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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27. 2023

영화 이야기 <달짝지근해: 7510>

돌려 말한다 해도 이 이야기는 결국 과자를 먹던 남자가 밥을 먹는 이야기입니다. 과자와 밥은 비슷합니다. 탄수화물이고 식사이며 여러 가지 음식과 잘 어울리고 많이 먹으면 좋지 않습니다. 시리얼로 밥을 대신하는 문화는 이미 오래 전에 퍼졌고 지금은 쌀로 만든 과자부터 설탕을 넣지 않은 과자까지 나와서 밥과 과자를 구분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어떤 과자는 숫제 어떤 밥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과 과자는 다릅니다. 밥에는 쌀이 들어 있지만 과자에는 그 맛을 내는 원재료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두부 과자에는 두부가 없고 새우 과자에는 새우가 없습니다. 두부 과자가 두부 맛을 내는 것은 혀가 두부 맛을 떠올리게 만드는 첨가물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밥은 쌀을 익도록 하는 것이지만 과자는 맛을 흉내내도록 합니다. 쓰고 보니 이것은 삶과 생존의 비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삶은 사람이 익어가는 일이지만 생존은 삶을 흉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달짝지근해: 7510>은 과자 같은 주인공을 제시합니다. 치호는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씻고 같은 시간에 출근합니다. 술을 마시고 지각을 하거나 회사에서 실수를 저지른 적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히트 상품을 만들어 이달의 우수 사원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관리가 철저한 남자의 삶이 아니라 쳇바퀴 도는 일상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본질은 이동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삶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삶의 무의미를 걱정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자기 자신만 멈춰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멈추는 것은 방향을 잃었을 때입니다. 치호에게는 삶의 방향이 없습니다. 그가 정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향해 다트를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일상은 삶을 상실한 채 멈춰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과자 같은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표면은 매끄럽고 질감은 단단해 보이지만 그 실감은 퍼석하고 두께는 한 입에 부서질 만큼 얇습니다. 치호의 삶을 수식하는 말은 정확이 아니라 폐쇄에 가깝습니다.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삶. 말하자면 그는 포장된 채 박스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열어보면 부스러진 가루만 가득합니다.


치호가 자기 자신을 유폐시킨 이유는 영화 속에 많이 등장합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유년의 사고를 당했고 그로 인해 지능이 저하됩니다. 역시 그로 인해 주위의 괴롭힘에 시달리게 되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형 밖에 없으므로 형은 그에게 세상이 됩니다. 유년의 사고는 하나뿐인 엄마를 잃어버리게 만들었으므로 말하자면 치호는 가족의 상실로 인해 사회를 상실하고 세상과 자신 사이에 놓인 문을 닫은 채 형이라는 작은 창문으로만 바깥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가족의 상실이 곧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포장을 하고 있어도 그 내용물은 가족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가족 드라마는 훼손된 가족의 재탄생을 이야기합니다. 이 영화에서 치호는 고아이고 유일한 가족은 도박꾼에 전과까지 있는 형이며, 일영 역시 미혼모에 딸과 함께 생활한다는 점에서 두 주인공은 훼손된 가족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가족 드라마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완성된 가족의 형태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로 구성된 오래된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생활하는 치호나 딸과 둘이 사는 일영의 모습에서 결핍과 불안을 떠올리게 만들고 이를 두 사람의 결합으로 해소하는 방식은 가족 드라마 중에서도 꽤나 협소한 가족 드라마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1인 가구나 2인 가구가 점점 늘어가는 세태에 비춰보면 이것은 이상이라기보다는 회한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걸어갈 길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쪽이라고 해야겠지요.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어떤 원숙함은 주인공들의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돌아보는 눈길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느끼는 ‘무해함’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훼손된 가족의 불안정성이 아니라 재탄생한 가족의 안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치호와 일영이 만나서 결합하는 과정은 단순히 둘만의 로맨스로 끝나지 않습니다. 동생에게 기생하던 석호는 자립하고 자기만 아는 진주는 성숙하며, 치호를 이용하려던 병훈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도박꾼이었던 은숙은 개과천선합니다. 말하자면 치호와 일영이 만나는 일이 두 사람의 개인적인 변화만을 부른 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을 윤리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사회적인 변화까지 이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파급력이 얼마나 강한지 심지어 일영을 괴롭히기 위해 나타난 전남편은 느닷없는 사고로 퇴장하기까지 하지요.


가족의 안정이 사회의 안정을 만든다는 주제는 공익광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공익이란 이름 그대로 최대 다수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이혼률이 높은 세상에서 남녀 간의 결합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것이 행복을 상상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삶은 어떻게 생각하면 시간을 채우는 일이고, 상상은 시간을 채우는 아주 좋은 원료입니다. 일하는 금요일이 노는 일요일보다 좋은 이유는 주말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영화 속에서 치호가 가장 큰 변화를 이루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상상하기를 멈추고 누군가를 상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영과 결별한 후 치호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달리기는 소진하는 것입니다. 과자로 만든 세상처럼 매끈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 치호에게는 소진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영을 만난 후 그에게는 밤이 늦도록 달려도 마르지 않고 멈춰선 후에도 한참을 울어야만 진정시킬 수 있는 ‘물기’가 생기게 됩니다. 사고로 인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치호에게 자신의 삶은 두부가 없는 두부 과자 같았겠지요. 아무리 물을 주어도 과자에서 두부가 자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눅눅해지기만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치호는 가슴을 적시는 일 대신 가슴을 마르게 하는 일로 생을 채운 것입니다. 하지만 일영을 만나고 치호는 생이 과자가 아닌 쌀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로 인해 생긴 가슴 속의 물기로 마침내 그는 과자를 제조하는 대신 밥을 짓게 되는 것이지요.


가족 드라마라고 말했지만 저는 치호가 달리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 ‘넘침’이야말로 그가 텅 빈 가슴을 사랑으로 가득 채웠다는 증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세상을 쳐다보는 것조차 곁눈질해야만 했던 치호가 누군가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은 분명 ‘과장’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자리에 멈춰있던 남자에게 구원의 여신이 나타나는 일도, 사랑이 한 사람을 온전히 바꾸는 일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대신 누군가를 안아주는 상상을 해야만 한다면 가급적 팔을 크게 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달짝지근해: 7510>은 팔짱을 풀게 하는 영화입니다.



2023년 8월 22일부터 2023년 8월 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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