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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02. 2023

영화 이야기 <반지의 제왕:두 개의 탑>

부제에 해당하는 두 개의 탑이 가리키는 것은 이센가드에 있는 사루만의 탑과 모르도르에 있는 사우론의 탑입니다. 사루만은 사우론에게 복속당한 존재이므로 이 두 개의 탑은 물리적으로는 두 개의 탑이지만 상징적으로는 하나의 탑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제를 두 개의 탑으로 명명한 이유는 탑의 속성이 아니라 역할에 기인합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일종의 게임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게임에는 진영이 있고 각 진영에는 공수가 있습니다. 어둠의 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우론의 편에서 공격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루만입니다. 이센가드의 탑에서 사루만은 숲을 태워 엘프와 엔트의 근거지를 없애고 군대를 길러 인간의 땅을 정복합니다. 반대로 사우론은 나즈굴을 통해 프로도의 반지를 훔치려는 것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우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반지가 모르도르의 용암에 빠지는 것을 막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개의 탑 중에서 공격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루만의 탑이고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우론의 탑입니다. 게임에서 공수를 분리한 이유는 승리를 얻기 위한 방법이 두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진영에서 승리란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방법에는 전 대륙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방법과 사우론이 반지를 되찾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우론이 전 병력을 보내 대륙을 공격하거나 혹은 모르도르를 수비하지 않는 이유는 승리를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실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빛의 진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막아내야 합니다. 빛의 진영에도 공수가 있습니다. 간달프와 아라곤, 레골라스와 김리로 대표되는 무력은 사루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수비입니다. 엔트와 함께 이센가드를 직격하는 메리와 피핀 그리고 모르도르의 용암에 반지를 던지기 위해 운반 중인 프로도와 샘은 공격에 해당합니다. 로한이 헬름 협곡 전투에서 사루만의 군대를 막아내고 나즈굴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프로도가 모르도르의 검은 문까지 도착한 것은 얼핏 어둠의 세력이 훨씬 막강해 보여도 실제로는 두 진영의 공수 교차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어둠의 진영과 다르게 빛의 진영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어둠의 진영은 사우론이라는 절대 군주 아래 일관된 체계와 목표를 가지고 있는 반면 빛의 세력은 인간, 엘프, 드워프 등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집단의 연합으로 되어 있어 통일된 힘을 끌어내지 못합니다. 당면한 헬름 협곡 전투만 보더라도 로한의 왕은 같은 인간 왕국인 곤도르나 엘프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도와줄 리 만무하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어둠의 진영은 세상을 지배한다는 목적 아래 하나가 된 반면 빛의 진영은 세상을 구원한다는 목적 아래 서로를 불신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둠의 진영에 비해 빛의 진영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이 불신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어둠의 진영에게는 장점이고 빛의 진영에게는 단점인 것만 것 아닙니다. 어둠의 진영이 지닌 통일성은 절대 군주에 대한 복종과 맹신에서 옵니다. 사루만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사우론의 뜻에 반해서 규합된 것이 아니라 사우론의 힘에 의해서 규합된 것입니다.


반대로 빛의 진영이 가진 불신은 거꾸로 서로의 뜻과 지향점을 존중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진영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곤도르와 로한은 다르고 인간과 엘프는 다르다. 이 말은 곤도르의 정체성과 로한의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며 종족 간의 다름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의 진영이 가진 불신은 차이를 ‘존중’하는데서 오고 어둠의 진영이 가진 통일성은 차이를 ‘제압’하는데서 생겨납니다. 그러니 어둠의 진영과 달리 빛의 진영은 이 차이를 넘어서 모두를 하나로 통일할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과제는 짐이지만 그것을 푸는 순간 그들은 더 강해집니다.


실제로 멸망 직전이었던 로한을 구해낸 것은 엘프의 군대와 로한의 기마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력의 덧셈이 아니라 차이를 넘은 통합의 가능성입니다. 불멸의 생을 사는 엘프가 필멸의 인간이 필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불멸을 희생하는 모습은 필멸을 이유로 아라곤과 아르웬의 결합을 막은 엘프의 원칙을 초월하고, 왕으로부터 배신당한 군대가 왕을 위해 진격하는 모습은 더 큰 의미를 위해 내부의 상처를 봉합하는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 원칙의 초월과 신뢰의 회복은 빛의 진영의 약점인 불신을 극복함으로써 승리를 꿈꾸게 합니다. 말하자면 승리란 무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극복으로 얻어내는 것입니다.


빛의 진영의 공격대는 마법사인 간달프도 아니고 전사인 아라곤도 아닙니다. 이 진영에서 모르도르의 용암으로 진격하고 있는 것은 가장 무능력한 호빗입니다. 이 호빗이 가진 최대의 능력은 바로 반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인내심이나 이번 편을 보면 그 인내심조차 점차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상대의 수비가 세계관에서 가장 막강한 절대 군주라는 점을 떠올리면 공수의 불균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도 간달프의 말처럼 “희망은 저쪽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샘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알아요. 처음부터 잘못됐어요. 이런 데 오는 게 아니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왔어요. 아주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처럼요. 암흑과 위험이 가득한 이야기요. 마지막이 걱정돼서 결말을 알기 싫었던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수없이 많은 나쁜 일이 일어나 이제 세상은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이토록 두려운 시간조차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에요. 암흑은 사라지죠. 새 날이 밝을 테니까요. 나리께서 기억하는 옛날 이야기에는 큰 뜻이 남겨 있어요. 어릴 적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젠 알 수 있어요. 옛날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거에요. 끝까지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것 때문이었죠. 바로 이 세상에 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요."


샘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고통’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암흑과 위험이 가득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고통뿐인 이야기가 아니라 ‘새 날’까지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뭔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와서는 안 될 곳’에 와버렸지만 그로 인해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앞으로 흐르기 때문에 샤이어에 있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간다면 ‘두려운 시간’ 역시 지나갈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이야기가 앞으로 전진하는 이유는 단지 ‘암흑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은 다름 아닌 ‘세상에 선이 존재한다는 믿음’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어둠의 힘에 대항하는 방법은 어둠의 힘에 필적하는 힘이 아니라 어둠의 힘에도 주눅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올바른 믿음이야말로 수많은 두려운 시간을 끊임없이 ‘극복’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승리로 이끌 거라는 말이지요. 빛의 진영의 공격대가 강한 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나약한 호빗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승리는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극복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며, 무언가를 극복하는 여정에 가장 필요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하며 그로 인해 이 이야기는 한낱 영웅담이 아니라 ‘위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에서 세계의 운명은 어둠의 진영과 빛의 진영 중 누가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카메라는 때때로 이 세계를 원경에서 잡는데 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눈이 쌓인 채 세계를 양분한 산맥이거나 끝이 없는 평원 혹은 영원에 가까운 하늘입니다. 원경이 보여주는 이 거대한 세계에 비하면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두 개의 탑조차도 소품처럼 보입니다. 빛의 진영이든 어둠의 진영이든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세계의 모습은 다소 바뀌겠지만 세계 자체는 전혀 흔들릴 것 같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승리와 패배는 이야기의 결말일 뿐 패배한다고 하여 이야기 자체가 소멸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뿐입니다. 예전에 <슈가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양준일이라는 가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네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거야.” 같은 말을 프로도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반지는 끝내 모르도르의 용암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역시 같은 말을 우리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더라도 올바른 방향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끝내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



2023년 8월 26일부터 2023년 8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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