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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영 Jan 06. 2019

[17도] 첫 데이트

술꾼

 요새는 데이트하면 다들 어디서 뭐하고 놀아요? 가로수길이나 삼청동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영화 보거나 전시회 가고 그러나? 저희도 뭐 비슷해요. 사귄 지 오래되니까 주말마다 하는 게 점점 비슷해지고 있어요. 뭘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나고. 생각해보면 첫 데이트가 제일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아뇨 아뇨, 뭐 처음이라서 설레고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요, 진짜 첫 데이트 장소가 특이하고 이상했어요.


 알죠? 아무도 안 믿지만 저 클럽 가본 횟수 손에 꼽는 거. 브라질에서 게이클럽 갔던 거, 남자친구랑 같이 클럽 간 거 다 합쳐서 세 번이 될까 말까 한 거요. 그리고 최씨는 정말 누가 봐도 클럽에 흥미 있을 타입이 아니잖아요. 21세기 청년보다는 개화기 지식인 쪽이 어울리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의 첫 데이트는 월디페였어요. 월드 디제잉 페스티벌.


 원래는 친한 언니가 같이 가자고 해서 엉겁결에 티켓을 끊었는데, 페스티벌을 기다리는 동안 최씨랑 사귀게 된 거죠. 근데 이 언니가 마침맞게, 스케줄이 안돼서 못 가게 돼버렸지 뭐에요. 뭐 어떡해요. 나는 거기 갈 거라고 이미 회사에 반차도 다 내놨고, 표는 장당 십만원이 훌쩍 넘는데 환불은 안되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최씨가 동행하기로 한 거죠.


 디제잉 페스티벌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시끄럽고 사람들 밤새 노니까 아예 인적이 좀 드문 곳으로 장소를 잡은 것 같더라구요. 머나먼 양평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별로 말도 없었어요. 사귄 지 일주일이 될까 말까 했는데 단둘이 이야기를 해본 건 열 시간도 채 안됐거든요. 말하자면, 우린 안 친했어요. 워낙에 성격도 다른데 서로 아는 것도 별로 없으니 어색해서 괜히 하늘이 이쁘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만 했죠. 우리 지하철 탔었는데요 분명히.


 그런데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 같아요, 도착하고 나서는 더 말이 없어졌거든요.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음악도 익숙하지 않았는데, 헐벗은 사람들의 복장들에 비해서 우리는 그대로 도서관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무엇보다 어색하게 서있던 우릴 미치게 만들었던 건, 우린 이제 곧 춤을 춰야 한다는 거였어요. 우린 초대형 클럽에 온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리듬에 몸을 맡기고, 서로의 취향이 아닌 EDM을 들으면서 춤을 격정적...휴... 그때 정신이 혼미해져가던 제 눈에 띈 건, 링거 칵테일을 파는 부스였어요. 맨정신으로 못할 것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면, 그냥 맨정신이 아니게 만들어버리면 되는 거잖아요?


 근데 문제가 있었어요. 분명히 30분 가까이 기다려서 간신히 칵테일을 사 마셨는데, 아니 들이부었는데, 취하질 않았어요. 아니, 더럽게 비쌌거든요. 맛도 별로 없었는데 어찌나 술을 조금 섞었는지 너무 안 취했어요 너무. 빨갛고 파란 칵테일을 하나씩 손에 들고 멋쩍게 웃는데 머릿속으로는 ‘어떡하지 어떡하지’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구요. 그런 제 눈에 띈 게 바로 옆에 있는 새까만 칵테일 부스였어요. 아 왜 그런 느낌 드는 곳 있잖아요. ‘저기는 무조건 독주를 샷으로 판다’


 저는 최씨도 뒤에 둔 채로 달려가서 외쳤어요.

“데낄라 샷 8잔이요”

바텐더분이 처음에 농담인줄 알더라구요. 저는 아직도 확신해요. 그 페스티벌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 중에 그 순간의 제가 제일 진지했어요. 저의 표정을 알아챈 바텐더 분이 샷 잔 8잔을 깔고 그 위에 데킬라를 주르륵 부어주셨는데, 너무 잔이 많아서 들고 어디로 이동을 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둘이 나란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가 고3 때 지어준 흑마늘 엑기스 먹듯이 숨을 참고 네 잔을 주르륵 들이켰어요. 우리는 어디 늦은 적이 없는데 누가 봐도 후래자 3배주 벌칙 받는 것 같았죠.


 데킬라 4샷을 한 방에 들이킨 느낌이 어땠냐고요? 데킬라를 정맥주사로 맞는 기분이에요. 선 자리에서 그렇게 마시니까 5분도 안돼서 술기운이 온몸으로 퍼지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느껴지데요. 그래서 어쨌냐구요? 춤췄죠! 엄청 열심히!! 한 1시간 정도를 여기저기 스테이지 옮겨 다니면서 열심히 췄어요. 데낄라 주사를 맞고 나니까 어색했던 게 한방에 사라져버려서 그 순간 저는 최씨랑 세상 둘도 없는 절친이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춤을 좀 못 춰도 발을 헛디뎌도 다 괜찮았죠.


 그런데 제가 예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어요. 데킬라 정맥주사의 부작용 같은 거였는데요, 체력이 어마무시하게 빠르게 고갈된다는 거였어요. 춤추기 시작한지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우리의 체력은 완전히 바닥났어요. 조금만 쉬고 싶었는데, 저 풀밭에 잠시 잠깐이랍시고 누웠다가는 다음날 아침 이슬 맞으며 구안와사가 온 얼굴로 일어날 것 같은 예지력이 생겨서 관뒀어요. 아 그런데 정말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계속 춤은커녕 어디 서있기도 힘들었어요. 데낄라로 있는 체력을 한번에 모아 쓴 게 너무나 분명했죠. 그래서 어쨌냐면요, 집에 왔어요. 양평에서 서울까지 택시 타고. 삼만 오천원.


 요새도 가끔 서로 제일 기억에 남는 데이트를 꼽아보면, 최씨는 여지없이 첫 데이트를 골라요. 많은 게 어색하고 풋풋하고 웃겼어요. 그때 스물셋의 저와 스물일곱의 최씨는 제 눈엔 진짜 귀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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