감독의 영화 촬영을 위해 비워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재촬영은 시간에 쫓긴다. 시간은 재촬영의 가장 큰 적이다. 시간이 재촬영의 가장 큰 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재촬영이 과거를 수정해서 현재를 바꾸려고 하는 합리화의 시도, 즉 시간을 역행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원래 시간은 순행한다. 그러므로 역행의 시도인 재촬영과 순행의 흐름인 시간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합리화에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합리화는 시간을 역행하려는 시도지만 시간은 원래 순행한다. 김열이 재촬영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꿈에서 본 마지막 장면 때문인데 이 때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는 방식은 플랑 세캉스이다. 플랑 세캉스란 편집없이 한 번에 찍는다는 뜻이다. 플랑 세캉스에서 ‘다시’는 없으므로 플랑 세캉스는 그 자체로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니까 플랑 스캉스로 재촬영을 한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으로 시간을 돌이키려는 모순적 행위이다. 즉 김열의 재촬영은 합리화의 시도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그것의 불가능성을 폭로한다. 이 자가당착이야말로 당대의 검열이 보여주었던, 체제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대신 체제의 불공정성을 폭로하고 말았던 유신의 민낯이다.
과거의 것. 이미 흘러나온 욕망은 수정되지 않는다. 김열이 재촬영한 흑백영화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바로 여성의 욕망이 가감없이 발현되는 한편 그로 인해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는 점이다. 독재라는 가부장 권력 아래 숨죽여야 했던 여성의 욕망은 흑백영화 속에서 상류층의 성을 거미집으로 만드는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동시대의 여성인 유림은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심지어 바람까지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대비가 보여주는 것은 사각의 틀을 장악한 것은 금기의 욕망이 아니라 지배체제의 욕망이며 그것은 사각의 틀을 움켜쥘 수는 있어도 현실을 창출할 수는 없다는 정언이다.
재촬영을 위해 폐쇄한 세트장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합리화하려는 인간 군상이 판치는 복마전으로 변해가지만 막상 촬영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그 욕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세트장 안에서 일어났던 일은 한갖 해프닝으로 전락한다. 말하자면 틀 속에서 있었던 일은 틀 안에서 끝날 뿐 오늘을 바꾸지 못한다. 김열의 재촬영이 영화를 바꾸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를 바꾸는데는 성공하지 못했고 폐쇄된 한국 속에서 꾸었던 유신의 꿈은 민주화의 봄볕에 흩어졌다. 한나 아렌트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는 유토피아의 독재자”라고 말했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스스로를 속여왔는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지나간 것을 수정하려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달콤한 인생>에서 지적했다시피 시간이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라는 점은 <거미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시간이 앞으로 달려간다는 것이며 그 누구도 삶을 다시 살 수는 없다는 것. 삶은 과거를 수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현재를 개선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자기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깊은 공허함에 빠졌던 김열의 표정은 그 뒤늦은 깨달음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을까.
2023년 10월 7일부터 2023년 10월 1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