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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r 26. 2024

영화 이야기 <패스트 라이브즈>

나는 어릴 적 그 아이와 같은 사람일까. 지나간 시절을 세워놓고 둘러보면 기억은 마치 박물관 같다. 거기에는 내가 아닌 것이 없으나 나는 손님으로만 방문한다. 언제였는지도 모를 그때는 방부 처리되어 선명하지만 차가운 유리관 속의 날들을 나는 더 이상 만져볼 수 없다. 나는 내가 낯설어서 멈춰서 들여다보지 않고 걷고 또 걷는다. 기억은 시간의 바깥에 있어서 늘 불이 들어와 있었으나 그곳을 나오면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출구에 서서 두고 온 것을 떠올리지만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그곳에 두고 온 것은 조금 전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나이기 때문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사랑에 관한 하나의 실험처럼 보인다. 초등학생이었던 해성과 나영은 열두 살에 헤어진 후 12년이 지나 SNS에서 대학생 해성과 극작가 노라로 재회한다. 열두 살에 그랬듯 둘은 금방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각자의 이유로 헤어지고 다른 연인을 만난다. 다시 12년이 흘러 둘은마침내 뉴욕에서 만난다. 해성은 결혼을 고민하는 여자친구와 잠시 떨어진 상태이고 노라는 7년 전에 결혼한 남편이 있다. 이 실험의 목적은 명확하다. 각자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열두 살에 두 남녀가 서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스물넷에 SNS를 통해 재회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은 우연이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열두 살과 다르게 스물넷의 두 사람에게는 과거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물넷의 해성과 노라를 사랑하게 만든 것은 스물넷의 해성과 노라일 수도 있지만 열두 살의 해성과 나영일 수도 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힘이 세다. 사람에게는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만큼이나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고 첫사랑은 사랑의 원형으로 각인되어 있다. 만약 스물넷의 두 사람이 그때의 서로를 사랑한 게 아니라 원형으로의 회귀를 바랐던 것이라면 뉴욕의 두 남녀는 아마도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쓰고 보니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실험의 요지는 과거의 지나간 순간이 그대로 소멸하지 않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고 지나간 순간은 현재에 기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현재에 영향을 미칠까.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우리가 현재에 내리는 판단은 대부분 기억에 의한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데이터이고 현재의 우리는 그 데이터를 종합하여 결과값을 도출해낸다. 과거에 내렸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그날의 감정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현재를 만들어간다. E. H. 카의 말을 빌린다면 한 인간의 인생이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는 과거에 했던 실수와 잘못을 그대로 되풀이한 적이 없는가. 정말 과거에 겪었던 아픔을 기반으로 현재를 계속 수정해오기만 했는가. 적어도 나의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나는 과거에 했던 실수를 똑같이 여러 번 저질렀으며 심지어 이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같은 행동을 한 적도 많다. 그렇다면 기억은 결과값을 도출해내는 연산장치의 데이터가 아니라 단지 열어보지 않는 서고의 서류 같은 게 아닐까. 필요할 때 꺼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은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전자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열두 살의 나영과 스물넷의 노라는 같은 사람이다. 열두 살의 해성과 스물넷의 해성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SNS에서 재회했을 때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좋아했던 열두 살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사랑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두 남녀가 다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자연스럽다. 두 사람을 연결하는 매체가 SNS라는 점도 한 몫한다. SNS는 평면의 세상이다. 화면으로만 본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상대의 촉감이나 냄새 등 입체적인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다. 시각과 청각을 제외한 상대의 나머지 요소를 채우는 것은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나의 상상력이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말처럼 “상상은 곧 기억”이다.


그러나 반대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던 사람을 실제로 만났을 때 실망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기억은 박제되어 있고 사람은 변한다. 스물넷의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게 된 것은 현재의 상대에게 이질감을 느끼는데도 과거의 기억이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금 좋은 것은 지금 좋은 것이다. 스물넷의 두 사람에게 열두 살의 기억은 현재의 애정을 조금 더 섬세하게 만들어주는 소품 같은 것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현재의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해성은 왜 노라를 찾아왔을까. 어쩌면 이 질문의 답이 기억과 현재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하나의 힌트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해성이 뉴욕을 방문한 것은 서로를 열렬히 원하던 스물넷이 아니라 결혼 문제로 여자친구와 잠시 헤어진 서른여섯이다. 해성은 노라가 7년 전에 결혼했다는 사실도 안다. 이제와서 나의 진정한 사랑은 너라고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노라를 찾아왔을까. 노라를 보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이 노라에게 한 해성의 말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해성은 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떠나가는 사람”이라고. 실제로 열두 살 나영은 이민을 가면서 열두 살 해성을 떠났고, 스물넷 노라는 일방적으로 스물넷 해성에게 작별을 고했다.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해성은 열두 살에도 스물넷에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은 단지 한 여자를 향한 태도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명제인지도 모른다. 해성이 결혼을 앞두고 여자친구와 잠깐 헤어진 것은 그녀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 같다는 열등감 때문이다. 열등감은 망설임을 낳고 망설임은 기다림을 낳는다. 서른여섯의 해성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이 기다림의 태도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다르게 사는 방법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성이 노라를 찾아온 것은 그런 의미에서 늘 ‘기다리는 사람’이었던 자신을 ‘확인하는 사람’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영의 마음이 분명했던 것과 달리 해성의 마음은 늘 모호했다. 열두 살 나영은 해성과 결혼할 거라고 말했고 스물넷의 노라는 자꾸만 네 생각이 난다고 말했지만 해성은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다. 말하자면 그의 기다림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는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뉴욕행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결혼을 고민하고 있는 상대는 노라가 아니라 다른 여자이다. 해성은 왜 하필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려는 상대로 어릴 적 첫사랑인 노라를 선택한 것일까.


현재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개 현재의 자신을 만든 것은 과거의 특정 사건이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대로라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자신의 태도는 어쩌면 유년의 실패한 첫사랑에 기인한다고 해성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열두 살에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나영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단순한 변심이라면 모를까, 한 가정의 이민을 단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해성에게 이 이별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으로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안에 열두 살의 무력했던 소년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서른여섯의 노라 안에도 열두 살의 나영이 살아 있을 것이다. 열두 살 나영의 얼굴은 해성이 생에 처음으로 마주한 무력함의 얼굴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될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어도 해성은 그 얼굴과 대면하는 것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때로는 대면 자체가 극복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성이 뉴욕에서 노라와 마주했을 때 느낀 것은 그의 말처럼 “네 옆에 남편이 좋아서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가족의 이민에 이어 남편의 존재라고 하는 또 한 번의 무력함과 대면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력함은 사랑을 상실했던 열두 살의 무력함과는 다르다. 열두 살의 해성은 이민이라는 벽에 부딪혀 나영을 잃었지만 서른여섯의 해성은 남편이라는 벽에 부딪혀 노라를 잃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해성이 말한 ‘아픔’은 일견 잊고 있던 첫사랑과 대면하자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데서 기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말처럼 자신에게 있어 노라가 ‘떠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데서 오는 통증이다. 말하자면 그는 뉴욕에 와서 한 번 더 사랑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녀와 자신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관계였음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빌려서 표현하면 ‘인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발견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성 역시 그랬다. 열두 살의 그는 나영이 떠나가는 이유를 자신의 무능력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에 와서 노라를 만나고 그녀의 남편을 보면서 해성이 깨달은 것은 관계란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라의 남편이 해성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노라와 결혼한 게 아니다. 해성에게 노라가 ‘떠나가는 사람’이었다면 반대로 노라의 남편에게는 ‘머무르는 사람’이었을뿐이다. 이것은 돈이든 매력이든 개인의 능력이 그 사람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시각에 대한 반박이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으면 삶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외모가 뛰어나면 원하는 이성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소위 능력주의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 스스로의 삶을 완강히 장악하고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사고에 기인한다. 그러나 삶은 모래와 같아서 있는 힘을 다해 쥐면 잡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손 틈 사이로 흘러내린다. 해성은 여자친구와의 결혼이 문제에 봉착한 이유를 자신의 무능력으로 해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과 만나야 한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나 노라와 그녀의 남편을 만나면서 해성이 깨닫게 된 것은 인연이라는 인간 바깥의 힘이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초월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해성은 어떻게 해서 뉴욕에 오게 되었는가. 오래 전 헤어진 첫사랑의 기억. 어쩌다 남긴 글을 읽고 SNS로 연락하게 된 우연. 사랑의 반복되는 실패가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열등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 해성과 노라의 재회는 이 모든 것의 종합이다.


나는 처음 이 영화가 기억이 현재를 만드는지 아니면 과거의 삶은 분절되서 사라지고 오직 독립된 현재만이 존재하는지를 알아보는 하나의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실험에서 내가 얻은 답은 이것이다. 현재는 독립된 것도 아니며 기억만으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재를 만드는 것은 현재와 기억 그리고 우연과 관계 등 숱한 요소의 종합이다. 영화 속에서 노라는 말한다. “네가 좋아했던 그 아이는 이제 없어.” 그러나 노라는 해성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다. 그 눈물은 노라의 것이지만 동시에 나영의 것이다.


과거의 삶들이라고 말할 때 마치 그 삶들은 우리의 현재에서 떨어져나가 독립된 것처럼 느껴진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열두 살과 스물넷 그리고 서른여섯의 두 남녀를 각각 12년 후라는 자막으로 분절시켜 삶이 기억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삶은 연속적인 것이지만 기억을 떠올리면 삶의 군데군데는 마치 암전된 구간처럼 느껴지고 그로 인해 기억은 연속적이라기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분절이 아니다. 서른여섯의 노라에게 열두 살 해성은 항상 울고 있는 자신을 곁에서 지켜봐주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말하자면 기억은 지나간 삶의 파편이 아니라 잊을 수 없도록 빛났던 순간이다. 이제 해성은 없지만 울고 있는 노라의 곁에는 묵묵히 그녀를 안아주는 남편이 있다. 노라는 이 기억으로 또 한참을 살아갈 것이다.



2024년 3월 21일부터 2024년 3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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