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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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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인 Jun 13. 2022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질문 (下)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이 글을 읽기 전에 전편을 읽고 오길 추천드린다.




괴로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나는 학부생 시절 종종 교양으로 철학 수업을 들었다. 철학 자체를 배우고 싶다기보다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우고 내 생각과 비교하여 지평을 넓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쇼펜하우어는 내게 여성 혐오자, 비관주의자, 염세주의자라고 여겨졌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그는 세상을 괴롭고 귀찮은 것으로 여기는 염세주의자다. 그는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전면적이고, 불가피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아... 벌써부터 힘 빠지는 시작이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학부시절과는 다른 생각이 든다. "쇼펜하우어는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삶은 끔찍한 사건이야. 나는 이러한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로 했다네" -p.150
쇼펜하우어를 처음 배우는 나


쇼펜하우어의 세계란 인간의 외부가 아닌 생각에 존재했다. 우리는 에베레스트라는 봉우리를 알고 있지만 그 이유는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에베레스트에 대한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의 세계에서는 에베레스트란 없었을 것이다.


세계는 실재한다. 하지만 그것의 시작은 내가 인식할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흔히 공감하지 못하는(내가 겪어보지 못한) 문화권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게 실재해?" 라며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같은 세상인데도 너무 다르게 사는 그들, 우리는 그들에게 '그사세'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야말로 그렇다. 같은 '세상'을 살고 있어도 우리는 사는 '세상'이 다르다.


이렇듯, 우리는 실재 세계의 전부를 알지 못한 채 표면의 찰나만을 경험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할 실재 세계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의지"라는 개념이다.

의지는 인간이 가지는 정신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힘 같은 것이다. 이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고, 에너지다. 의지를 설명하기 어려우니 쇼펜하우어의 정의를 참고하도록 하자.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요구는 고갈될 줄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갈망을 가라앉히거나 그 요구에 끝을 맺거나 그 심장의 끝없는 나락을 채우기엔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충분치 않다.


실재의 표면에서 표류하는 나와 무시무시한 의지. 출처 구글


의지는 우리를 욕망하게 만든다. 욕망은 만족을 모르며, 결국엔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 파괴시킨다. 뭐 이런 얘기인데.. 사실 100% 이해가 가는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바와 같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의지란, 내 욕망이 아닌 타인과 시선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가끔 내가 욕망하는 것이 정말 내가 욕망하는 게 맞나?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세상에 뒤쳐지기 싫다"라던가 "내가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라는 욕구에서 비롯된 욕망들이 많다. 이 욕망과 의지의 공통점은 끝이 없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의지에 의해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의지의 고리를 끊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하나는 절제를 하고 명상을 하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술을 하는 것이었다.


의지는 고통스럽다. 왜냐면 우리는 계속 욕망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한다는 건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실체화했다는 것이 되고 나와 욕망하는 것의 분리가 일어난다. 쇼펜하우어도 부처와 마찬가지로 욕망에서 오는 분리 감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했다.(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나를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것에 개별성을 부여하고, 나를 흔들 수 있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일까?) 분리는 개별자 2개 이상이 필요하다. (지금은 '세계'와 '나'가 개별자가 된다.) 분리가 없으려면 개별자 1개가 없어지거나 개별자 2개가 합쳐져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예술'만이 세계와 나를 하나로 만들어 분리감을 없애고,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회에서 무아지경 상태가 돼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가끔은 작가와 작품을 몰라도, 어떤 화법을 사용하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업했는지 몰라도 날 무아지경으로 만드는 작품이 있다. 모르겠다. 내가 그 작품의 배경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까지 감상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시를 보려면 작가와 그 작가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하고 작품의 의도를 알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하지만 2018년에 다녀온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어쩌면 나 나름대로 그냥 즐겨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불어라 알아들을 수도 없고, 현대 미술은 더더욱이..'작가의 의도가 뭘까?'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난 몹시 잘 감상하고 돌아왔다. 물론 작가의 의도를 알면 더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 스스로 탐색하며 생각하는 것이 더 창의적이고 재미있다. 또한 회화도 마찬가지다. 마냥 앉아서 작품을 뚫어지게 보다 보면 내면과 주변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멈춰져 있어서 그럴까, 순간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넓어지고 난 조그마한 점이 되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나와 세계는 똑같은 점일 뿐


쇼펜하우어도 예술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내가 세계에 느끼는 분리를 없애는 길이라고 여겼다.

전시회를 가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융합의 느낌, 통합되는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닐까?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그 대상만이 홀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이상할 정도로 온전히 그 자체로서, 기묘할 정도로 매우 현실적으로,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p.159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포르노가 예술이 아닌 것이다. (중략) 포르노의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p.164


앞서 나는 "쇼펜하우어는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쇼펜하우어에겐 세계란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도망가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관찰했다. 내면의 우울을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잘될 거야"가 과연 긍정일까? 나는 본인이 느끼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고통스럽게 여긴다는 것 자체가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이 '부정'은 상대적인 표현에서의 의미인 듯하다.)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고통과 우울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까지 찾은 그는 염세적이었지만 끝내 긍정적인 철학자가 아닐까?  



별도로.. 이 챕터의 제목이 쇼펜하우어가 듣는법인 이유

쇼펜하우어가 음악을 다른 예술보다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해당 챕터는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이다. 이외에도 정신적인 소음에 대한 얘기가 있지만, 내가 인상 깊었고 전달하고 싶었던 점은 '세상 살기 괴로울 때 예술로써 고통을 승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음악에 대해서 더 쓰면 좋았을 텐데 분량이 아쉽다.

결론은... 괴로울 때는 음악, 미술 등의 예술 활동을 통해서 몰입에 빠지라는 말!






행복해지는 방법을 뭘까?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며 있다고 해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 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뭘까? 내가 생각했을 때 행복이란 '만족함, 또는 그런 상태'인 것 같다. 인생의 목적이라 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본인 나름대로 행복을 구성하는 5가지의 항목과 각각의 목표를 2020년에 설정해뒀었다. (지금 보니 업데이트가 필요하긴 하다)


내 행복을 관장할 수 있는 것들


덧붙여서, 목표 문장을 적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예를 들어 커리어 항목에서의 목표 문장은

'내가 만족하는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일을 하는 것'인데, 내가 만족하는 직장은 무엇이며, 인정받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질문 (上) 편의 소크라테스 챕터를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여튼 나는 내 행복에 진심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서평을 쓸 때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의 지평을 넓혀줬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를 설명하기에 앞서 쾌락이란 개념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에픽쿠로스는 쾌락만이 선()이며, 국가, 철학 등 모든 것은 쾌락을 위하는 수단이라고 봤다.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


쾌락을 들었을 때 내가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본능적'이고, '순간적'이라는 것이다. '식사'에서 오는 쾌락, '섹스'에서 오는 쾌락, '쾌변'에서 오는 쾌락 등, 내가 알고 있는 의미로는 쾌락 자체로는 삶의 목적으로 삼고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쾌락 순위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위에서 말한 쾌락과는 좀 다르다. 위에서의 쾌락은 무언가를 얻고 누리는 것에서 오는 쾌락이었다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불안'과'고통'이 부재할 때 오는 것이었다. 불안과 고통 없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 에피쿠로스는 이런 상태를 '아타락시아'라고 정의했다. 쾌락은 불안의 반대말이 아니다. 불안과 고통의 부재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에서만 쾌락을 느낄까? 더 바라진 않을까? 이 물음에 대답을 하듯 에피쿠로스는 뭔가를 욕망하고 얻었을 때의 쾌락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3가지로 나눴다.


빙수는 맛있긴 하겠다.


물론 텅 빈 욕망도 쾌락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린 이런 욕망을 지양해야 한다.

우리가 더운 날 시원한 물을 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덥고 목마른 상태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은 그 상태를 벗어나기에 충분한 재료가 된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더 쾌락적이기 위해서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먹는다면 우리가 바라게 되는 건 덥고 목마른 상태를 벗어나는 게 아닌 더 시원한, 더 상쾌한 상태를 바라게 될 것이다.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먹은 사람이 나중에 더울 때 시원한 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까? 나중에는 쾌락을 위해 화채를 바랄지도 모른다.


요는 '충분함'이다. 우리는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앞서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시원한 물 급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면 누리 시라. 부러우니까) 우리 앞에 떨어진 것들을 누리고, 수용하고 감사해야 한다. '지금, 이것보다 더' 바라는 욕망은 쾌락을 적극적으로 좇는 행동이긴 하지만 '더'의 끝은 없다. 서둘러 '더'의 꼬리를 끊고 더 중요한 가치에 시간을 쓰는 게 좋겠다.

작고 사소한 것이어도 주어진 것을 충분하고 좋게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일상에서 매 순간이 충분함과 좋음의 연속일 것이다. 충분하게 좋은 것은 지금 내가 정할 수 있다.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떡하지?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누구든 살면서 외부요인으로 인해 쉽게 마음이 상한다. 친구나 가족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 돌 맞은 개구리가 되기도 하고, SNS에서 묘한 소외감, 박탈감 등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을 거다. 나 또한 감정이 섬세한 편이라, 타인 때문에 쉽게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일기를 쓰면서 감정을 해소하곤 하지만, 가끔 가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왜 기분이 상해야 하지?"라며 이런 상황에 대해서 열을 내곤 했다. 그러다 어느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세바시 채널에서 본 말 마음 연구소 김윤나 소장의 ‘리더의 말 그릇’을 키우는 3가지 질문이었다. 


속으로는 쁘엥 중


유튜브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자신의 말 그릇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는 불편한 상황에서 대답할 때라고 한다. 만약 내가 불편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순간 욱할 수도, 슬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 3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뒤에 대답해보자.


1.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지?

욱하거나 슬픈 습관적인 반응을 인지하고, 그 반응을 말에 담지 말 것.

2.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지?

뒤 따라오는 생각들로 하여금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질문을 통해서 본질과 진실을 알아내라.

3.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지?

결국엔 말에 있어서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대답을 하기 전에 내가 바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말을 풀어낼 것.


나는 이 영상을 보고 크게 깨달은 부분이 어디였냐면 바로 질문 1번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지?' 부분이었다. 우리는 경험에 의한 습관적인 감정을 '진짜'라고 믿으며, 감정대로 생각하고 말을 한다. 그리고 쉽게 휘둘린다. 습관에 눈이 멀 수 있다면 한번 pause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여기서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가 필요하다. 스토아학파는 자연주의, 금욕주의, 이성에 의한 행복 등을 말하는 학파이지만 나 또한 상세하게는 모르므로 책에 있는 에픽테토스의 이야기만 전할까 한다.


이 챕터의 타이틀처럼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내 마음을 바꾸면 된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느끼고 판단했던 '감정'이 우리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라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반사적인 반응, 단순한 떠오름일 뿐이지,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만약 나쁜 말을 들었는데 나쁜 말로 하여금 영향 받는 것이 내 감정 뿐이라면, 나는 '신경쓰지 않는 것'을 택할 수 있다. 나쁜 말을 하고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상대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정정이 필요하다면 정정만 하고 상대에게 문제를 넘길 것. 나쁜 말로 인한 순간적인 감정을 내 문제로 들여오면 피곤해진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p.407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선택하는 방법만 배운다면 삶을 통제하며 마음대로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떠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소중한 무언가가 내 곁을 영영 떠날 때 "난 슬프지 않기로 결심했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요지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감정에 의해 너무 휘둘리지 말라"는 거다. 화를 내거나 슬퍼할 수 있지만 증폭시키지 않아야 한다. 눈물은 흘리되, 멈추게 하라는 것이다.


로렌스는 엄지와 검지로 태연하게 성냥불을 끈다. 동료 장교가 똑같이 하려다 고통에 소리를 지른다 "아야, 이거 엄청 뜨거운데요" 동료가 말한다. "물론 뜨겁지" (중략) "비결은 뜨겁다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 거야 -p.412


오직 감정의, 감정에 의한, 감정을 위한



감정의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손에 달린 것들은 많지 않다. 막히는 강남대로, 이루지 못한 실적, 떠나버린 친구 및 애인 등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우리가 보통 슬퍼하거나 화나는 이유는 이와 같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서다. (물론 자신에 의해서 화나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 자신도 내가 어쩌지 못했지 않았을까?) 그런 경우는 상황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을 하는 거다. 막히지만 차분히 가야 할 길을 가고, 실적을 내는 것에 치중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만큼의 업무를 하고, 떠날까 봐 불안해하기 전에 마음을 다해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p.408


마지막으로 내가 늘 새기는 나인홀드 니버의 기도를 남긴다. (기독교는 아니지만..)

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길었던 서평이 끝났다. 쓰지 않는 버릇 때문에 어렵지만, 어려울 때야말로 그릇이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은 대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평온하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말해준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같은 궤를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욕망을 버리고, 순간에 집중하고 감사하며, 내가 들여다본 단단한 나의 생각이 나를 지키고 평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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