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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06. 2023

영화 이야기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공동 집필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 도입부에도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달해 주었고 그 대가로 독수리에게 심장이 쪼이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자.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핵폭탄을 주었고 냉전 시대에 보안 청문회를 겪으며 명예를 잃었으니 ‘불과 고통’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진정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면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불’이나 ‘고통’이 아니라 ‘이관’이라는 행위이다.


인간은 불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니 신이 불을 독점하던 시대에 인간의 삶은 오로지 신에게 묶여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은 불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인간의 삶을 조종한다. 그렇다면 불은 불이 아니라 권력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신이 독점하고 있던 권력을 인간에게로 이관시켰다는 뜻이다. 프로메테우스 이후 인간은 불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됨으로써 스스로의 생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따라서 프로메테우스가 신으로부터 고문을 받는 이유는 불을 빼앗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인간을 다시 지배하기 위해서 신은 프로메테우스를 고문한다. 어차피 불은 이미 인간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전달자를 고문함으로써 그것이 원래 누구의 소유였는지를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너희들을 해방시킨 불은 프로메테우스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라고. 말하자면 이 고문은 보복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이다. 신은 프로메테우스를 고문함으로써 인간에게 너희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라고 말한다.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서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 최고의 힘은 폭력이고 폭력의 주인은 군인이다. 가장 많이 죽은 것은 군인이지만 가장 많은 힘을 가진 것도 군인이었다는 말이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은 이 군인의 힘으로 나치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일본이 남아 있으므로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전쟁을 누가 끝냈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개의 핵폭탄이 끝냈다. 즉 2차 세계대전을 끝낸 것은 학자이다. 전쟁에서 최고의 영광은 전쟁을 시작하는 자가 아니라 끝내는 자에게 돌아간다.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의 개발로 말미암아 그 영광의 자리를 군인으로부터 빼앗았다.


해리 트루먼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로 이어지는 권력의 승계는 얼핏봐도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권력이 어떤 직군을 중심으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리를 공부한 적도 없는 해군 제독 출신 스트로스조차 AEC(원자력 위원회) 의장을 맡지 않았는가.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무력이었던 군인이 전쟁의 위험과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정치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역사에서 군인이 권력을 갖는 경우는 흔하다. 우리나라 역시 최장 기간 재임한 대통령이 군인이지 않았나.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힘을 얻게 된 군인 세력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세력을 죽이지 않고 키워나간다.


오펜하이머의 핵폭탄은 이러한 군인 중심의 권력 편성에 제동을 걸었다. 트리니티 실험 이후 워싱턴에 가려고 하는 오펜하이머에게 “뭣하러?”라고 선을 긋는 그로브스의 행동과 백악관에서 “핵폭탄 발사 지시를 내린 건 당신이 아니라 나”라고 말하는 트루먼의 모습은 이러한 제동에 대한 반발이다. 하지만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원폭의 아버지’라는 문장은 이 전쟁이 군인만의 것이 아니라 민간인(학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편향된 권력 형성을 가로막는다. 말하자면 오펜하이머는 프로메테우스가 신으로부터 불을 빼앗듯이 군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밝혀지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에서 오펜하이머는 “파괴의 연쇄반응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연쇄반응이란 핵폭탄이 한 번 폭발하고 끝나는 대신 무한히 연소함으로써 대기마저 태워버리는 세계의 멸망을 가리킨다. 트리니티 실험에서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도 핵폭탄은 한 번 폭발하고 끝났다. 세계가 멸망할 가능성은 테스트에서 계산했던 것처럼 0에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가깝다는 말은 같다는 말과 다르다.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에게 시작되었다고 말한 연쇄반응은 완전한 0이 되지 못한 나머지다. 그리고 그 나머지란 폭발의 가능성이 아니라 폭력의 가능성이다.


핵폭탄은 한 번 폭발하고 끝났다. 하지만 그 위력을 지켜본 세계는 군비 경쟁에 돌입한다. 소련이 수소 폭탄 실험을 했다는 증거가 나오자 미국 역시 수소 폭탄 실험에 들어갔다. 핵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없앴지만 수소 폭탄은 아마 그것보다 더 큰 도시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소 폭탄이 개발되면 그것보다 더 큰 폭탄이 연이어 만들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지구를 없앨 수 있는 폭탄도 만들어질 것이다. 핵폭탄은 터진 즉시 세계를 멸망시키지는 않았으나 폭발이 만들어낸 폭력의 연쇄반응은 멈추지 않고 이어져서 마침내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 연쇄반응이 아니라 윤리적 연쇄반응이다. 달리 말하면 폭력의 역사라고 해도 좋다.


냉전이라는 말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폭력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이념의 차이에 따른 대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에 대한 폭력적 반응일뿐이다. 이념은 삶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념을 갖느냐가 그 사람의 생을 결정하지 않는가. 하지만 놀란 감독이 명명한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의 이름은 핵분열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생을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재구성할 때 형성되는 것은 표적이고 분열되는 것은 그의 삶이다. 빨간색만 보여도 직장을 잃는다는 매카시즘의 광풍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자유주의의 삶을 만들어주는 대신 원래의 삶을 분열시키는 편집증적 망상을 낳았다. 롭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오펜하이머의 생이 분열하다가 마침내 하얗게 물들면서 폭발하고 마는 장면은 이러한 편집증적 망상에 대한 비유다. 이념이 삶에 대해 질문할 때 삶은 안정되는 대신 폭발한다.


그러나 이념이 생을 분열시키게 만든 것은 냉전이라는 대결 구도이고 이 대결 구도는 핵폭탄 이후 발생한 폭력의 역사에 기인한다. 오펜하이머가 질문에 대답만 할 뿐 롭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를 물어뜯고 있는 이 폭력의 연쇄반응이 다름 아닌 스스로 만든 폭탄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묵묵히 독수리가 심장을 쪼는 것을 지켜보듯 오펜하이머도 독수리(미국)가 심장을 쪼는 것을 묵묵히 바라본다. 프로메테우스가 저항하지 않았던 이유 역시 그가 전해준 불이 생존의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고 싸움의 용도로도 사용되었다는 죄책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윤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둘은 동일 인물이다. 그러나 이 죄책감은 재고가 필요하다.


먼저 핵폭탄이 냉전을 시작하게 만들었다는 오펜하이머의 생각은 추상적인 의견이다. 캐시 대령의 예나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에서 알 수 있듯이 핵폭탄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미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시작되고 있었다. 종전 전에도 코뮤니스트는 나치만큼이나 미국의 적이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핵폭탄의 발명으로 오펜하이머가 실질적으로 미친 영향은 군부의 권력 편성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스트로스의 청문회에서 그에게 치명타를 입힌 것은 데이비드 힐이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힐은 한 번도 오펜하이머로부터 호의를 입은 적이 없다. 오히려 오펜하이머는 번번히 힐을 무시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이 오펜하이머 사건을 들어 스트로스를 저격한 이유는 그것이 군인이 민간인(학자)을 탄압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힐은 오펜하이머의 편을 듦으로써 군인이 권력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한 셈이다.


오펜하이머가 보안 청문회에 회부된 것은 얼핏 스트로스 개인의 복수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동위원소 수출 건으로 만인 앞에서 스트로스를 모욕했다. 또한 스트로스는 아인슈타인이 오펜하이머와 대화한 후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에게 보이는 감정의 양상은 열등감이다. 이 열등감은 권력을 빼앗긴 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스트로스는 AEC 의장이면서 거기에 소속된 물리학자들에게 심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바로 전쟁을 종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인 출신인 스트로스가 전쟁을 끝낸 물리학자 집단에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스트로스가 보든을 시켜 오펜하이머를 청문회에 회부한 것은 일견 권력을 빼앗긴 신이 프로메테우스를 고문하는 모습과 닮았다. 하지만 이때의 신이 권력에의 의지를 표상할 뿐 권력 그 자체가 아니듯이 스트로스 역시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국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한다. 여기서 스트로스를 낙마시킨 장본인 중 하나가 케네디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데 그 이유는 오펜하이머로부터 촉발된 군인 권력의 제동이 최종적으로는 민주정에 권력을 이관하는데까지 나아갔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펜하이머는 군인(신)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민주(인간)에게 전달해준 그야말로 20세기 프로메테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트로스의 청문회에 놀란 감독은 핵융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분열이 불안정을 유지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라면 융합은 안정을 유지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다. 오펜하이머의 청문회가 이념의 중성자로 끝없이 자기 분열을 요구당했던 자리인 반면 스트로스의 청문회는 군인 권력이 거부당하고 민주정이 다양한 인물의 목소리로 합치되는 자리다.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직접 지명한 스트로스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은 군인 권력의 종결을 의미한다.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와 달리 스트로스의 청문회가 흑백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군인 권력은 당대를 어둠으로 물들인 냉전의 시발점이자 민주정의 등장 이후 과거로 퇴장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은 과장된 것이다. 이 과장은 오펜하이머의 윤리성을 보존하고 싶은 놀란 감독의 의도로 읽힌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을 재고해야 한다는 이유는 단지 그 죄책감이 과장된 것이어서만은 아니다. 죄책감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이며 이 책임은 그가 가지고 있는 권한의 영역을 드러낸다. 누구도 자신의 권한이 아닌 영역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말하자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거기까지가 자신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점에서 광대한 자의식의 영역이다. 그렇지 않은가. 전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냉전의 책임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니. 그의 윤리성이 허위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윤리성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핵폭탄을 만든 것은 오펜하이머 혼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를 지칭해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즉 오펜하이머는 핵폭탄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다.


자신이 책임자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이 동일시는 ‘과잉’이다. 그런데 이 과잉이 있기 이전에 오펜하이머에게는 ‘결핍’이 있었다. 이 결핍은 영화의 도입부에 나온다. 케임브리지의 열등생이었던 오펜하이머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었다. 빗방울은 점이다. 점은 바닥에 부딪혀 파문으로 확산된다. 점이 파문으로 확산되는 모습에서 보잘 것 없는 현재의 자신이 강한 영향력을 지닌 자신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상상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당시 그는 모욕을 준 교수에게 복수하는 방법으로 사과에 독을 넣는 치졸한 방법을 선택한 열등생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누구보다 스스로를 혁신하고 싶었을 것이다.


괴팅겐 대학을 거쳐 버클리 교수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에서 원폭의 아버지로 오펜하이머는 끊임없이 올라간다. 이 상승의 여정은 그의 결핍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충족의 과정이다. 오펜하이머가 핵폭탄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면 트리니티 실험은 그의 자의식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정점의 순간에서 이 자의식은 안정화되는 대신 폭발한다. 스스로가 꿈꾸는 인간이 되기 위해 걸어온 길 끝에서 만난 것은 이상적인 인간이 아닌 화염과 방사능이 난무한 광기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물리학은 이성의 학문이고 핵폭탄은 물리학이 도달한 정점이다. 실험이 성공하는 순간 눈앞을 가득 메운 광휘 이성의 세례라면 그 세례가 걷히고 남은 것은 광기의 굉음과 진동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꿈을 이루자마자 꿈에 배신당하고 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펜하이머가 지닌 죄책감이란 어떻게 보면 이 배신감에 대한 보상이다. 그는 배신의 상처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스스로를 위무한다. 오펜하이머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던 자신과 사과에 독을 넣던 자신에게 보상할 만한 미래를 주지 못했으므로 대신 폭탄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과 냉전에 시선을 돌린다. 이때 그가 쳐다보는 것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이 아닌 타인의 잃어버린 시간이다. 오펜하이머는 타인을 쳐다봄으로써 자신을 잊는다. 보안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가 일으킨 폭발은 그렇게 잊었던 자신과 마주함으로써 발생한 폭발이기도 했을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언젠가 그들은 당신을 용서하고 상도 주겠지만 그건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니오. 그들을 위한 것이지.”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이 윤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여정에 대한 보상이었던 것처럼 오펜하이머가 받은 훈장 역시 용서와 무관하다. 어쩌면 핵폭탄이 아니라 이 몰이해야말로 폭력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동력일지도 모른다. 스트로스는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가 한 말이 아니라 하지 않은 말에 분노했다. 몰이해는 자기분열의 원리로 작동한다.



2023년 9월 24일부터 2023년 10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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