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데가 없으니까 아파트로 들어왔죠.” 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뉴스가 나옵니다. 이 뉴스는 한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부터 청약이 로또가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대 아파트사를 몽타주로 보여줍니다. 이 몽타주에 의하면 초기 아파트는 선택받은 땅이 아니라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지입니다. 전근대에 마을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갔던 것처럼 평지에서 살 수 없는 근대의 인간은 위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인간은 낮은 곳에 살고 짐승은 높은 곳에 삽니다. 위로 올라가는 생존을 택한 대신 그들이 버린 것은 인간이라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파트는 계급의 상징입니다. 높이는 고립이 아니라 지위가 되었고 이제 인간은 높은 곳에 살수록 인간다워집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야기를 발생시키는 동력은 낙차의 에너지입니다. 갈 곳이 없는 자의 피난처에서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황궁으로 변모하는 아파트의 역사는 가파른 수직 상승의 역사이며, 지진으로 무너지는 아파트의 이야기는 이 수직 상승의 정점에서 떨어지는 아찔한 추락의 서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지진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축마저 뒤집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는 갈 곳 없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마지막 아파트가 아니라 최초의 아파트가 되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아파트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근대 아파트사의 복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가 아니라 이야기라는 거울에 비친 역사입니다.
거울은 형상은 같아도 좌우는 반전됩니다. 영화에서 황궁 아파트는 얼어죽지 않기 위한 피난지에서 술과 고기를 먹으며 노래를 부르는 낙원으로 변모합니다. 이것은 갈 곳 없는 선택지에서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선택지로 바뀌는 역사의 모습을 닮았지만 실제로 아파트 외부의 생존자들에게 그곳은 낙원이 아니라 사람을 잡아먹는 지옥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피난처에서 황궁으로 탈바꿈하는 아파트의 역사는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경제 성장의 서사와 같은 레일을 달립니다. 말하자면 이 역사는 발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말합니다. 그것은 발전의 역사가 아니라 착취의 역사였다고.
먹을 것을 구하러 방범대가 도착한 슈퍼에서 양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총을 든 주인 남자는 결국 방범대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양식은 강탈당합니다. 영탁은 주인 남자를 응징하는 이유를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은 비겁함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가 죽은 이유는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부인의 말처럼 인육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을 살해하고 남은 가족이 생활할 양식마저 모두 가져가 버리는 것은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역사는 피난지에서 황궁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기록을 발전이라는 말하지만 실제 그들이 밟고 올라가는 것은 빼앗긴 자들의 시체입니다. 거울로서의 역사, 이 좌우 반전의 이야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해온 역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되감으면서 역사를 답습하는 대신 반추합니다.
아파트 주민들은 갈 곳 없는 외부인을 바깥으로 쫓아내고 타인의 식량을 착취하는 일이 특수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특수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특수함은 가진 자들만의 말이 됩니다. 요컨대 지진과 함께 세계가 무너졌을 때 함께 무너진 것은 기존의 윤리입니다. 외부인 축출 이후 시스템이 만들어지면서 되찾아가는 일상은 보편성을 회복해 가고 이 보편성은 기존의 윤리를 요구하지만 세계를 재건하고 있는 것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윤리입니다. 가진 자들의 말대로라면 이 새로운 윤리는 일상의 회복과 함께 소멸될 운명이었으나 실제로는 일상을 강제하면서 기존 윤리와 길항합니다.
영화 속에서 새로운 윤리를 대표하는 인물은 영탁입니다. 구조대에서 방범대로 마지막에는 독재자로 변모하는 영탁의 모습은 재난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윤리가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 윤리는 기존 윤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외부인이며 지진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폭력의 소생입니다. 영탁은 실제 황궁아파트 주민이 아니며 그가 이 아파트 주민으로 탈바꿈된 것은 빚쟁이와의 사투 속에서입니다.
영탁은 외부인을 추방하자는 주민 회의에서 대표로 선정되는데 이는 사실상 희생양을 고르기 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탁의 쓸모는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는 외부인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주민이라고 하는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고 그 아이덴티티로 말미암아 대표로서의 상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재난 상황에서 발생한 특수한 윤리, 즉 살기 위해서 폭력은 필요악일 수밖에 없다는 윤리는 생존을 위해 극약 처방으로 도입된 것이지만 이 약이 죽인 것은 외부인만이 아니라 내부의 수치심이기도 합니다. 영탁의 피 묻은 얼굴로 상징되는 이 폭력의 윤리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편만이 아니라 이편 역시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수용되고 이로 말미암아 극약이었던 윤리는 상비약이 됩니다.
폭력의 윤리는 피를 먹고 자랍니다. 폭력은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에 기생해서 생존할 수 있습니다. 외부인을 몰아내고 내부의 시스템을 구축할 때 아파트 내에 신설된 조직은 방범대만이 아닙니다. 의료대를 포함해서 생활 각 부분에 필요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에 가면 의료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는 거의 기능을 상실하고 맙니다. 의료대가 존재하는 것도 방범대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범대는 외부에서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내부에서는 외부인을 축출한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휘두릅니다. 말하자면 아파트를 둘러싼 세계는 폭력이 일상인 세계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 기존의 윤리를 지켜내고자 하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명화입니다. 간호사이자 의료대인 명화는 스스로의 윤리를 온몸으로 표출하는 영탁과 달리 기묘한 딜레마를 품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녀가 상징하는 윤리가 방범대가 가져오는 식량에 의존해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탁의 윤리는 식량을 가져오지만 명화의 윤리는 식량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각각 생존과 삶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영탁은 생존 없이는 삶도 없고 삶을 창조할 수 없는 곳에서는 생존이 삶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반면 명화는 삶이 없는 생존은 무의미한 생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부터 영탁에게 맞서지 못하는 이유는 삶이 생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영탁과 명화 사이에서 윤리적 길항 끝에 죽는 민성이 스테인드글라스 속에서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함으로써 두 가지 윤리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나아가 혼자 남은 명화가 환한 한낮의 햇살 속에서 아파트 밖의 생존 공동체와 윤리적 연대를 맺는다는 점에서 삶은 생존까지 보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도록 바리케이트를 친 황궁 아파트와 외부인이 들어갈 수 있게 무너진 잔해를 계단으로 만든 공동체 중 어느 쪽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인지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립된 세상을 두고 그곳을 낙원이라 찬미하며 외부의 진정한 낙원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고립과 공유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서 방범대가 한강을 건너가기까지 하는 와중에 지근거리에 낯선 이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생각하더라도 다소 작위적인 면이 있습니다. 또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고 물어보는 이에게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대답하는 명화의 말은 그녀를 모든 것을 용서하는 성모의 위치로 격상시키는데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싸움은 명화와 영탁이 본격적으로 대립하는 순간 발생합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잔다르크라면 모를까 성모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며 사건의 핵심 관계자이지 바라보는 외부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단 하루만에 외부인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그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윤리와 윤리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아닌 해프닝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장면에 이르렀을 때 명화라는 인물은 캐릭터가 아니라 감독의 주제의식을 구현하는 소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생동성 대신 전형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캐릭터를 소품으로 쓰게 되면 할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아도 아무래도 영화는 딱딱해지게 됩니다. 말의 분명함을 얻는 대신 화면의 자연스러움을 잃는 것입니다.
다만 명화의 윤리가 생존을 일으킬 수 있는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영탁의 윤리가 단지 생존을 위한 윤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결국 생존의 윤리가 삶의 윤리가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외부인을 몰아내기 위해 마련한 임시 무장은 일상이 되고 외부인을 숨겨준 집은 붉은 낙인이 찍혀 멸시와 따돌림의 대상이 됩니다. 독을 치료하기 위해 독을 삼킴으로써 간신히 생명은 건졌지만 독에 중독됨으로써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아파트 주민들은 폭력을 임시방편이 아닌 윤리로 수용하고 이 윤리로 인해 멍들어 갑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살기 위해 폭력을 들었지만 이제 폭력이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됨으로써 마침내 그들이 저지른 폭력의 방식으로 소멸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민들은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를 두고 “선택”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것은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받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진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지진 이후의 삶을 찾도록 만들었으나 황궁아파트는 무너지지 않음으로써 주민들은 지진 이전의 삶을 찾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지진 이전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은 지진이 아니라 한 채만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2023년 9월 9일부터 2023년 9월 1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