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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인 Jun 18. 2021

고통을 이겨내는 힘.

2020년과 2021년 사이에 세명이 내게 말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에서 나는 주로 고통스러웠다.

고통의 깊이와 강도에서 사람은 각자 다른 잣대를 가지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난 무난하지 않은 삶을 보내온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대체로 행복했다. 행복에서 미끄럽게 불행으로 떨어져 보기도 하고, 반동으로 그만큼 올라가 행복의 절정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거다. 누구나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을 받아왔고

(없으면 좋을 테지만) 앞으로도 고통을 받으며 살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 오는 고통의 시기를 잘 보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내가 어떻게 고통을 대하게 됐는지의 글이다.

이 글의 영감은 2021년이 곧 시작되는 12월 31일, 우연히 접한 3명의 인물으로부터 받았다.

3명의 인물이 내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작성할 예정이다.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모두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면 댓글로 생각을 나누어주면 좋겠다. 다른 관점이 가장 재밌는 법이다.



그럼 고통을 대하기 전에, 고통이 뭔지 알아보자.


막상 고통에 대해서 적으려고 보니.. 고통이라는 녀석을 설명할 수 없어서 사전 검색을 해보았다.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 -표준국어대사전
고통()은 피부, 근육, 뼈 등 신체의 일부에 생기는 피해로 인해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불쾌감과 우울함 등의 부정적 감정으로 '괴롭다'라고 여기는 정신적 고통이 있다. 이 정신적인 고통은 고뇌로 표현한다. -나무 위키


더 와닿는 정의가 없을까 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책에서 정의를 찾아보았다.


무엇인가 잘 안되고 있는 상태, 불만족한 상태, 어긋나 있는 상태, 조화롭지 않은 상태, 안정이 안 돼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중략)... 바라기만을 할 수 있을 때, 곧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야마나 테츠시의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개인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오는 간극,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든 없든 그 괴리에서 인간은 불안과 고통을 느낀다.


이제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제 고통을 달리 보게 만들어준 인물들을 소개할 것이다.









1. 유세윤

'불안해서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가장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때는 2020년 12월 31일.

회사 종무식을 마치고 이른 퇴근을 하는 중 나는 유튜브로 라디오스타를 봤다.

원래 유튜브로 보는 예능은 무한도전밖에 없었는데, 옛 라디오스타 MC들이 게스트로 나오는 것이

흥미로워서 보게 되었다. 게스트는 윤종신, 유세윤, 규현 3명이었다.


누가 MC고 누가 게스트인지 모를 대화중에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출처 : 유튜브 채널 엠뚜루 마뚜루



김국진이 화두를 던진다. 

'불안정할 때 가장 완벽하다'라는 유세윤의 말이었다.


유세윤이 이 말을 했던 이유는 현재 그가 안정적으로 삶을 살고 있고,

역설적이게도 안정적인 삶 때문에 '웃음에 대한 몰입과 강도'가 많이 떨어진 거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자신은 자신이 불안정했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말이다.


김구라도 '안정적일 때 누가 고뇌를 하겠어?'라며 '예술가는 가정생활이 불행해야 돼.'라는 이경규의 말을 인용하며 동의했다.

윤종신도 '불안정할 때 오히려 에피소드가 생긴다'며 공감했는데,

김구라는 그런 윤종신에게 '그럼 요즘 에피소드 많겠네!!' 폭탄을 날리며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지인이 내게 한 말이 있다.

지인의 친구는 음악을 하는 사람인데, 연애를 할 때 사랑에 대한 가사를 쓰는 것보다

이별을 하고 나서 쓴 가사가 가장 좋았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 또한 그랬다.

감정을 얘기하고 마음을 쓰는 내가 이제까지 적었던 사랑 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때가 아닌 이별 직후에 적었던 글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오늘날에 그 글을 다시 읽어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오감이 생생 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감정의 정수를 부어 적은 글이라 그럴까, 어느 때보다 감각적이고 섬세하다.

내가 얼마나 그때의 감정에 몰두하고 탐닉하고 있었는지!



다음은 내가 맘에 들어하는 나의 글 일부다.

아직은 서투르지만 마음에 들기 때문에 옮겨 적어 본다.

사랑은 타인으로써 우주를 선물 받은 기분이 들지만,
이별은 나만의 우주를 발견한 기분이 든다.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근래 손에 잡히는 책은 독립출판을 했던 작가들의 에세이 모음집으로 '당신의 글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라는 책이다. 무엇을 쓰고 무엇이 나를 쓰게 하는가. 등의 여러모로 영감을 주는 글이 많다. 어느 페이지에서 김은비 작가가 '트루먼의 삶이 가짜였던 것 같지만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존재 하나만으로 그의 삶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라는 글을 보고 그냥 문득 생각했다. 내 삶이 공허하고 이어진 것 없이 홀로 존재할지라도 내가 불태우고 연소시킨 감정들은 실로 있었던 것들이고 없다는 걸 실감한다는 건 있었음을 인지하는 거니까. 그것을 계속 쓰고 적는 게 내 일인 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내가 요즘 좋아하는 단어는 그을림, 폐허, 손때와 같은 시간을 포함하는 단어들이다. 난 끝이 있는 게 좋다. 무엇이든 끝이 없는 게 없기도 하고, 시작과 끝 그 간극에서 영원이란 느낌을 경험하기도 하니까. 결국 끝을 믿으니 시작도 믿는다. 끝내 내 것이 되지 못하더라도 공허의 끝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아파하는 이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냥 팔을 잡고 두드리는 거밖에 할 수 없었고
그냥 마치 심장 고동소리 같아서 나 여기서 같이 살아있노라고, 함께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당신을 꼭 껴안으면서 우리를 방해하는 건 우리가 맞닿아있음에 생기는 검은 경계라고 생각했던 시간을 기억한다. 당장 껴안고 있음에도 난 지금 현재처럼 당신을 마냥 그리워했다. 언젠간 오늘이 오리라 예상했던 걸까, 그래서 나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값진지 안다.


유세윤이 만약 웃음을 자아내는 일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유명한 개그맨이 될 수 있었을까?

불안과 고통은 결코 좋은 단어는 아니지만 그는 웃음에 대해 불안했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더욱 웃음에 집중했고 몰입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지금 같은 유머센스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고통을 준 것에 대해서 더 몰입할 수 있게 되고,

더 다양한 각도로 새롭게 바라보며 그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프루스트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와 고통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옛날에 그렸던 프루스트 초상화이다. 아이패드의 프로 크리에이터 앱을 사용했다.


12월 31일의 다음날인 새해의 첫날, 나는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원제는 'How can proust change your life.'인데 원제가 더 직관적이라 생각이 든다.


한낮 햇빛을 받으며 나는 책의 4번째 챕터인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을 읽고 있었다.

그 이전날 라디오 스타에서 들었던 얘기와 비슷한 얘기를 프루스트 또한 하고 있었다.


병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주목하고 배우게 되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을 과정들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고통 없이도 우리의 정신을 사용할 수 있지만, 프루스트가 제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때에만 철저한 탐구심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 그리고 고통은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한다. 생각은 고통의 기원을 이해하고, 그것의 여러 특성들을 포착하고, 그 존재를 체념하고 인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발을 삐어서야, 멀쩡한 발이 주었던 당연한 일상의 굴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발과 또 다른 발 사이의 힘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프루스트는 이 생각을 넘어서 그렇게 얻은 고통으로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의 기술 전부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개별자들을 이용하는 데 있다."
삶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 현실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얻는 것을 말한다. … 불쾌한 사태의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고통으로부터 극적으로 구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회복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고통을 어떻게 대응할까?


나 같은 경우는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는 애써 그 기분을 피하려고 했고

고통스러웠을 때는 대부분 나를 탓하려고 했다.

내가 어른스럽지 못해서, 참을성이 없어서, 이해심이 부족해서 등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상황 자체를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심한 경우는 같이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나 때문에 이런 상황에 오게 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자기 객관화가 진행된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애는 컸지만 자존감은 낮았던 경우다. 결과적으로는 자의식 과잉.

나에 대한 기대는 커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모두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해낼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더 이상 탓할 수 없을 때는 나의 외부를 탓했다.

날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과 그 상황을 탓하며 나를 연민했다.


후자의 방법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전자의 방법은 매우 좋지 않다.

왜냐하면, 나를 탓하는데 감정과 에너지를 쏟으니 결과적으로는 고통을 타계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을 할 수가 없어서 고통의 굴레에 빠지는 것이다. 


고통은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온다. 이 고통을 벗어나고 싶으면 그 간극을 좁히면 되는 거고,

노력으로써 좁힐 수 있는 간극도 있다. 하지만 자기 탓을 반복하다 보면 이 간극을 좁힐 수가 없다. 

너무나 바라고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이 나를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만드는 아이러니.
(간극을 좁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시도조차 못하는 상황이 온다.)



대략 이런 느낌


그리고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외부만 탓하다 보면 결국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될뿐더러 자신을 매우 방어하게 된다.

어느 것 하나도 곱게 못 듣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을 단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재미없는 것이라고 영원히 비난하기만 한다면, 무엇이 가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왜곡될 것이다.
지식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감수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식이 영구적이라고 여기거나 실로 개인의 타고난 능력을 반영한다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프루스트는 고통은 즐겁지 않지만,

본인이 고통을 받을 때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왜 그렇게 대처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책에 있는 상황을 현대식으로 바꿔서 예를 들어보겠다.

A는 어느 분야에서 높은 평판을 얻는데 평생을 보냈지만 A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A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A가 무시하는 B는 그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그래서 A는 그들에게 관심 없는 척하면서 그들을 '재미없는 사람들'이라 폄하한다.


A는 이미 그들이 본인을 알아주지 않아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본인이 무시하는 B가 그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이에 A는 그들을 재미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하며 대처했다.


이 상황에서 A는 왜 그들을 재미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했을까?


A가 그들의 모임을 못 가는 '본질적인 이유'를 '그들은 재미없다'라는 핑계를 만들어 본인이 스스로 가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여 덮으려 하기 때문이다.


A가 덮으려고 한 정말 본질적인 이유는 

A는 그 분야에서 잘 나가지 못할뿐더러 B는 A보다 잘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A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애써 부정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내 탓도, 나의 외부 탓도 하면 안 된다. 


A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더라도 그들은 A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 대한 A의 관심을 조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마음에 새겨두고 있는 것보다 더 정직한 태도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으로써 A는 사람들이 그들의 그룹에서 배제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실망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


물론 순간적으로 본인이 상황에 대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상황을 인지 못하고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그들을 폄하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A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왜 그들을 폄하했고, 폄하로써 얻고 싶은 게 뭐지?"

"내가 자존심을 세워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뭐지?"

"왜 지킬 수 없는 거지?"


A는 스스로에게 묻는 행위로써

훗날에는 그들의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고통은 결국 내가 바라는 것을 명확하게 만든다.


내가 고통스러운 이유를 집요하게 묻다 보면 결국 내가 바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나게 된다.

묻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 나의 객관적인 모습과 이상적인 모습을 비교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이상적인 모습에 닿을 수 있고, 어떻게 고통을 타계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물론 모든 고통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다.

그럴 땐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를 읽으며 현실과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해보자.


신이여, 바라옵건대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


나는 종교가 없지만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기도다.








3. 김영하 작가

결국, 고통 위에 올라서는 방법


김영하 작가를 처음 접한 건 단편집 '오직 두 사람'을 읽었을 때였다.

'아이를 찾습니다'가 가장 마음에 오래 남아있었는데 

3월에 JTBC에서 2부작 드라마로 나와서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후에 김영하 작가를 본건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서였는데,

'세상을 바꾸는 15분'에 연사로 나와서였다. 

제목은 '자기 해방의 글쓰기'로, 영상을 처음 본건 출근길이었다.


그때의 나는 고된 회사생활에 몸도 마음도 쪼그라들어 있었다. 메말랐고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출근길에서 나는 그 영상을 음성으로만 들었는데 그것이 고독한 출근길에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피로할 때마다 그 영상을 찾으며 마음에 안정을 찾곤 했다.


김영하 작가는 영상 초반부에 작가의 고된 삶에 대해서 설명한다.


수천 년간 인간은 글을 써왔습니다. 이제는 안 써도 될 것 같잖아요?… 글을 쓴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일단 책상에 앉아야 합니다. 허리를 펴고 한동안을 시간을 보내야 해요. 아주 운이 좋은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보상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늘 글을 써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극한의 한계상황에서도 글을 썼습니다.


영상에서 김영하 작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쓰인 글의 사례를 쭈욱 나열한다.

패션잡지 엘르의 전 편집장인 쟝 도미니크 보비가 뇌졸중으로 인해 전신마비에 걸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왼쪽 눈만 20만 번 이상 깜박여 쓴 '잠수종과 나비'라는 사례에서부터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쓴 '사기',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쓴 '동방견문록', 세르반테스가 감옥에서 구상을 시작한 '돈키호테'까지.


인간은 자신의 모든 상황의 끝에서도 글을 썼다.


정말 사람들은 어떤 엄혹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쓰는데요. 그건 왜일까요? 저는 글쓰기야 말로 인간이 마지막까지 갖고 있는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어요.…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또한,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글은 인간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건요, 자기의 어두운 지하실의 문을 확 열어젖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줍니다. … 이런 행위가 필요할까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글을 써 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변화가 생기고요. 제 아무리 복잡한 감정이어도 언어는 논리가 있죠 … 논리적인 과정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트라우마 라던가 어두운 감정들이 숨어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죠. 이것을 언어화해서 쓰는 동안 그 감정 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글쓰기가 가진 자기 해방의 힘입니다.


우리는 한 글자, 한 문장을 써가면서 우리가 살아있음을 체감한다. 그리고 스스로 변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경험을 언어라는 형태로

전환시키는 행위인데 그 과정 속에서 묵혀뒀던 어두운 내면들 예를 들면 나약함, 자기혐오, 두려움 등이 나만의 언어 논리 아래에 깔리기 때문이다. 


우릴 삼켰었고, 삼킬 수 있었던 것들을 통제하는 힘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는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여기까지가 세바시 김영하 작가의 '자기 해방의 글쓰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나는 꾸준하지는 않지만 늘 일기를 써왔다.


길지는 않아도 짧게나마 단상을 적었고 감정이 복잡 미묘한 날이면 꼭 그것을 섬세하게 기록하려고 했다. 그리고 지독하게 힘든 날에는 일기를 썼다. 


지금도 일기장을 보면 안 좋은 일만 일어난 사람처럼 좋은 얘기는 별로 없다. 

우울한 날에만 적는다는 것이 돌이켜보면 삶을 우울하게만 기억할 거 같아서  요즘엔 행복도 적으려고 노력하지만, 과거 일기장은 다시 들여다 보기 무서울 정도로 축축하고 우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우울한 일기의 마지막 문단은 "나는 해내고 만다""힘을 내자" "난 자신을 사랑한다"였다. 


주야장천 삶과 일상의 지독함을 적어내려도 결국엔 마지막 상투적인 응원처럼 "힘내자"라니.


하지만... 그때는 진심으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어쩌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힘을 내는 것,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라며 말이다.



요즘은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생기면 그 느낌을 텍스트로 써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친구 관계에서, 연인 관계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을 때

'누군가의 관계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순간 ~~라고 느꼈다.'
라는 문장을 써야 한다면 '~~'라는 감정을 어찌 됐건 구체적으로 써야만 하기에, 

내 감정을 곰곰이 복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잡 미묘했던 감정이 구체적인 텍스트로 나오는 순간 나는 차분해지면서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글 쓰는 일은 정적인 것 같지만 굉장히 부지런하고 바쁜 행동이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내가 글을 쓸 때만큼은 굉장히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누구보다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러닝을 하면서 심장이 쿵쿵 대는 걸 느낄 때처럼, 사랑을 하며 어쩔 줄 몰라 벅차오를 때처럼, 여행을 다니며 끝내주는 자연 속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는 것처럼. 



글쓰기는 내가 가진 모든 상황 감정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글을 써야 한다.

길지 않아도 괜찮다. 일단 던져보는 것이다. "나는 고통스러웠다."라는 한 문장을.

그러면 이어진문장은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로 받아 적으면 된다.








요약하자면,

고통은 우리의 이상과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에서 오는 것이거나 존재했다가 없어져버린 상실 때문에 오는 것이며, 고통은 어찌 됐든 '내가 바라는 것',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에 몰입하게 하고 다각도로 바라보게 해 그것들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해를 만든다. 


그 이해는 나 자신을 이해하게 만들면서 결국 '내가 바라는 것'에 다가가기 위한

객관적인 노력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출발은 시발점을 명확히 알아야 출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글 쓰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의 압박감을 내 언어 논리로써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를 억압하는 상황과 감정을 스스로 해방시킬 수 있게 된다.








비록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들을 인용해

이번 브런치를 적었지만, 쓰는 와중에도 생각이 커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글쓰기는 생각의 정리이며, 이 정리는 더 큰 생각을 하기 위한 발판이라고 믿는다.

나중에는 좀 더 세련되게 글을 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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