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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지 Jan 06. 2019

[4.5도] 술 안 먹고 이것까지 해봤다

술찌

 술자리에서 ‘내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얘기하라고 해서 했던 건데, 몇 년이 지나도 가끔씩 친구들이 먼저 얘기를 하는 그 얘기.

 스무 살이었다. 아, 이 얘기를 하려면 먼저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을 얘기해야 한다. 그때 난 눈이 콩만 해지는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도 맨 앞자리에 앉았고 얼굴엔 여드름이 만개해있으며 훼어니스는커녕 선크림도 바르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교복을 일체 줄이지 않고 맞출 때의 벙벙한 핏 그대로 3년을 입고 다닌 아이였다. 이것은 내가 전교 1등의 모범생이었다는 게 아니라 외모에 크게 관심 없는, 이성에게 인기가 많을 이유가 전혀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음을 말한다. 물론 이론은 구성애 선생님 수제자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만 해도 초딩은 생각 이상으로 순수해서 내 친구들은 남녀가 키스하면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고, 나는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독학해 친구들을 붙들고 성교육을 시켜줬었다. 그때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알아버린 한 친구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쨌든, 이론은 빠삭하지만 이상하게 여중, 여고를 나와 착실하게 학교만 다녔던 탓인지 나는 두어 번 연애는 했었지만 어른들이 걱정할 일 따윈 없었다. 밥 먹고, 영화 보고, 손잡고. 최대 스킨십이 포옹. 쳇, 남들은 다 중고딩 때 첫키스 했다는데 나는 고작 포옹. 후..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달라. (아마 그때 키스를 못 해본 건 당시 내가 치아 교정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당시 남자친구가 겁을 먹어서였을 거다. 난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스무 살, 대학생이자 법적으로 성인이 됐다.

이제 자유롭게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입고, 제대로 된 연애를 할 기대에 맘이 잔뜩 부풀어있었다. 하지만 이제 막 스무 살 된 나의 화장이나 옷 스타일링이 세련될 리가 없다. 모든 스무 살 여자가 그렇듯 꾸미면 꾸밀수록 촌스러웠다. 게다가 고3때 튼살이 생길 만큼 쪄버린 살은 몇키로 빠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한국 멜로 드라마 전개?! 입학하자마자 08학번 중 1등으로 과CC를 하게 된 건 나였다.

 선배들은 우리 과가 대대로 성비가 반반인 것을 높은 취업률만큼 자랑스러워했는데 아아.. 저주받은 89년생이여..! 08학번은 역대 최악의 성비였다. 압도적인 여초. 남녀 1:5. 그런데 ‘개중에’ 제일 키 크고 ‘개중에’ 잘생긴 남자애를! 앞에 한 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설명한 당시의 내가! 사귀었다는 거다!! 그 남자앤 매너가 좋았고, 나에게 잘해줬고, 나보다 능숙했다. 그리고 내가 많이 좋아했었다. 지금은 이 연애를 ‘사랑’이라 치지 않지만 그땐 사랑이었다. 스무 살에게 ‘사랑’의 동의어는 ‘전부’, ‘세상’, ‘내가 사는 이유’.. 등이었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구질구질하게 설명했으니 알겠지. 내가 그 새끼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100일도 안 돼서 그 새끼는 나를 슬슬 피하더니 잠수를 탔다. 아무리 연락해도 답장은 없었고 같은 시험이라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날, 도망가려던 그 새끼를 겨우 붙잡았다. 잘못한 건 그 새낀데 당당했고 오히려 내가 죄인 같았다. 그놈은 미안한 척하지만 뻔뻔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한참 뒤에 알았는데 이미 양다리 중인 질 나쁜 놈인 걸 나 빼고 과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빨에 교정기만 뺐지 여전히 순진하고 어렸던 나는 정말 걔 없으면 죽는 줄 알았다. 어떻게든 잡고 싶었다. 그 새끼가 나쁜놈이란 것도 알고, 예전처럼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붙잡고 싶었다. 헤어지기 싫다고 엉엉 울부짖는데도 냉정하게 돌아서길래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게 이런 거구나. 나한테도 지푸라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내가, 바닥에 픽 쓰러져버렸다. 대체 어떤 드라마에서 영감을 받았던 거지. 그럼 나는 그럴 줄 알았다. 그놈이 놀라서 날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거나, 119를 부르거나, “괜찮아? 내가 잘못했어! 정신 차려봐!! 흑흑..” 하며 날 안아줄 줄.


  “연지야 이러지마”


 그놈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난 정신이 번쩍 들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티 나게 일어나지 않게 힘 조절을 해서 가까스로 일어나는 척한 나.


  ‘아씨, 쓰러지는 척한 거 들켰나? 바닥 아플까봐 너무 어설  프게 쓰러졌나?’


긴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얼굴이 화끈거렸다. 발가벗겨지면 이 기분이랑 비슷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기어코 기숙사 안으로 날 밀어 넣고 가버린 그 새끼.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슬펐고 죽고 싶을 만큼 쪽팔린 이별이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나의 흑역사.

다들 술 안 먹고도 이 정도 해본 적 있는지, 

혹시 나만 그런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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