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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06. 2024

영화 이야기 <쿵푸 팬더>

영화 <쿵푸 팬더>는 2008년 개봉작이다. 내 기억 속에 이 영화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주인공이 믿음과 훈련을 통해 세계의 위협을 물리치는 내용으로 남아 있었다. 포는 쿵푸를 단련한 적도 없고 반드시 용의 전사가 되겠다는 목표와 의지도 없으며 단지 꿈 속에서만 영웅이 되기를 갈망하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러나 대사부 우그웨이의 지목으로 용의 전사로 발탁된 후 훈련을 통해 진정한 용의 전사로 거듭나게 되고 마침내 세계를 위협하는 타이렁과의 대결에서 승리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능성. 위대한 인물의 지목. 고통과 시련의 훈련. 영웅으로서의 재탄생. 플롯의 참신함은 없지만 캐릭터는 참신하다. 세계를 위협하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쿵푸를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주인공인 포는 팬더다. 쿵푸는 몸을 사용하는 기술이므로 비만에 체력도 없는 팬더는 주인공으로 가장 부적합한 동물 중 하나다. 하지만 포는 자신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뱃살을 이용해 타이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비만이 단점이라는 통념에도 이 일격은 먹혔을 것이다.


물론 비만이 굳이 장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말하는 바는 장점과 단점의 구분이 아니라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상황과 개연성을 통해 얼마든지 장점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포는 평범한 마을 주민이 아니라 선택받은 용의 전사였다. 그래서 그의 뱃살은 보통 사람의 뱃살보다 더 심한 무능력으로 폄하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타이렁의 공격을 모두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뱃살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조차 꺼려하는 단점에는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장점이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것이 드림웍스가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용의 전사가 되기 위해 온갖 훈련을 감당하고 의지와 집념을 불태웠던 타이렁은 그 여파로 대사부 우그웨이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의 전사를 포기하지 못한다. 고된 훈련과 강한 집념은 타이렁을 최고의 실력자로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용의 전사가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없게 했다. 하나의 목표에 시선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뛰어난 능력이다. 그러나 시선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좁혀야 한다. 타이렁이 원하는 목표를 얻지 못했을 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좁은 시야의 결과다.


타이렁을 하나의 단어로 바꾼다면 아마도 ‘편협’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는 밀도를 높일 수는 있었으나 폭을 키우지는 못했다. 단점이 장점으로 바뀔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점도 단점으로 바뀐다. 어쩌면 포의 뱃살이야말로 이러한 전환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뱃살은 공격을 흡수하면서 충격을 완화하지만 동시에 강한 탄성으로 상대를 튕겨낸다. 흡수와 탄성이라는 이 두 가지 성질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포라는 하나의 캐릭터 안에서 태극 문양처럼 조화를 이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돌진하는 경주마 같은 성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질을 필요에 따라 조화롭게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시야라고 <쿵푸 팬더>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2000년대는 <시크릿>을 비롯한 각종 자기계발 도서가 범람하면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자질이 ‘스펙’으로 치환되지 않으면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고, 어쩌면 <쿵푸 팬더>는 그로 인한 사람들의 정서적 빈곤을 겨냥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타이렁이 탈옥하는 장면에서였다. 타이렁은 시푸가 보낸 사자의 깃털을 이용해 탈옥에 성공한다. 그런데 시푸가 사자를 보낸 것은 타이렁이 탈옥을 할 거라는 우그웨이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예언을 막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예언을 실현시킨 셈이다. 그런데 이 플롯은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 이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 비극의 플롯 아닌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보면 라이오스 왕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리라는 신탁을 받고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바로 그 명령으로 인해 아들에게 살해당한다. 오이디푸스 역시 장성한 뒤에 신탁의 내용을 알고 신탁의 실현을 막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나지만 신탁이 실현되는 것은 바로 그 떠남으로 인해서다. 이를 두고 아이러니의 플롯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스 비극이 아이러니의 플롯을 사용한 목적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을 가로막는 인간 외부의 힘과의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것이다. 신탁은 신이 정한 것으로 말하자면 운명이다.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는 것은 신이 정한 운명이 아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자유의지로 읽힌다. 반대로 끝내 신이 정한 운명이 실현되고 마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로막는 외부의 절대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고자 애썼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러니 그리스 비극의 이 아이러니는 인간 한계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브로치로 눈을 찔러 스스로를 장님으로 만든다. 이는 그간 눈뜬 장님이었던 자신에 대한 징벌이지만 이 징벌은 순응이 아니라 항거다.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 것은 운명을 피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못한 대가를 치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이디푸스는 눈을 찔러서 스스로를 징벌함으로써 신이 농락하고자 했던 인간의 질서를 지켜낸다. 만약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였음에도 아무 일 없이 살아간다면 그곳은 신의 땅이다. 그러나 그는 장님이 되고 스스로를 추방함으로써 그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인간의 땅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의 대결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것이 비극인 이유는 인간이 패배하기 때문이고 이 패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지면서 지켜내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롯의 구조를 분석하고 나니 새삼 궁금해진다. 드림웍스는 왜 기원전 비극의 플롯을 21세기 희극 애니메이션으로 가져왔을까. 대사부 우그웨이는 “운명이라는 것은 거역하려고 하면 비극이 된다”고 말했다. 명백히 그리스 비극을 염두에 둔 문장이다. 앞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 비극에서 살펴야 하는 것은 두 가지다. 누가 패배하는가. 그리고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누가 패배하는가는 명백하다. 바로 타이렁이다. 타이렁은 시푸의 수제자였을 뿐 아니라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으나 용의 전사로 지목받지 못하자 용문서를 탈취하려다 우그웨이에게 제압당해 지하감옥에 20년 동안 갇힌다. 예언을 막기 위해 온 사자가 오히려 예언을 실현시킨다는 점에서도 타이렁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과 닮았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지키려다 패배하는가. 악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는 뭔가를 지키기보다는 빼앗으려 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강탈은 자기 안에 결코 부서져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함이다.


시푸와의 대결에서 타이렁은 묻는다. “내 운명을 거스르게 한 게 누구지?” 버려진 고아였던 타이렁은 원래 용의 전사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푸는 그에게 용의 전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타이렁은 고된 훈련을 견뎌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용의 전사는 쿵푸의 신이 정해준 운명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그웨이는 끝내 그를 지목하지 않았고 시푸는 그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타이렁이 폭발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것은 시푸에 대한 배신감의 표현이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선택한 운명, 이른바 자유의지를 지켜내기 위한 저항이다.


이러한 점으로만 본다면 타이렁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희극의 악역이다. 한 가지 더 결정적인 차이는 비극의 주인공은 지면서 지켜내지만 타이렁은 지면서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타이렁이 패배할 때 사라지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관객의 카타르시스다. 관객은 타이렁이 포에게 패배하는 것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낄 뿐 어떤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한다. 만약 카타르시스가 있다면 그것은 포의 승리로 인한 것이지 타이렁의 패배에 기인한 게 아니다.


말하자면 드림웍스는 타이렁이 운명에 저항해서 싸울 때 그 편에 서지 않는다. 그리스 비극에서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주인공이라면 21세기 희극에서 운명에 저항하는 것은 악역이다. 왜 이런 전도를 만들어낸 것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희극의 주인공을 살펴야 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포는 타이렁과 완벽한 대칭이다. 운동에 적합한 몸도 아니고 훈련을 한 적도 없으며 목표를 향한 집념도 없다. 용의 전사가 되어 5인방과 함께 싸우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이때 꿈은 실현시켜야 할 목표가 아니라 수용하고 싶지 않은 현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상향으로 존재한다. 타이렁의 꿈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디스토피아라면 포의 꿈은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인데 바로 포는 우그웨이로부터 용의 전사로 지명받았다는 점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포가 용의 전사가 된 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과 비슷하게 느껴질 지 모른다. 절실한 노력도 분명한 의지도 없이 말 그대로 어쩌다가 유토피아에 도착한 셈이니까. 그런데 유토피아란 원래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이 뜻에 의하면 유토피아에 도착한 순간 그곳은 유토피아가 아니게 된다. 그 말대로다. 용의 전사가 된 후 포가 겪은 일을 나열하면 이렇다. 가족과의 이별. 스승으로부터의 배척. 동료들의 따돌림. 견디기 힘든 훈련의 연속. 나아지지 않는 실력. 이것만으로도 유토피아는 소멸했다고 볼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포는 자신이 용의 전사라고 믿지 않는다.


타이렁은 우그웨이로부터 지목받지 못했지만 자신이 용의 전사라고 생각하는 반면 포는 우그웨이로부터 지목받았음에도 자신이 용의 전사일 리 없다고 생각한다. 두 인물은 완전히 정반대지만 한 가지만은 같다. 바로 스스로의 운명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두 인물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타이렁은 용의 전사가 되기 위해 용문서를 탈취하려다 붙잡혀 감옥에서 20년이나 갇히게 되고, 포는 자신이 용의 전사가 아니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용의 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와중에 공동체로부터 소외된다. 우그웨이의 말을 빌린다면 두 인물은 자신의 운명을 거역함으로써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다.


타이렁과 포는 얼핏 양극단에 위치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둘은 쌍둥이에 가깝다. 그러나 이 쌍둥이는 이란성이다. 타이렁은 자신이 용의 전사가 아니라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끝내 패배하지만 포는 스스로를 용의 전사로 인정함으로써 승리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우그웨이에 의하면 그 비밀은 다름 아닌 애정과 믿음이다. 포가 용의 전사일 리 없다고 말하는 시푸에게 우그웨이는 말한다. 믿어만 준다면 저 아이는 틀림없이 용의 전사가 될 거라고. 말하자면 포를 비극의 주인공에서 희극의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바로 애정과 믿음인 것이다.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 아무런 가능성도 갖지 못한 인물이 믿음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인물로 거듭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동화 버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운명의 개척이 아니라 수용이다. 우그웨이가 말했듯 운명이라는 것은 거역하는 순간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이다. 삶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운명에 저항하는 대신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포가 자신을 용의 전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푸의 믿음을 통해서였다. 요컨대 삶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운명에 저항하는 대신 운명을 받아들어야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타인의 애정과 믿음이 필요하다. 나는 <쿵푸 팬더>가 이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종종 삶이 비극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삶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안에 삶을 바꿀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충분한데 삶이 바뀌지 않고 있다면 이 삶은 진정한 삶을 구속하고 있는 감옥이고 나는 그 속에 갇힌 무능력한 죄수나 다름없다. 도처에 쏟아지는 자기계발의 정언들은 하나 같이 성공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실 이 성공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성공하지 못한 현재의 삶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의 삶을 혐오해야 하는 것이다.


타이렁이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희극의 악역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의 눈을 찌르면서 지켜내려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타이렁이 운명에 거역하면서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원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증오’이다. 용의 전사가 되기 위한 타이렁의 싸움은 스스로에게는 어떤 방해와 저항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겠다는 꿈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관객에게 그것은 단순한 ‘욕망’으로만 여겨진다. 오이디푸스가 지켜내려는 것이 ‘인간’이라면 타이렁이 지켜내려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인 것이다. 관객은 인간을 위해 싸우다 패배하는 자는 추앙해도 자기 욕망을 이루려다 패배한 자는 동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타이렁이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희극의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좋은 말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역시 권장할 일이다. 그러나 재화의 풍족과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기계발은 스스로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대신 지금 있는 곳을 어지럽히게 만든다. 헤르만 헤세 작가는 <데미안> 서문에서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살아보려 했다고 썼다. 나는 누구나 사람의 가슴 속에는 바깥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소위 말하는 성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가슴은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운명을 잠재적인 미래로 여기지만 사실 운명이란 삶의 총칭이다. 그러니 앞으로 올 날과 더불어 지나온 날과 오늘 역시 운명의 일부다. 우리가 주어진 운명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한계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단면이 아니라 입체를 보는 일이다. 웃음과 울음 중 어느 하나를 보는 게 아니라 웃고 울고 서럽고 벅찬 삶의 전체를 느끼는 것이다.


우그웨이는 현재를 “프레전트”라고 말했다. 만약 현재가 선물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선물상자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작은 상자들의 모음이다. 어쩌면 포장을 푸는 족족 우리를 실망시키는 선물들만 나올지도 모른다. 타인의 애정과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포장을 풀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포장을 푸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용의 전사가 되기 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포가 가지고 있었던 자질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삶을 기대하는 낙천성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2024년 3월 28일부터 2024년 4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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