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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24. 2023

영화 이야기 <자객 섭은낭>

<자객 섭은낭>은 섭은낭이 지시받은 세 건의 살인에 대한 이야기다. 은낭은 첫 번째 대상은 죽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대상은 죽이지 않았다. 샤오시엔 감독은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흑백으로 찍었고 세 번째는 컬러로 찍었다. 첫 번째 표적은 “아버지를 독살하고 형제를 살해한” 자였다. 두 번째 표적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한 아이의 아버지여서 죽이지 않았다. 은낭은 “아이가 귀여워서”라고 말했는데 이 말 뒤에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가여워진다는 말이 숨어 있다. 부모 없는 아이는 우물가에 혼자 있는 아이와 같다. 이런 아이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을 일컬어 맹자는 측은지심이라고 했다. 인륜과 측은지심은 삶에 대한 유가의 해석이다. 은낭은 유가의 기준으로 죽이고 죽이지 않았다.


은낭은 자객이다. 자객에게 죽이는 일과 죽이지 않는 일은 곧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은낭의 삶은 유가가 이끌어 가는가. 하지만 은낭은 유가의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스승이자 표적을 지시하는 가신공주의 별칭은 여도사다. 도사는 도가의 인물이므로 가신공주에게 사사한 은낭 역시 도가의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도가는 자연을 닮은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다. 쏟아지는 산사태가 아이를 감싸는 어미를 보고 멈추는 일이 있는가. 자연은 불인不仁한다. 가신공주가 은낭에게 “검술은 완벽하나 마음이 문제”라고 말한 것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그러나 살인을 도가의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살인은 단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죽임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다. 목적은 인간의 것이므로 인위적인 것이지만 도가는 무위無爲한다. 도가의 죽음은 자연사다. 시간이 죽이고 바람이 죽이고 더위가 죽이고 추위가 죽인다. 하지만 가신공주가 은낭에게 표적의 살해를 명할 때 그 명분은 인륜적인 것이었다. 가신공주는 은낭에게 마음을 죽이고 검이 되라고 명했는데 이 죽음을 자연사로 해석하려면 검을 휘두르는 자는 자연이어야 한다. 도가를 종교로 볼 수 있다면 자연은 신이다. 하지만 이 신은 인륜에 근거해 사람을 죽인다. 도가의 신이 아니라 유가의 인간이다. 말 그대로 ‘가신假神’이다.


은낭이 죽이고 죽이지 않는 흑백의 장에서 가신공주와 은낭이 무슨 색인지는 알 수 있지만 자연의 색은 알 수 없다. 곁에 있는 당나귀가 무슨 색인지 서 있는 나무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가신공주와 은낭은 도가의 사람이지만 유가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유가의 눈은 인륜이라는 기준 아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말하자면 영화의 흑백은 유가의 빛을 투과한 세상의 풍경이다. 그 속에서 자연은 색을 잃는다.


그러나 색을 잃는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인간도 자연이다. 흑백의 장에서 은낭과 가신공주가 무슨 색인지 알 수 있는 것은 각각 검은 옷과 흰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흰 옷과 검은 옷이 아니라면 그들이 무슨 색을 입었는지 알 길은 요원하다. 그렇다면 유가의 세상 속 인간은 색을 얻은 것인가 아니면 잃은 것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기준 없이는 진정한 인간도 없다. 다만 이 기준이 만들어내는 진정한 인간 아래 쌓이는 것은 다양한 인간의 시체들이다.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준인가 다양성인가. 흑백의 시퀀스가 묻는 것은 이것이다.


<자객 섭은낭>은 흑백으로 묻고 컬러로 답한다. 이 영화는 자객으로 키워지면서 색을 잃었던 은낭이 색을 회복해가는 과정인 동시에 ‘자객’이 ‘섭은낭’으로 변모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건 세 번째 살인 지시를 받은 다음부터다. 가신공주가 지목한 표적은 위박의 절도사 전계안이며 그는 은낭의 과거 정혼자이다. 영화는 종장이 아니라 도입부에 컬러를 넣었다. 변화는 끝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 시작부터 발생했다는 뜻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일단 표적이 달라졌다. 앞선 두 건의 표적이 일면식 없는 타인이었다면 이번에는 과거의 정혼자다. 표적인 계안은 은낭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은낭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즉 버림받은 것이다. 앞선 두 명의 표적과 달리 은낭은 계안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중요하다. 가신공주는 은낭에게 검이 되기 위해 마음을 죽이라고 말했지만 이 살인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죄의식을 없애는데 원한만큼 잘 듣는 마취제가 있을까. 하지만 원한은 마음의 일부분이라서 원한을 깨우면 마음의 나머지 부분도 깨어난다. 역설적이지만 계안을 죽이기 위해 은낭이 되어가는 것은 검이 아니라 인간이다.


동기도 달라졌다. 이제까지 은낭이 죽이고 죽이지 않은 기준은 인륜이었다. 계안은 정혼자를 버렸으니 인륜을 저버렸다. 유가의 기준을 따른다면 마땅히 죽여야 할 자다. 하지만 은낭은 계안의 어머니이자 자신과 계안을 정혼시킨 가성공주가 자기를 저버린 일을 죽을 때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운다. 자신을 사랑해준 이의 자식을 죽이는 일은 인륜이 아니다. 또한 은낭은 호희의 침실에서 계안이 어릴 적 자기를 기억한다는 말에서 그의 죄의식을 듣는다. 말하자면 그는 반성하는 인물이다. 이제 문제는 복잡해진다. 앞선 두 명은 인륜을 기준으로 죽이고 죽이지 않음을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륜에 따르면 계안은 죽여야 할 이유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도 분명하다. 이제까지 일방향이었던 동기는 계안과 조우하면서 처음으로 쌍방향으로 충돌한다.


달라진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신공주가 표적을 선별하는 기준은 황실에 대한 위협 여부였을 것이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은낭의 기준은 가족이었다. 첫 번째 표적은 가족을 살해한 자였으므로 죽였고 두 번째 표적은 가족이 있는 자였으므로 죽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 가신공주를 따라 가족을 떠난 뒤 병기로 키워진 은낭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가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계안을 죽이라는 세 번째 살인 지시가 그녀를 인간으로 깨운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계안은 은낭에게 가족이면서 동시에 가족을 빼앗은 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애정과 증오가 각각 극단으로 치닫는 곳에서 만나는 인물이 계안이다. 계안을 바라볼 때 은낭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그렇다면 이제는 물어야 한다. 인간다워진다는 건 무슨 뜻인가. 유가에서 인간은 달성해야 할 것이고 도가에서 인간은 회복해야 할 것이다. 유가에서 인간은 이상이고 도가에서 인간은 본성이다. 이 둘은 얼핏 달라 보인다. 앞서 나는 유가의 빛을 투과한 세계는 흑백이고 자연의 빛을 회복한 세계는 컬러라고 말했다.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는 동안 달라진 것은 은낭이다. 흑백의 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자객이었던 은낭은 컬러의 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인간으로 변모한다. 자연은 사람을 구하지 않으니 이 변화는 도가적인 것이 아니라 유가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변화는 도가적인 것으로도 보이는가.


흑백의 세계가 유가의 빛을 투과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빛을 투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가신공주가 죽이라고 지목한 상대들은 계안의 경우에 비춰보면 인륜을 어겨서라기보다 황실에 위협이 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인륜은 목적이 아니라 구실로 쓰였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살릴 자와 죽일 자를 구분하는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세계는 흑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위박에서 은낭이 알게 되는 것은 죽일 이유나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나에게는 누구도 죽일 권한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정치의 검이었던 은낭은 인간이 된다. 그리고 이 인간은 도가의 것도 유가의 것도 아니라 둘 다의 것이다. 


세계는 유가의 눈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고 도가의 눈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다. 정치의 눈만으로는 더더욱 해석할 수 없다. 세계는 유가의 것이면서 도가의 것이다. 세계가 도가의 것이므로 은낭은 자연사가 아닌 죽음을 멈추고 세계가 유가의 것이므로 은낭은 죽음이 닥친 인간을 구한다. 인간은 언제나 생명으로서의 인간이자 윤리로서의 인간이다. 둘 중 어느 하나였던 적도 없고 어느 하나여서도 안 된다. 위박에서 은낭이 회복하는 인간이란 바로 이런 인간이다.


<자객 섭은낭>에서 카메라가 인간보다 먼저 잡는 것은 자연이다. 첫 흑백 시퀀스에서 가신공주와 은낭보다 먼저 등장한 것은 당나귀와 나무였고, 가성공주가 현을 뜯는 장면에서도 그녀보다 먼저 잡힌 것은 들판의 이름 없는 꽃나무였다. 무협 영화지만 이 영화에서 자연은 인간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재료로 소모되지 않는다. 인간의 몸짓 한 번에 절벽이 갈라지는 일도 없고 눈빛 한 번에 바다가 일어나는 일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무협은 원래 도가의 것이고 도가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객 섭은낭>은 인간을 이야기의 재료로 소모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그러니까 인간이 역할을 다한 뒤에도 인간을 버리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건이 일어난 뒤의 인간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인간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다. 정지 화면 속 재료가 아닌 롱테이크 속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캐릭터가 아닌 존재다. <자객 섭은낭> 속 인물들은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고 폐기되는 도구가 아니라 이야기를 품은 인간으로 머물러 있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전개가 느리거나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이야기를 제공하지만 인물의 이야기는 관객이 직접 꺼내야만 한다.


홍콩 무협 영화가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던 시절에 자연은 인간을 위해 소모되고 인간은 이야기를 위해 소모되었다. 거대한 자연은 인간이 받는 충격이나 주는 충격을 표현하기 위한 재료였고, 강하고 약하고 비열하고 슬픈 인간은 이야기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다. <자객 섭은낭>은 인간에게서 자연을 꺼내고 이야기에서 인간을 꺼낸다. 영화는 만드는 것이므로 작위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작위가 아니다. <자객 섭은낭>은 인간과 자연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려 놓는다. 이것은 윤리적이기에 인仁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무위無爲하다.



2023년 9월 17일부터 2023년 9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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