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인종 차별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1964년 가을에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1964년 여름에 미국은 민권법을 승인합니다. 공공장소는 물론이고 학교나 교회 등 어디서도 인종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죠. 공공연한 비밀이 금기로 명문화된 겁니다. 일상이 비일상으로 바뀔 때 히스테리라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 영화가 가을에 그리고 한 흑인 학생으로부터 발화하는 이유는 이 히스테리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맞았습니다. 다만 이 히스테리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것이 아니라 백인들의 것입니다. 영화 <다우트>는 제목처럼 내부의 균열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성 니콜라스 학교에 유일한 흑인 학생 도널드 밀러는 사제관의 호출을 받고 다녀온 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담임 교사인 제임스 수녀의 말에 의하면 입에서 술냄새도 났습니다. 교장인 알로이시스 수녀는 밀러를 호출한 플린 사제를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저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아니냐. 하지만 플린 신부는 완강히 부인하고 두 사람의 대립은 격화됩니다.
이 영화는 제임스 수녀가 말하는 밀러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관객이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 것입니다. 관객은 밀러의 술냄새도 맡을 수 없고 ‘평소와 다른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관객이 의지할 것은 오로지 싸움의 당사자인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수녀가 각각 주장하는 내용뿐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얼핏 법정 영화와도 닮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판사는 없고 배심원뿐입니다. 배심원에 해당하는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말할 때는 플린 신부에게 설득되고 알로이시스 수녀가 말할 때는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동조합니다. 중립적 권위를 가진 현실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판단 유예의 상태에서 사건은 종결됩니다.
제임스 수녀가 끝내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주장을 좇아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은폐된 사건을 들춰냄으로써 마치 진실의 자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이름의 빈자리뿐입니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밀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궁금해하도록 유도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관객이 보는 것은 진실 아니라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뿐입니다. 진실이 객관적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빈 자리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생기고 수녀에게는 ‘규정을 위반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 ‘침묵’과 ‘위반’은 그들 각자가 살아온 삶을 일부 부정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진실의 빈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경우 삶의 전부를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얼핏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불리해 보입니다. 플린 신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반면 알로이시스 수녀에게는 정황과 추측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플린 신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관객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알로이시스 수녀와 마찬가지로 주장이 됩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사실관계를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주장을 놓고 싸우는 것이며 그래서 이 두 개의 주장은 진실을 가리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실을 차지하기 위한 말이 됩니다.
플린 신부는 성과 속의 뚜렷한 구분을 중화하려고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그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으며”, “친근한 교회”야 말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농담을 즐겨하고 긴장을 풀어주려고 애쓰며 신부란 “모든 여자들에게 거절당했을 때 최후의 보루”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알로이시스 수녀는 규율과 율법 그리고 법칙과 질서를 강조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사소한 결함도 놓치지 않으며 엄하고 두려운 훈육이야말로 가톨릭 교회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플린 신부는 교회의 수장이고 알로이시스 수녀는 학교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학교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는 학교가 되어야 하는가의 입장 차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두 사람이 각자 지향하는 방향에 서로가 장애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밀러의 사건으로 발화했지만 사실상 인화 물질은 두 사람 사이의 이질성입니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규칙을 위반하면서까지 플린 신부를 내쫓으려고 하는 이유는 밀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밀러 부인과의 대화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밀러를 퇴학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습니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지키려고 하는 대상은 질서로 구축된 교회이며 나쁘게 말하면 밀러는 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이것을 동기로 삼아 목적을 관철한다는 점에서는 플린 신부도 같습니다. 그 역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알로이시스 수녀를 해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도널드 밀러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내밀한 대립 관계가 표층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도널드 밀러라는 존재가 단순히 갈등을 표면화하는 발화점에 한정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이냐를 둘러싼 이번 싸움은 진위 여부를 떠나서 두 사람의 도덕성과 리더쉽 그리고 앞으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까지 결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헤게모니 싸움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 싸움은 엄격한 교회이냐 친근한 교회이냐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본격화하는데 왜 하필 흑인 소년이 동원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널드 밀러는 단순히 흑인 소년이 아닙니다. 그는 흑인인 동시에 동성애자이며 가정 폭력에 휩싸인 하층민입니다. 영화에서는 밀러가 성 니콜라스 학교로 전학온 시기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 시기는 1964년 가을로 추측됩니다. 민권법의 공표 이후에 공공장소와 교육기관에서 인종 차별을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도널드 밀러는 민권법이 공표됭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처음 이 가톨릭 학교로 전학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컨대 백인 사회로 이루어진 가톨릭 교회는 1964년 가을에 흑인이자 동성애자이고 하층민인 한 소년을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도널드 밀러가 가진 특성을 종합하면 그의 다른 이름은 소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널드 밀러 출현 이전에 알력이 있어도 그럭저럭 돌아가던 학교가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1964년 이후 소수자가 다수 사회에 편입되면서 나타난 다수 사회 내부의 히스테리 증상을 가리킵니다.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의 대립은 단순한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방향의 대두이며 이 방향이 극심한 대립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소수자의 출현에 의해서인 것입니다.
플린 신부는 밀러가 술을 마셨지만 감싸주려는 의도에서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소수자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우리는 그를 품어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알로이시스 수녀는 우리 중 누군가가 밀러에게 술을 먹였다고 말합니다. 다수 사회 내부에 음험한 욕망이 소수자를 집단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이 음험한 욕망이 창궐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하는 것이 그녀가 말하는 해결책입니다. 주장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이상 반응과 수용론입니다. 전자는 그들에게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고 후자는 우리에게 결함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중에 무엇이 진실인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소수자 출현에 의한 다수 집단 내부의 히스테리 반응일뿐입니다.
내부의 히스테리는 소화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외부로 돌출됩니다. 그러나 밀러에게 히스테릭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플린 신부나 알로이시스 수녀가 아니라 제임스 수녀입니다. 집단의 균형이 붕괴하는 시점에 히스테리에 가장 심하게 노출이 되는 것은 전위적이거나 보수적인 리더가 아니라 집단에 속한 일반적인 ‘선한 사람’인 것입니다. 제임스 수녀는 누가 보아도 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착함이 아니라 윤리적인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소수자의 출현으로 집단 내부의 윤리가 흔들리는 시점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기존 윤리를 준수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임스 수녀는 이 가상 법원의 배심원입니다. 그녀는 판사가 아니므로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낼 능력, 즉 어떤 것이 진실인지 규정할 권위는 없지만 무엇을 진실로 선택하고 받아들일지 정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플린 신부나 알로이시스 수녀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면 제임스 수녀는 어떤 방향으로 갈 지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선택에 의해 새로운 방향은 새로운 윤리가 됩니다. 영화 속에서 플린 신부는 패배하지만 승진하고 알로이시스 수녀는 승리하지만 정신의 균형을 잃습니다. 이것은 결함이 있는 소수자를 포용한다는 정책이 사회적 공인을 얻는 한편 내부의 균열은 봉합되지 못한 채 오히려 갈등은 심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제임스 수녀가 남는 대상은 플린 신부가 아닌 알로이시스 수녀인 것입니다.
영화 <다우트>는 소수자가 다수 사회 속으로 편입하는 일이 소수자와 다수자 사이의 갈등만이 아니라 다수자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는 일이었음을 그려냅니다. 그것은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의 대립처럼 윤리와 비윤리의 대립이 아니라 윤리와 윤리의 대립입니다. 이질적인 대상의 출현은 새로운 윤리의 호명이라는 점에서 긴장감을 발생시킵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이 긴장감을 완성시키고 에이미 아담스의 백지 같은 표정은 긴장에 따른 혼란의 표정을 보여줍니다. 그 표정은 하얗게 보여도 투명한 것이 아니라 현기증입니다.
2023년 8월 10일부터 2023년 8월 16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