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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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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인 May 29. 2022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질문 (上)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이 글은 모자란 서평 글이다.

왜냐하면 책을 완전히 읽어내질 못했을뿐더러 책에 대한 감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으로 말미암아 각종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자극적인 콘텐츠로 억눌러져 있던 능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이 봇물처럼 터졌다. 그래서 너무나 즐거운 이 질문들을 서평 글에 녹여 보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과 함께.






에릭 와이너는 책의 저자로, 미국의 칼럼니스트이자 책 6권을 써낸 베스트셀러 작가다. 아내, 딸 소냐, 강아지, 고양이와 함께 워싱턴 D.C에서 살고 있다.(고 적혀있다.) 또한 여행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저술한 책 '신을 찾아 떠난 여행', '행복의 지도'(행복을 찾아 떠난 여행)등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행을 통해 얻은 가치를 주로 얘기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읽기 쉬운 철학책이다. 여타 철학책과는 달리 어려운 단어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위트를 섞어 하는 농담에 '푸흡'하며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읽기 쉬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처절하게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기자가 어떻게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집필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겐 늘 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열다섯 살에게 중요한 '어떻게' 질문과 서른다섯 할, 또는 일흔다섯 살에게 중요한 질문은 같지 않다. (중략) 어떤 절박함이 내 펜을 움직인다. 삶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죽고 싶지 않은 자의 절박함이다. 특정 위기를 꼽을 순 없다. (중략) 나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아니, 알아야 한다. 그것도 너무 늦기 전에 -p.14~15


에릭 와이너는 인생의 단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가장 그 대답을 잘 해줄 수 있는 철학자를 선정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장소에서 그들과 마주하기 위해 그들과 같게 행동하고 생활한다. '그(철학자)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진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인생의 단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자 14명의 답변인셈이다.


14명 모든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앞서 말했듯,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한 것도 아니고 내 인상에 깊었던 챕터만 적어볼 예정이기 때문이다.






시작하기 전에 철학과 철학자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가고 싶다. 사전에 검색해보니 철학은 [밝을 철, 배울 학]으로 철은 [밝다, 슬기롭다, 알다, 결단하다] 등의 의미를 가졌다. 사전대로 풀이해보면 [사리에 밝음과 슬기로움을 배우는 학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어로 하면 [philosophy]라고 하는데 [philosophia]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사랑하다, 좋아하다를 의미하는 접두사[philo], 지혜를 의미하는 [sophia]가 결합된 단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 그렇다면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철학은 지혜를 말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지혜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지혜를 사전에 검색해보니, 가장 와닿는 풀이를 찾았다.

지혜는 현실의 다양한 현상을 식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통합해서 이해하는 작용이기 때문에, 현실의 감각적 작용을 초월해서 전체를 파악하는 초월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종교학대사전
대안들 사이에서 효과적인 선택을 하는 능력 -상담학 사전


위 지혜에 대한 풀이를 인용해서 철학과 철학자를 다시 정의하자면, 철학은 '삶과 인간의 전반적인 현상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행하는 것을 배움 또는 그것에 대한 학문'이다.

철학자는 과연 누굴까?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만이 철학자일까? 하지만 철학을 하는 것과 철학을 배우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본인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삶, 사람, 세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것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궁금해해 보고, 어떻게 행해야 할까? 를 고민해봤다면 당신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정말 나를 알고 있을까?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소크라테스는 5세기 아테네의 '물음표 빌런'이었다. 본인이 아는 것을 떠드는 소피스트들에게 가서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쪼개고 꼬리를 물어 질문했다. 지긋지긋한 설전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막을 소피스트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억지로 질문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저 질문이 필요 없을 만한 답변을 한 소피스트가 없었을 뿐이다.


우주학자 칼 세이건은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이라고 말했다 -p.49


모든 철학은 궁금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유명한 철학자들은 많았고, 그들은  "세상은 무엇으로 이뤄져 있을까?" "하늘에 떠있는 별들은 왜 존재할까?" 이러한 질문들로써 자신의 사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세상을 묻기보다는 인간에 대해서 물었고, 존재(무엇)와 이유(왜)에 대해서 묻기보다는 방식(어떻게)을 물어봤다. ".. 그러니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요?" 어쩌면 가장 실용적인 질문을 던진 철학자일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이 있다고 생각했고, 답을 알아내는 방식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는 '산파법'이라는 대화법을 통해서 말이다.


국어사전에서 내가 할 말을 다 해버리네


현대 철학자 로버트 솔로몬은 이를 현명한 훈수질이라고 칭했다. -p.51


이 대화법은 명확하지 않은 개념에서 지속적인 문답을 통해 선명한 단 하나의 개념을 얻어내는 것이지만, 큰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건 "너는 아는 것이 없다"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아는 게 많아야 하는 소피스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야말로 빌런이었을 것이다.


난 질문으로만 때린다.


우리는 아는 것을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은 더 이상의 질문 없이 그대로 자신에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알고 있는 게 맞을까? 나는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장을 소크라테스 식으로 물어보며 내가 진짜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나는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당연히...)


Q1. '좋은 디자이너'라.. '좋은'은 일단 넘어가고, 너에게 디자이너는 누구지?

A1. 인간이 기분 좋은 가치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제품을 설계를 하는 사람이죠!

Q2. 마침 좋다는 개념이 나왔군. 좋다는 건 무엇이지? 가치, 경험, 제품, 설계에 대한 개념은 이따 물어볼게.

A2. 나무랄 데 없는 것이죠. 보통 이상이다..?

Q3. '보통'은 무엇이지?

A3. 현상에서 가장 평균 중간값의 퀄리티를 말하죠.

Q4. 현상에서 가장 평균 중간값의 퀄리티를 어떻게 알 수 있지?

A4. 어... 제품의 평균 퀄리티라면 시중 제품들을 보며 참고하죠.

Q5. 제품을 물어본 게 아니지만, 넘어갈게. 평균이라면, 시중 제품을 전부 참고했나?
A5. (...)


아, 대답을 못하겠다. 정말 머리 아프다. 나름 소크라테스식 문답으로 써본다고 써봤는데 잘 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더 이상 질문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은 난 좋은 디자이너가 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뭔지 모르는데 될 수 있을까? 어허헣ㅜㅜ


모르는데 어떻게 돼요


'아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소크라테스가 질문하는 방법이다.

답변하는 사람은 지속적인 질문을 통해서 '당혹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나, 그 당혹과 수치는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는 아는 것을 질문하지 않고 모르는 것을 질문한다. 우리는 모른다는 걸 알기 시작한 순간부터 진정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내가 좋다는 걸 잘 못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좋다는 건 무엇일까?"라고 물어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두 번째 답변을 달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전으로 돌아가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변도 마찬가지다. 그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나 또는 다수)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크라테스식으로 질문을 쪼개고 답변을 주고받아보자.

나는 누구인지, 산다는 건 무엇인지, 굳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 질문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더 이상 답변이 필요치 않은 내면의 한 줄을 찾으며 자기 심문을 반복하다 보면 잠시 생각을 멈추게 하는 질문이 턱 하고 걸릴 수도 있다. 당장 답변을 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질문은 사람을 놓아주지 않으며,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알려주는 답을 알아내는 방식이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은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p.54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뭘까?

루소처럼 걷는 법


걷기만을 위해 걸어 본 적 있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목적지를 향해 갈 때 빼고는 잘 걷지 않는다. 오히려 뛰면 뛰었지, 걷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또한 요즘 사회인들에게는 걷는 것은 선택사항이다. 자동차, 전철, 버스로 이동할 수 있고 Last Mile도 전동 킥보드를 타면 되니까. 하지만 얼마 전부터 러닝을 하면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소에 뛰던 러닝코스를 마냥 걸었는데, 코스를 끝내고 느꼈던 기분은 차분한 후련함이었다. 러닝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잘' 걷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나는 유튜브에서 걷는 법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다. 걷는 것도 그냥 걸으면 안 된다. 발꿈치보다는 발바닥이 닿는다는 느낌으로 걸어야 하며, 발을 교차할 때는 엉덩이와 햄스트링의 힘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딛었던 발을 뒤로 밀어 박차고 나아가야 한다. 유튜브가 가르쳐준 대로 잘 걸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상당히 어색함을 느꼈다. 하지만 제2의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이었다. 걷기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써 제대로 걷는 순간말이다.


학부생 시절 교양 시간에 교수님이 장애인 이동권에 관련한 영화를 보여주셨다. 방금 전 제목이 기억이 안 나서 검색을 해보니 최근 장애인 이동권 시위 관련 사진들이 뜬다. "이동권은 기본권이다."


걷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의 첫 시작이다. 우리는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자유롭다고 여긴다. 2층으로 가고 싶은데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고, 올라갈 수 있는 수단이 계단밖에 없다면 난 2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걷고 이동하는 것을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왜냐하면 걷기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철저한 개인적인 행위]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p.83


혼자 살면서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가족을 포함해서 매일매일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들과 일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고 가끔 술도 마신다. 그들에게 '누군가'라는 페르소나가 되어 사회적인 행동을 한다. 페르소나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료', 누군가의 '친구'혹은 '애인'이 되는 거니까. 페르소나로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물론 그 페르소나가 내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정말 가감 없는 날것의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약속이 많은 일주일의 끝이 피곤한 것은 물리적으로 피곤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신적인 피곤함이 더 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의 끝에는 꼭 자기 자신을 만나 자신을 보살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일주일 약속의 끝은 불어난 무게


혼자 걸을 때는 어떠한 사회적인 제스처가 없다. -p.101


자기 자신만 존재하게되는 개인적인 행위로는 뭐가 있을까? 앞서 말했듯 [걷기]가 있을 테고 또 [먹기(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면)], [샤워(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면)], [배설(같이... 음..)], [읽고 쓰기(과제가 아니라면)] 등등이 있을 것이다. 이 행위들의 공통점은 '타인의 의견, 시선, 행위'가 상관이 없는 나만의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읽고 쓰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행위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존재한다. 먹는 것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샤워는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 행위 자체를 즐기고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많다. 맛있는 것을 한입씩 음미하며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샤워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계속 먹을 수 없고 계속 씻을 수도 없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 하지만 걷는 것은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원하면 계속 걸을 수 있다.


자기 사랑은 혼자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기쁨이다. (중략) 그 기쁨은 자신만의 것이며 타인의 의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략)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가 전혀 필요치 않다. 산책자는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이다. -p.91


걷기는 나를 만나는 방법 중 시도해보기 가장 쉬운 방법이다. 왜냐하면 걷기는 바쁘지만 힘이 그리 들지 않는다. 발을 내딛고, 길을 보고, 주위 지형을 둘러보고 누군가를 피하기 위해 온 감각을 사용해야 해서 바쁘지만 그리 많은 힘이 들지 않는다. 힘이 남는 여유 사이에서 새로운 생각이 트인다. 자신만을 위한 생각을 하며 자신과의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누구나 걸으면서 생각에 빠지거나 잠시 잊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답이 없는 생각이 들 때 무작정 걷는다.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고 가로등에 비친 물결의 재질이 보인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러닝 하며 땀을 흘리는 사람, 행복하게 웃는 커플들 다양한 인간 군상이 보인다. 나는 그 사이로 혼자가 되어 걷지만 외롭다는 생각 없이 생각의 길로 빠져든다. 산책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별 다른 결론이 없어도 걷기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내가 나를 보살폈다는 느낌만이 충만하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p.92
철학에는 신체와 관련된 조류가 흐른다. 신체와 분리된 철학자, 신체와 분리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철학보다 몸에 더 많은 지혜가 있다"라고 말했다. -p.93


우리는 걷는 것만으로 칭찬받던 시절이 있었다. 가끔 세상이 나에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밖을 걸어보라. 낯선 온도와 바람을 느끼고, 바깥 사람들의 흐름을 보면서 걸어보자. 발길이 닿는 대로,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리듬으로 세상이 주는 자유를 만끽해보자. 너무한 세상 속에 걷는 순간만큼은 당신은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으며, 제2의 걸음마를 배운 것이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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