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모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여백으로 만들거나 여백을 만들지 않거나. 전자에 속하는 대표작이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후자의 대표작은 <그레이트 월>이다. <산사나무 아래>는 전자의 방법으로 만들었다. 말하여진 것보다 말하지 못한 것이 많을 때 여백은 또 하나의 주연이다. 말하지 못한 말을 헤아리는 일은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때론 오해를 하기도 하지만 말의 앞면이 아니라 뒷면을 가늠하는 눈은 중요하다. 이 눈이 없다면 말은 의미가 아니라 소리이다.
뭐라고 부르면 좋으냐는 물음에 다른 사람과 같게만 부르지 말아달라는 셋째의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정확한 사랑의 말이다.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 수 있는 말은 돌려 말해도 직진이다. 이런 말은 오히려 직진이 아닌 척하느라 위험에 빠지지만 이 영화에서 아슬아슬한 지점은 없다. 말은 행동보다 앞섰을 때 위험해지지만 셋째는 늘 행동이 앞섰다. 행동이 말보다 빨라서 셋째의 말은 불안하지 않게 들렸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부르지 말아달라는 말은 우리만의 언어를 만들자는 말이다. 사랑의 언어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달콤한 말이 아니라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맥락 없는 말로 만들어진다. 나는 징추가 과연 셋째를 뭐라고 부르게 될지 궁금했다.
징추가 셋째를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부르는 건 종장에서다. 셋째는 늘 그랬듯 정면만을 쳐다보지만 일어설 수 없는 몸은 천장 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앞을 보던 눈이 위를 보면 현실을 놓치고 꿈을 꾼다. 셋째가 천장에 둘이 찍은 사진을 붙여놓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꿈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으로 날아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셋째에게 징추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중첩이었다. 셋째는 징추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할 수 없는 일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런 셋째를 목놓아 부르는 징추의 말은 다름 아닌 “나 징추야”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었다. 희미한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셋째를 향해 징추는 거듭 “나 징추야”라는 말을 연발한다. 이때 징추의 말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셋째를 깨우는 말이다. 징추는 셋째를 징추라고 부르면서 깨운다.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것이다. 셋째는 징추에게 남들과 같이 자신을 부르지만 말아달라고 이야기했다. 세상에 모든 남은 비슷하고 유일하게 다른 것은 나뿐이다. 그러니 징추가 셋째를 자신의 이름으로 부른 것은 정확한 명명이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닌 무엇으로도 너를 부를 수 없다.
징추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연애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징추가 자리를 잡는 2년 간은 만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했고 셋째는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연애와 사랑의 차이는 대상의 유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없어도 가능하지만 너 없이 너와의 연애는 불가능하다. 셋째는 징추를 만나지 않고도 징추와 헤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연애가 아니라 사랑이다. 징추 역시 셋째가 죽은 후에도 매년 셋째의 무덤을 찾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연애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난다. 이것은 특별하다. 대개 연애는 이별로 끝난다.
두 사람을 둘러싼 세상만큼이나 두 사람의 관계는 투명하다. 그들은 붙어 있어도 밀착하지 않고 떨어져 있어도 멀어지지 않는다.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는 끈적거리는 것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때도 그렇다. 셋째와 징추가 만나는 장면마다 그들은 붙어 있어서 가까워지는 대신 사이에 아무것도 두지 않음으로써 가까워진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거리를 없애는 게 아니라 사이를 비우는 일이다. 너와 나 사이에 너와 나 외에 아무것도 없을 때 아무리 멀어도 너는 나에게 선명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에 많은 것을 놓아둔다. 많으면 많을수록 걸리적거려서 상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눈은 앞에 달려 있어서 반추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러니 나를 비추는 가장 깨끗한 거울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보이는 너다. 네가 웃는다면 내가 인생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네가 울고 있다면 내 인생의 슬픔이다. 돌이켜 보건대 그때의 나를 떠올리는 일은 항상 그때의 너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그때 나의 마음은 기억나지 않아도 너의 표정은 기억난다. 그 표정은 시간의 표정이다. 종장에 카메라를 독차지한 사진에서 셋째와 징추는 웃고 있다. 이 웃음은 영원이다.
영화의 제목이 산사나무인데 영화에서 산사나무는 가운데가 아니라 시작과 끝에만 등장한다. 수미상관은 문을 열고 닫는 기법이다. 산사나무는 영화를 열었고 닫았다. 그러니 가운데가 아무리 사랑 이야기라도 산사나무와 무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산사나무는 무엇인가. 이 나무는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다. 식민지 시기에 이 나무 밑에 쌓인 것은 연인의 자취가 아니라 운동가의 목이었다. 산사나무 꽃은 희다. 하지만 이 나무만은 붉은 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이 붉은색은 사랑의 색이 아니라 저항의 색이다.
오래 전 서대문 형무소에 간 적이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입구부터 출구까지의 경로는 수감자로서의 생의 궤적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의 관람객은 입구로 들어와 출구로 나갈 때까지 1세기 전 수감자가 갇히고 고문받다 죽는 과정을 따라간다. 드물게 입구로 다시 나간 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출구로 나갔다고 들었다. 출구에는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풍경으로서의 나무가 아니라 관리되는 나무였고 명패가 붙어 있었다. 그 나무의 이름이 통곡나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독립 투사들은 삶을 버린 후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나 대부분의 독립 투사들에게 삶은 목숨을 걸어도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어서 그들은 출구로 나가기 전 이 나무에서 울었다. 울지 않는 울음이 위대하다면 우는 울음은 당연하다. 나무는 나무색이었는데 팔을 기댈 만한 위치만 하얀색이었다. 그것은 눈물 자국처럼 보였다.
영화 속 산사나무는 통곡나무다. 그런데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면서 명패도 울타리도 없다. 야산에 방치되어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서 있는 나무는 금년 태풍에 부러져도 자연스러울 것처럼 보인다. 피를 머금다 못해 적화가 핀다는 전설은 지근 마을 사람조차 확인한 바 없다. 이쯤되면 영웅수라는 이름은 공허하다 못해 쓴웃음마저 나온다. 그들은 목이 잘린 영웅들은 잊었는가. 아니면 그 영웅들은 필요에 의해 잠시 소환되었을 뿐이고 필요의 끝에서 버려진 것인가. 나무는 마을을 떠난 적 없는 노인이 평생동안 이야기하는 영웅과 악수한 이야기 같다. 그 이야기는 영웅과 노인의 것이 아니라 노인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웅수라는 이름은 나무의 것이다.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생은 앞으로 뻗는다. 그러나 나무가 상기하는 것은 영웅담이 아니라 과거일뿐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뒤로 가는 일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이 적화를 보러 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영웅과 적화는 등 뒤에 있고 다가오는 생은 눈앞에 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자에게 생은 다가오지 않으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셋째가 자신의 유해를 산사나무 아래 묻어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산사나무 아래 묻어달라고 말할 때 셋째가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올 수도 있었던 시간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다. 꼭 천장에 붙인 흑백사진 같다. 죽음은 검은색이지만 추억은 유광이다. 생명은 끝나도 삶은 그 속에서 반짝거린다.
셋째의 유해가 묻힌 산사나무는 이후에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다. 징추는 매년 돌아와서 제사를 지냈는데 물에 잠긴 나무에서도 꽃이 필 거라고 믿었다. 말하자면 변하지 않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기억이다. 이때 기억은 기억하는 시점에서 항상 변곡되는 기억이 아니라 의지로서의 각인이다. 징추는 셋째가 없는 곳에서 셋째를 본다. 그것은 셋째가 그녀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무도 산사나무를 관리하지 않은 이유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변하지 않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기억하려는 의지다. 그러니 실제로 그곳에 피는 것이 백화라고 해도 사람들은 적화를 볼 수 있다. 이 적화의 붉은색은 시간에의 저항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영화 <산사나무 아래>의 변별점은 문장의 삽입이다.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변주하는 세 번째 형식인데, 셋째와 징추의 이야기는 우선 실화이고 그 다음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로 씌였으며 장예모 감독은 이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실화가 말이라면 소설은 글이고 영화는 영상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것은 글이다. 문장을 삽입한 것은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 삽입되는 문장들, 가령 “징추는 학교 공부가 끝날 무렵에 셋째가 도시에서 여자와 교제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나 “징추는 졸업했고 정규 교사직에 채용됐다”는 문장들은 정보를 요약한다. 같은 식이라면 셋째와 징추의 이야기도 “셋째와 징추는 서로 사랑했다”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셋째와 징추의 사랑 이야기는 영상으로 늘린 반면 둘 사이에 있는 세계의 일은 문장으로 줄였다. 덕분에 영화 속에서 셋째와 징추가 함께 등장하지 않는 신은 거의 없다.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촬영기법에 비유한다면 클로즈업이 될 것이다. 클로즈업은 보여주고 싶은 대상은 확장하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대상은 가린다. 영화 <산사나무 아래>가 보여준 것은 두 남녀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이고 가린 것은 당대의 중국이다.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는 문화대혁명의 시대다. 영화는 물론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보여준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농촌으로 강제 학습을 떠나고 사회주의에 반대한 사람들은 강제 연행된다. 영화는 명사를 지우지 않고 부사를 지운다. 농촌은 풍요로운 고향으로 그려지고 감옥에 간 자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지언정 그 억울한 일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는 강제 학습과 강제 연행에서 강제를 지워버렸다.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징추의 시련은 사회 지도층의 무능과 폭정이 아니라 죄지은 자가 감수해야 할 고통으로 그려진다.
징추는 고통의 끝에 선생이 되고 유학까지 다녀온다. 이때 고통은 부당과 차별의 징표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자가 마땅히 치러야 할 시험으로까지 발전한다. 게다가 이 시험은 셋째라는 조력자로 인해 가혹한 폭정에서 진정한 스승으로 둔갑한다. 셋째의 아버지가 당의 고위 간부라는 점에서 당은 시험만 내는 게 아니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산사나무 아래>는 실화를 각색한 영화이다. 영화는 실화를 두 번 각색했다. 하나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의 이야기이다. 전자는 작은 이야기이고 후자는 큰 이야기이나 장예모 감독은 큰 이야기를 작은 이야기 속으로 밀어넣었다. 큰 이야기를 작은 이야기 속에 넣는 방법은 이렇다. 작은 이야기에 묻어있는 큰 이야기를 지운다. 앞서 말한 이 영화의 여백은 두 사람의 사랑이 순수해서만이 아니라 시대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여백이면서 공동이다.
많은 사람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장예모 감독은 <영웅>에서 전체주의와 독재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당과 화해했다. 반대로 <산사나무 아래>는 전체주의와 독재를 가림으로써 당과의 유대를 이어나간다. <영웅>은 드러내고 <산사나무 아래>는 은폐한다. 티끌 한 점 없는 맑은 이야기가 위장막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추해지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다. 사랑 이야기라면 굳이 문화대혁명이 배경인 소설을 각색할 필요는 없었다. 징추와 셋째의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럼에도 굳이 이 소설을 고른 이유는 이 이야기가 문화대혁명 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은 때론 거짓말이다. <산사나무 아래>는 나에게 주동우의 데뷔작인 동시에 말하고 싶어서 만든 영화가 아니라 말하지 않기 위해서 만든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2023년 9월 10일부터 2023년 9월 14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