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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25. 2023

영화 이야기 <반지의 제왕:반지 원정대>

톨킨이 쓰고 피터 잭슨이 구현한 <반지의 제왕>은 어둠의 왕 사우론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영화 속에서 사우론은 각 종족을 통치할 수 있는 19개의 반지와 그 반지들을 지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절대 반지를 만들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려 하지요. 반지는 힘입니다. 사우론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둠의 왕이어서가 아니라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우론이 가지고 있는 힘은 ‘무력’입니다. 고블린과 오크, 트롤로 구성된 ‘군대’와 이센가드의 ‘마법’이 가리키는 것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며, 이 힘은 공포와 두려움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수단’입니다. 사우론이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추측하건대 그 통치 방식은 잔인하고 폭력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자는 비윤리적인 목적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것. 사우론이 어둠의 제왕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타락한 목적을 가진 강한 자에 맞서 올바른 목적을 가진 약한 자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이것이 <반지의 제왕>이 던지는 물음이고 등장인물 중 가장 약한 호빗이 반지의 운반자로 지정된 이유입니다. 프로도가 반지의 운반자로 결정된 것은 첫째 그가 반지의 유혹을 상대적으로 잘 견뎌내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반지는 사우론의 분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사우론에게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자신을 소유한 사람을 유혹에 빠뜨려서 어둠(사우론)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요. 반지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은 운반자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두 번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프로도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는 반지의 유혹에 빠져도 세상을 위협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가 유혹에 빠진다면 그건 세상의 위협이 아니라 개인의 타락입니다. 전자에 대응하는 인물이 사우론이라면 후자에 대응하는 인물은 골룸입니다. 골룸은 아무리 오래 반지를 가지고 있어도 세상을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만이 타락할 뿐입니다. 아무런 무력도 권력도 정치력도 없는 호빗이 반지를 맡는데 엘프와 드워프, 인간의 수장들이 반대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는 골룸이 될 지언정 사우론이 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프로도가 가진 두 가지 특성을 조합하면 ‘윤리적인 무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윤리적은 무능력’은 낙원의 것입니다. 아라곤이나 보로미르 그리고 김리나 레골라스가 갖춘 전투능력은 취미로 갈고 닦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전투력은 생존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프로도는 샤이어에서 태어났습니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기후는 온화하며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 <반지의 제왕>의 배경인 중간계는 샤이어라는 점에서 출발해 모르도르라는 점으로 끝나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의 비유이며 천국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는 반면 지옥에서는 삶 자체가 투쟁입니다. 그래서 샤이어에는 지도자가 없는 반면 모르도르의 지도자는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샤이어에서 모르도르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옥을 탈출해 천국으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천국을 나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야기지요. 1편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이하 <반지 원정대>)의 핵심적인 사건은 드워프의 땅인 모리아 광산에서 일어납니다. 이곳에서 프로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면에서 <반지 원정대>는 추락의 서사입니다. 프로도는 풍요로운 자신의 땅을 나오면서 원래 누리던 생활을 ‘상실’하고 어둠의 지하로 ‘하강’하며 마지막에는 모든 동료를 잃고 샘과 단둘이 남아 가장 위험한 상태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이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이야기가 꼭 절망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원정이라는 것은 출발점에서 도착점으로 향하는 것이고 이때 두 개의 점 사이에 흐르는 것은 시간입니다. 원정의 출발점인 샤이어의 특징은 무시간성입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분할하는 현재의 시간 관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입니다. 도시의 탄생 이전에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어부와 농부, 광부, 대장장이 등 각각의 직업군은 직업에 따라 다른 시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도시가 발생하고 노동자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동일한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회 현상이 발생했고 이 현상에 의해 모두에게 균질한 시간의 출현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균질한 시간은 강박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몇 시에 일어나야 하고 몇 시까지 씻어야 하며 몇 시까지 나가고 몇 시까지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목적입니다. 현대의 기준으로만 봐도 학교를 다녀야 하는 나이가 있고 취업,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가 있습니다. 그 나이보다 이르면 빠르다고 하고 늦으면 느리다고 합니다.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격언은 그 자체로 해야 할 일을 연상시킵니다. 우리는 매일 시간을 따라잡아야만 합니다.


샤이어가 가진 낙원성은 어쩌면 이런 무시간성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샤이어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샤이어의 주민들에게는 강박이 없습니다. 간달프와 처음 조우하던 장면에서 프로도는 한창 밝은 시간에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말은 성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빌보 배긴스는 100살이 넘은 나이에도 모험을 떠날 생각을 하고 프로도의 친구들은 서리를 하다가 도망칩니다. 호빗은 그들이 체격과 나이가 보여주듯이 무시간성 속에서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샤이어를 출발하는 순간 프로도가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시간성입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해야 할 일을 안겨줍니다. 프로도는 ‘사우론에게 붙잡히는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절대 반지를 모르도르에 던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도가 가장 먼저 쫓기기 시작하는 것은 9인의 나즈굴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시간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 프로도는 샤이어에 있을 때와 다르게 뛰고 구르고 다치고 나아갑니다. 이 여정이 절대 반지를 파괴하려는 윤리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프로도가 도망치는 것은 시간이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입니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사는 것을 되는 대로 산다고 합니다. 되는 대로 살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 살아갈 때 인간은 자랍니다. 샤이어를 나오는 순간 프로도의 시간은 흐르기 시작하고 그 시간은 그를 지옥의 밑바닥으로 추락시키지만 한편으로 그 시간은 이제까지 ‘자라지 않는 아이’를 ‘성장’시키기도 하는 셈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프로도가 <반지 원정대> 마지막에는 홀로 떠날 것을 결심하는 것은 그가 보호받는 인물에서 스스로 책임지는 인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절대 반지의 힘을 빌어 노화를 막아냈던 빌보 배긴스와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빌보는 윤리적 대의를 이루기 위해 시간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절대 반지의 힘을 이용해 시간을 막아냈습니다.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시간을 사용했기 때문에 절대 반지가 떠난 순간 그를 덮치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노화’입니다. 엘프 마을 리븐델에서 만난 빌보가 짧은 시간에 그토록 늙어버린 것은 스스로 시간에게 잡히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판타지는 신화와 비슷하게 여겨지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화에 맞서기도 합니다. <반지의 제왕>은 영어권의 판타지이고 영어권 신화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도 구약의 창세 신화일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이브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떨어집니다. 이른바 낙원에서 지상으로 추락한 것이고 이를 두고 기독교에서는 금기를 범한 죄의 대가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죄는 예수라는 영웅의 등장으로 소멸하는 대신 인류는 기독교 세계의 영웅에게 삶이라는 빚을 지고 그가 만든 윤리를 내재해야 하는 숙명을 껴안게 되지요.


<반지 원정대>는 창세 신화와 동일하게 낙원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한 발 더 나아가 목적지를 지옥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추락을 죄의 대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반지 원정대>에서 추락은 성장을 위한 과정이며 그들은 다시 낙원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을 경유해야만 합니다. 창세 신화가 신에 의해 낙원을 잃어버린 이야기라면, <반지 원정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낙원을 회복하려고 하는 ‘자라려고 하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전자가 신의 의지라면 후자는 피조물의 의지이며 그런 면에서 판타지는 신화, 즉 신의 이야기에 대항하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지 원정대>에서 프로도를 샤이어의 바깥으로 나아게 만든 것은 두 명입니다. 하나는 어둠의 왕인 사우론이고 다른 하나는 간달프입니다. 사우론이 프로도에게 내리는 것은 죽음이고 간달프가 내리는 것은 삶입니다. 프로도는 죽음을 피해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는 죽음(모르도르)이며 이 죽음을 넘어야 삶(샤이어)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죽음과 삶의 순환을 그리는 무한의 굴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굴레의 이름을 ‘운명’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프로도는 모리아의 광산에서 간달프를 잃고 아나고나스 전투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모든 일행과 떨어집니다. 그는 여정의 중간에서 인도자와 보호자를 잃었습니다. 요컨대 운명은 아나고나스에 이르러 프로도에게 “여기까지” 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 너머로 향하는 길은 운명을 따르는 길이 아니라 개척하는 길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반지를 되돌려주러 가는 이야기지만 끝내는 삶을 되찾는 이야기입니다.



2023년 8월 19일부터 2023년 8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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