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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영 Jan 06. 2019

[17도] 숨이 멎는 순간

술꾼


 일이 몰릴 땐 정말로 숨을 쉬는 걸 잊는다. 한참 일을 하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면 그때서야 한참을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게 느껴진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 메일, 메신저. 하나같이 급하고 오늘이 아니면 큰일 나는 일들이다. 내가 처리해주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고가 터져버릴 듯한 그런 상황들. 내가 손대지 않아도 어떻게든 일이 굴러간다는 걸, 나 하나 없다고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잘못하고 싶지 않아 파닥거리다 보면 숨을 쉬는 것도 아까울 때가 있다.


 그럴 때 강제로 숨을 쉬게 하는 순간이 있는데, 회사로 온 택배를 찾으러 가는 타이밍이다. 혼자 살다 보니 집에 받아줄 사람이 없어 주로 회사로 받는 택배의 종류는 작게는 렌즈부터 크게는 밥상까지 다양하다. 그날도 뭔가 왔다는 문자를 받고 한숨 돌릴 겸 택배를 받으러 갔다. 분명 지나치듯이 샀던 생필품일 줄 알았으나 웬걸, 옷 두 벌이 각각의 택배 봉지에 붙어왔다. 하나는 내가 샀던 티셔츠임이 분명한데, 같이 온 원피스는 아무리 봐도 초면이다. 평소에 입어보고는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내 체형에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옷: 반 하이넥에 종아리 반 아래께로 내려오는 하늘하늘한 꽃무늬 쉬폰 원피스 같은 것. 입는 순간 몸의 부피를 1.5배로 만들어줄.


 아무리 생각해도 기념일은 멀고도 멀었고, 평소에 서프라이즈를 하는 타입이 아닌 최씨가 안 하던 귀여운 일을 벌였나 했다, 역시나 아니었지만. 아니면 티셔츠를 샀던 쇼핑몰에서 사은품을 보냈나 싶기도 해서 전화 문의도 해보았다. 사은품 행사 자체를 안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원피스가 담겼던 택배 봉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난생처음 보는 인터넷 쇼핑몰 이름이 나왔다. 아, 누군가에게 갔어야 하는 택배가 나에게 불시착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조심스럽게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저는 전혀 모르는 물건이 왔는데, 혹시 잘못 온 게 아닌지’를 물었고 이내 상큼하고 친절한 상담직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렸다.


고객님이 주문하신 게 맞구요, ‘회사 택배실에 넣어주세요’라고 요청사항에 써주셨네요?


 ‘어 뭐지, 저 요청사항은 내가 택배 주문할 때마다 하는 건데?’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파노라마처럼 몇 가지 장면들이 눈앞을 스쳤다. 파김치가 된 퇴근 후에 예능을 보면서 백세주를 마시는 나, 마시던 술이 한 병이 넘어가니 내 호흡이 빨라져 예능의 호흡이 재미가 없어져버린 나, 그리고 침대에 널부러져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던 나, 그리고 언젠가 한번쯤 깡말라지면 입어보고 싶었던 원피스를 바라보다 순식간에 질러버린 3일 전의 나. 바로 나.


 뭐라고 해야, 이 전화를 끊을 수 있을지 3초 가량의 정적 동안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취해서 쇼핑한 물건을 보고도 기억을 못 하는 인생 처량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떡해야 내가 기억이 났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지 생각하다 튀어나온 대답은


확인해보겠습니다.


 우리 팀장님이 들었으면 뭘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거냐고 불호령이 떨어졌을 대답을 남기고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네, 그러믄요, 확인해봐야죠. 제 정신머리랑 통장 잔고요. 분명히 숨을 쉬러 갔는데, 숨을 더 오래 못 쉰 느낌인 건 기분 탓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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