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여정에서 돌아온 프로도가 자신의 책을 쓰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해도 이것은 결국은 호빗의 이야기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유혹과 역경과 싸우며 스스로를 극복하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반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골룸은 원래 호빗이었으나 절대 반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절대 반지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들의 입구는 같습니다.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출발지가 아니라 경로라는 말입니다. 좋은 이야기들은 이렇습니다. 마침표를 찍는 것은 Who가 아니라 How입니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이하 왕의 귀환)은 골룸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호빗 스미골은 가장 친한 친구인 디골과 낚시를 하다가 절대 반지를 발견합니다. 스미골은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존재인 디골을 살해하고 말지요. 그리고 나지막히 중얼거립니다. “나의 보물”. 절대 반지는 스미골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보물과 괴물. 보물은 나를 빛나게 만들고 괴물은 나를 잡아먹습니다. 스미골은 반지로 인해 원래의 자신을 잃고 날것을 먹는 짐승으로 전락했습니다. 요컨대 스미골을 삼키고 골룸을 낳은 것이지요. 그러니 반지는 보물이 아니라 괴물입니다.
골룸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단수(나)가 아니라 복수(우리)로 지칭합니다. 그가 우리인 이유는 호빗을 죽이고 반지를 빼앗으려는 자아와 타인을 죽이고 물건을 갈취해서는 안 된다는 자아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전자를 골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스미골입니다. 말하자면 친구를 사랑하던 호빗 스미골은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은 것입니다. 돌아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길은 있는 것이지요. 단지 위험하고 무서운 길일 따름입니다. 바로 그가 프로도를 안내하고 있는 길과 같습니다.
골룸이 프로도를 안내하는 길은 그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선택한 길이지만 동시에 모르도르로 향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위험하지만 구원에 가장 가까운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프로도만이 아니라 골룸에게도 위험과 구원의 길입니다. 프로도를 죽이고 반지를 되찾으면 스미골은 영원히 사라지겠지만 반지를 용암 속에 넣으면 골룸이 죽고 스미골이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골룸은 누군가를 안내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룸 안의 스미골이 깨어난 것은 아마도 절대 반지를 잃어버린 후로 추측됩니다. 골룸은 반지를 얻기 위해서 친구를 죽였고 그 대가로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스스로를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반지라는 말은 반지를 잃어버리는 순간 자기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자는 이해할 수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일그러진 현재와 달리 과거 속에는 나의 ‘원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지를 잃은 후 스미골이 깨어난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반지를 잃은 골룸은 가족과 친구가 있었던 스미골의 삶을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골룸이 디골에게 반지를 요구하면서 했던 말은 “오늘이 내 생일이잖아”였습니다. 생일은 태어나는 날이고 그 말대로 골룸은 괴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프로도의 삼촌인 빌보 배긴스도 생일날 반지를 끼고 도망가려다가 간달프에게 붙잡히죠.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를 만들듯이 누군가가 자신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골룸이 자신의 생일에 타락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산파로 절대 반지를 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내면의 가능성을 깨우는 대신 외부의 절대적 권위와 매력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반대로 프로도는 똑같이 절대 반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에 유혹당하는 대신 거부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말하자면 프로도는 스미골이 골룸 대신 선택할 수 있었던 자기 자신입니다. 골룸이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프로도를 안내하는 길이 곧 자기 자신을 안내하는 길인 것처럼 프로도에 대한 충성과 반발은 각각 구원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형상을 띠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골룸은 프로도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자신과 골룸으로 변하는 프로도의 모습을 둘 다 보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그가 프로도에게서 반지를 훔치는 대신 그의 삶을 위험과 구원의 길로 이끌면서 그 끝을 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가적인 구조에 기인합니다.
<왕의 귀환>은 전작인 <두 개의 탑>과 같이 공수의 이야기를 갈라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우론을 격퇴시킨 인간의 왕이 다스리던 도시 곤도르의 공방전이 수비라면 모르도르로 향하는 프로도의 여정이 공격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데 어느 쪽이 힘들까요? 아라곤 일행은 로한에서부터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터는 한 번만 실수하면 죽습니다. 반면에 프로도 일행은 위험하고 무섭기는 하지만 매일 전투를 치르면서 생사를 오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위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라곤과 간달프 쪽이 좀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정말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프로도 쪽입니다. 아라곤 일행이 죽을 위험이 없는 캐릭터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결코 죽을 리 없는 인물은 오히려 프로도입니다. 그런데도 아라곤 일행은 열세에 처한 전쟁 속에 있음에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 반면 단지 산길을 걷고 있을 뿐인 프로도는 볼 때마다 마음이 움츠러 들고 불안해집니다.
양 일행의 이런 차이는 존재가 아니라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개인마다 강하기로는 이를 데 없는 아라곤 일행은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들이 적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의 강함에 기대지 않고 동료에게 기댑니다. 아라곤, 간달프, 레골라스, 김리 등 반지원정대는 물론이고 로한의 군대와 곤도르의 병사까지 합세하며 이들은 점점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 갑니다. 이들은 사우론이라는 단일 기준에 맞서면서 종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메리와 에오윈이야말로 이러한 서사의 대표격입니다. 하나는 호빗이고 하나는 여자인 그들은 말하자면 서사 안에서 반쪽 남성에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말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수많은 남성이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었던 나즈굴의 수장을 잡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둘입니다. 나즈굴의 수장은 “남자는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위계질서의 화신인 사우론이 가부장과 남성 권력의 상징이라면 그의 힘을 물려받은 나즈굴은 이 단일 권력의 정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오윈이 “나는 남자가 아니다”라며 칼을 꽂는 모습은 이 세계에는 남성이 아닌 다른 힘도 존재하며 그 힘은 남성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성으로 불린 이 힘의 진짜 이름이 단일성이라면 에오윈과 메리로 대표되는, 아라곤 일행이 만들어낸 이 힘의 이름은 바로 다양성입니다. <반지의 제왕>이 제시하고 지켜내고자 하는 세계란 바로 다양성이 살아 숨쉬는 세계인 것입니다.
반대로 프로도의 여정은 다릅니다. 출중한 무력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다수로 싸우는 아라곤 일행과 달리 아무 힘도 없는 프로도는 오히려 혼자서 싸웁니다. 아라곤 일행의 싸움이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라면 프로도의 싸움은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입니다. 곤도르 공방전이 환한 대낮에 펼쳐지는 것과 다르게 프로도의 여정이 갈수록 어둡고 좁은 길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심연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프로도는 언제 자신을 배신할 지 모르는 골룸이 이끄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어디로 인도할 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길은 불안한 길입니다. 게다가 골룸과 샘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예 사라져 버렸습니다. 불안과 불신이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안과 불신은 꼭 샘과 골룸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프로도에게 있어 가장 불안한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프로도는 절대 반지의 유혹을 견디는 중입니다. 이 유혹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가지면 너는 내가 될 수 있다. 절대 반지는 보는 누구든 사로잡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적인 자기 자신을 상상할 때 그 자신은 결국 ‘나를 사로잡은 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한 여정은 나르시시즘의 여정이며 이 여정은 나르키소스가 그랬듯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절대 반지가 스미골을 사로잡은 뒤 그를 골룸으로 만든 것과 같지요. 즉 절대 반지란 나르시시즘의 극치인 것입니다.
프로도의 여정이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는 여정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면 반지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떠나는 역경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려는 노력입니다. 따라서 프로도의 여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부정의 길항이며 이 길항의 연속이야말로 스스로의 갱신과 쇄신에 다름 아닙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그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반지를 버리지 않고 소유하겠다고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다 왔는데 왜 여기서 하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프로도의 변절은 그럴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자, 바로 밑에 모르도르의 용암이 흐릅니다. 이제 반지를 버리면 끝입니다. 그런데 프로도가 지금까지 이 힘든 여정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절대 반지를 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절대 반지가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갱신하는 힘든 여정을 견디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골룸과는 분명 정반대에서지만 그 역시 절대 반지에 기대어 삶의 의미를 생산해오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절대 반지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과 시련을 견디며 사명감을 갖게 해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창출해내고 있던 대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프로도는 원래 인간도 엘프도 심지어 오크까지 무시하는 호빗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었던 데는 절대 반지의 영향을 무시하고 말하기 어렵지요. 요컨대 절대 반지는 프로도에게 있어 삶의 고통이자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버린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그 반지가 뭐든지 원하는대로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져다주기까지 한다고 유혹하기까지 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한편 한없이 강해지게 만드는 존재를 어떻게 포기하고 스스로 온전해질 것인가. 이것은 <반지의 제왕>이 세 편의 시리즈를 통해 이야기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반지원정대>를 보면 인간과 엘프를 비롯한 각 종족은 서로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은 내부에서도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지요. 내부와 외부의 균열을 통합하고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기 시작하는 것은 사우론의 군대가 그들을 침략하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두 개의 탑>에서는 로한이 엘프와 엔트의 도움을 받아 사루만을 퇴치하고, <왕의 귀환>에서는 곤도르가 인간, 엘프, 드워프에 심지어 죽은 자의 군대까지 불러와 사우론을 막아냅니다. 말하자면 사우론이라는 절대악의 존재는 이 세계를 무력하게 하는 한편 강해지도록 담금질하고 있는 셈이지요. 프로도와 절대반지의 관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세계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 악은 필요한가, 한 존재의 내적 강화를 위해 유혹의 도구는 필요한가라고 필연적으로 묻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우론과 절대 반지는 필요악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정의 존재 없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갱신과 쇄신을 반복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질문의 답은 모르도르의 용암 속에서 프로도와 골룸이 마지막으로 벌인 사투에서 건질 수 있습니다. 변심해서 반지의 주인이 되기로 한 프로도를 찾아 골룸은 그의 손가락을 깨물어 반지를 훔쳐냅니다. 프로도는 검지를 잃고 골룸은 반지를 얻게 되죠. 하지만 격전 끝에 골룸은 반지와 함께 모르도르의 용암으로 추락해 녹아버리고 맙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은 각각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새끼손가락은 약속의 징표로 쓰입니다. 약지는 맹세의 징표로 사용되고 중지는 욕으로, 엄지는 칭찬이나 공격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 와중에 검지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손가락이기도 한데 이 손가락은 바로 방향을 가리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일방적으로 가리키는 일은 명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검지는 ‘방향’과 ‘명령’을 상징하는 손가락입니다.
프로도가 검지에 절대 반지를 끼웠다는 것은 자신이 가는 방향 그리고 자신이 내리는 명령에 절대적인 권위와 힘을 부여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사우론 역시 반지를 검지에 끼고 있었죠. 방향에 권위를 더하는 것은 스스로 내린 판단에 의심의 여지를 없애는 것으로서 맹목을 의미하고, 명령에 힘을 더했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제를 의미합니다. 이 맹목적 강제를 일컬어 폭력이라고 정의합니다. 반지는 착용자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바꾸는데 자기 자신을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가린다는 것은 수치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떳떳하다면 남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폭력은 수치심이 없는 자만이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골룸이 보이지 않는 프로도를 찾아낸 것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겠지요. 골룸 역시 반지를 얻기 위해 친구를 죽인 수치심이 없는 자니까요. 그가 발자국을 통해 프로도의 위치를 알아낸 것은 아무리 보이지 않게 숨어도 모든 것을 숨길 수는 없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그리고 골룸이 그 발자국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가 스스로를 ‘우리’라고 부르는 이유 말입니다.
프로도는 다시 반지를 찾기 위해 골룸과 싸웁니다. 이 수치심이 없는 자들의 싸움 끝에 골룸은 용암으로 추락하고 반지와 함께 사멸하지요. 프로도는 마지막에 정신을 차려서 반지를 골룸과 함께 떨어뜨리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그는 반지를 되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반지를 중심으로 한 빛과 어둠의 대결입니다. 프로도는 절대 반지에 맞서서 스스로를 죽여오며 여기까지 왔고 골룸은 절대 반지를 원해서 친구를 죽이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이 빛과 어둠의 대결은 마지막 순간에 같은 욕망에 사로잡힘으로써 빛도 어둠도 아닌 혼돈이 되고 맙니다.
이 혼돈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욕망에 잠식당한 삶이든 욕망과 싸우는 삶이든 결국에는 우연이 마지막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프로도가 마지막 순간에 반지에 눈이 멀어서 지금까지의 목적을 잊고 골룸과 똑같이 되어버리는 모습은 갑작스러운 것이기도 하면서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허망함 그 자체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최후의 순간에 무엇을 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반지를 놓고 싸우다 프로도와 골룸은 둘 다 절벽 밑으로 떨어집니다. 이때 둘이 각각 잡은 것은 다릅니다. 프로도는 절벽의 모퉁이를 잡았고 골룸은 반지를 잡았습니다. 프로도가 잡은 것은 생이고 골룸이 잡은 것은 욕망입니다. 말하자면 혼돈이 닥쳐와 모든 것을 어지럽히고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어도 결국 끝을 결정하는 것은 순간의 태도가 아니라 이제까지 살아온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생을 위해 욕망과 싸워온 프로도는 절벽의 모퉁이를 붙잡았지만 욕망을 위해 생을 포기한 골룸은 반지를 잡고 스스로를 죽이게 된 것처럼요.
이 혼돈은 모든 것을 무의미로 돌리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혼돈이야말로 <반지의 제왕>이 물었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악은 필요한가. 만약 프로도가 끝내 욕망에 싸워 이기고 반지를 던져버렸다면 그것은 예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프로도를 이렇게 강인한 인물로 키워낸 것은 바로 절대 반지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마지막에 그를 덮친 것은 악이 아니라 혼돈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내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혼돈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혼돈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나쁜지 구분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섞어버리기 때문에 누구나 그 속에서는 정신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스로 믿고 견뎌온 여정이 있다면 그것은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언젠가 혼돈이 닥쳤을 때 길을 잃어버려도 다시 원래 자리로 나를 귀환시켜줄 나의 왕 말입니다.
2023년 9월 2일부터 2023년 9월 5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