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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06. 2023

영화 이야기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을 마침내 보았습니다. 고전답게 질문의 변별력은 없지만 대답의 참신함은 유효합니다.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 묻는 것은 아주 오래된 질문입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은 가능한가. 많은 영화들이 여기에 답을 내려고 도전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건 답이 없는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줄리안은 28살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전남친이자 현 남사친인 마이클과 결혼하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28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마이클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새벽이라도 상관없으니 통화할 수 있을 때 연락 달라고 합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면서 간신히 전화를 걸었더니 들려온 답변은 “나 결혼해”입니다. 참 인생이 이렇지요.


두 사람은 원래 사귀었다가 헤어진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연인의 가능성을 실험해보지 않은 게 아닙니다. 줄리안의 말에 의하면 둘의 연인 관계는 “금방 식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로는 아주 오래갔죠. 헤어질 때 마이클이 했던 이야기도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였습니다. 이만하면 두 사람이 연인인지 친구인지 대강 알만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죠. 마이클의 전화를 받는 순간 줄리안의 내부에 무언가가 깨어납니다. 게다가 그 무언가는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그의 결혼을 막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쿨하게 돌아서는 줄리안입니다. 그녀의 판단을 결정하는 건 감정이라는 말이죠. 줄리안은 당장 마이클에게 날아갑니다.


한 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한 번 테스트 해보기까지 했으면서도 깨어나지 않았던 감정.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는 감정이 왜 마이클의 결혼한다는 말에 깨어난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둘 사이에 그런 감정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어떤 버튼을 눌러야 작동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내게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 뭔가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마 친해지고 사귀기도 했겠지요. 무엇보다 그런 생각이 전혀 없다면 헤어지고 나서 친구로 계속 지낼 수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말하자면 헤어진 후에도 친구로 오랜 시간 지냈다는 것은 두 사람이 진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보다 특별한 어떤 감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헤어지고 친구로 지내는 커플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거의 없다고 생각되는데 가령 있다 해도 서로 마주쳤을 때 민망해하지 않는 정도지 줄리안이나 마이클처럼 열렬하게 붙어다니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남녀가 있다면 주변에서 벌써 그만하고 결혼하라고 성화였겠지요.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도 가장 친한 친구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겉으로는 애정이 없어 보여도 실제로는 서로를 포기할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 가정은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합니다. 남녀 사이에는 친구가 없으므로 감정이 없으면 금방 떨어지는 것이 정상이고 반대로 붙어다닌다면 감정이 있다는 말인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줄리안이 마이클의 결혼을 막기 위해 당장 달려가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마이클이 결혼을 하는 순간 그에게는 공식적인 짝이 생기는 것이므로 줄리안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감정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두 사람은 연인은 아니지만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면 줄리안에게는 분명 마이클과 떨어질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말이고, 마이클이 결혼하면 그 뭔가는 더 이상 보류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이 감정은 지구에 불시착한 무인 우주선과 비슷합니다. 특별하다는 건 알겠는데 뭘 눌러야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맨 처음에는 이것도 눌러보고 저것도 눌러보지만 나중에는 괜히 망가뜨릴까봐 조심스럽게 접근하지요. 마이클의 결혼은 말하자면 우주선의 폐기와 같습니다. 줄리안의 입장에서 보면 이거 움직이지도 않는데 자리 그만 차지하게 폐기시키자고 포크레인으로 한 번 세게 내리찍었는데 갑자기 불이 들어온 셈이지요. 당연히 포크레인 말리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줄리안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감정이 결혼이라는 키워드로 느닷없이 불이 켜진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키워드가 없던 감정을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러니까 줄리안은 마이클과 연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가 좋고 편할 뿐입니다. 하지만 결혼한다고 하니까 그에 대한 상실감이 느닷없이 우정을 사랑으로 둔갑시킨 것이지요. 실제로 두 사람은 헤어진 뒤에 각자 많은 연인을 만났습니다. 만약에 서로가 사랑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었다면 서로가 연인을 만나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면서까지 붙어 있을 이유가 없지요. 계속 솔로로 남아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사실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사랑의 가능성이란 게 있었다면 그리고 두 사람이 그 이름을 사랑으로 명명하기 망설여졌다 치더라도 그 비슷한 감정일지도 모르는 뭔가를 자각하고 있었다면 친구로 지내는 오랜 세월은 서로에게 고통이지 않았을까요? 불이 안 켜지는 우주선이라도 그건 엄청 특별한 것이니까요. 돌멩이랑 별 차이도 없어보이는 운석도 몇십 억씩 하는 세상에 하물며 작동 가능성이 있는 우주선이 불시착했다면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런 우주선이 있었다면 그게 불이 켜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두 사람의 내면에서 시종 스포트라이트가 터졌을 거에요.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마음의 지각 변동 없이 편한 친구로 지내는 게 가능할까요? 그게 된다면 그야말로 정신분석의 신기원입니다.


그러니까 이 관점에서 본다면 줄리안이 마이클의 결혼을 방해하러 가는 건 우주선에 불이 켜진 게 아니라 없던 우주선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마이클의 결혼이 줄리안의 내부에 사랑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친구로 오랜 시간 지냈다는 점에서 어쩌면 씨앗은 땅 속에 묻혀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저절로 발아되는 씨앗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이클의 결혼은 한 순간 강한 햇볕과 충분한 수분을 공급함으로써 씨앗을 단번에 자라게 만들었습니다. 확실히 그런 경우들이 있긴 합니다. 사랑은 대나무 같은 것이어서 하룻밤 사이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니까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면 줄리안과 마이클이 이별한 후에도 헤어지지 않은 건 사랑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날아가는 줄리안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지를 약혼자로 소개했을 때 질투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마이클의 모습에서도 이런 점은 잘 드러나지요. 하지만 남녀 사이에 친구가 존재한다면 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은 촌극에 불과합니다. 영화 속에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각각 뒷받침해줄 증거가 수두룩합니다. 그러니 어느 쪽이 맞는지에 대해 묻는 건 별로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해야 하는가. 아니 그 질문에 답변하도록 강요받아야 하는가.


힌트는 영화 초반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줄리안은 28살까지 미혼이면 마이클과 결혼하자고 농담 비슷하게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약속이 아니라 ‘나이’와 ‘결혼’입니다. 결혼하고 싶으면 그냥 결혼하면 되지 왜 굳이 28살을 한계선으로 정한 걸까요. 추측하건대 이렇습니다. 1997년에 미국에서 여성의 결혼적령기는 대략 26~27살 정도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28살을 넘게 되면 노처녀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노처녀라는 말은 결혼이 통과의례인 사회에서 발생합니다. 요컨대 이 영화의 배경에서 28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여자는 낙오자 혹은 결여자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28살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그때 결혼하자고 했겠죠.


결혼이 사회가 요구하는 개인의 의무라면 남녀의 만남은 기본적으로 결혼을 전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28살이라는 구체적인 커트라인까지 있다면 어릴 때는 그냥 재미로 만나더라도 28살에 가까워질수록 남녀의 만남은 결혼을 위한 만남으로 목적화되겠지요. 이런 환경에서는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을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사회에서 28살 이전의 남녀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는 결혼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다는 관념 하에 놓여 있죠.


바꿔말하면 결혼을 위해서는 남녀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조건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사랑은 엄밀하게 말해 그 스펙트럼의 일부입니다. 물론 꽤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스펙트럼이지 주식처럼 정확하게 몇 주라고 못박혀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처럼 보여도 경계에 있는 것은 인간적인 호감일 수도 있고 반대로 단순한 호감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랑에 포함된 영역이 더 넓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 몸만을 원하는 경우도 있을 거고 거꾸로 정신적인 교감만을 원하는 쪽도 있겠지요. 종류는 천차만별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한다면 이 스펙트럼 내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지분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좋아해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면 좋겠는데 물론 그런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참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건 28살이라는 커트라인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애매하고 넓은 스펙트럼 중에서 정확히 사랑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결혼을 숙제로 내미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사랑의 강박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2차 성징 후에 남녀의 생물학적 구분이 확실해진 다음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은 흔히 첫사랑의 시절로 비유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누굴 좋아하는 마음은 사춘기 시절 이전에도 얼마든지 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걸 두고 사랑이 아니라고 못박아야 할 이유는 없지요.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cm>에서도 세 개의 에피소드 중에 가장 절절한 사랑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등장 인물들이 가장 어렸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성징 후에 발생하는 남녀의 관심에 한정지어서 사랑의 의미를 한정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때부터 남녀의 사랑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란 남녀의 결합으로 인한 가정의 탄생 가능성입니다. 결혼을 요구하는 사회는 가족을 요구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고 가족을 요구하는 사회는 곧 인구의 증가 및 관리를 개개의 가구에게 위임하는 형태의 사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대표적인 그런 나라지요.


말하자면 인구의 증가 및 관리를 개별 가구에 위임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회에서는 결혼이 아닌 방식으로 생기는 ‘통제할 수 없는 인구’를 반기지 않습니다. 반대로 결혼을 통해 생기는 ‘통제 가능한 인구’는 환영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에게 결혼을 숙제로 내주고 남녀는 그 숙제를 하기 위해 서로 간에 발생하는 감정을 어떻게든 사랑으로 걸러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됩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달리 말하면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을 억지로 압축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코미디의 형식으로 이런 결혼의 요구와 그에 따른 사랑의 강박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제까지 친구로 잘 지내던 줄리안이 느닷없이 사랑을 각성하고 누군가의 행복을 방해하기 위해 악역이 되는 모습은 사랑을 강요하는 사회가 한 개인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주위에 어떤 혼란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줄리안이 게이인 조지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결국 ‘사랑이 없는 남녀 관계’이라고 할 수 있죠.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무궁한 감정의 스펙트럼이다 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이 영화가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줄리안이 스스로를 내던져가면서 마이클과 킴벌리의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영화가 거부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사랑의 강박입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건 축복받을 일입니다. 영화 <우리 집에 왜 왔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일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적 승인까지 얻는 건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 중 하나지요. 단지 어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어떤 행복을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뿐입니다.



2023년 8월 27일부터 2023년 9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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