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찌
인생 영화, 인생 드라마, 인생 노래, 인생 사진.
누구나 가슴 속에 인생 하나쯤은 품고 사는 법이다. 그런데 내 인생은 어찌 된 영문인지
누군가 ‘인생 OO’가 무엇이냐 물으면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래서 시간 날 때 정해두었다.
내 인생 영화는 ‘비긴 어게인’, 내 인생 드라마는 ‘또 오해영’이라고.
드라마 작가를 꿈꾸지만 드라마를 많이 본 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청개구리 심리가 있는지 인기 많은 드라마는 괜히 안 보다가 나중에 다운받아 보고 ‘왜 이제야 봤지..’ 하는 일이 많다. ‘또 오해영’도 그중 하나였다. 다들 하도 오해영, 오해영, 하길래 또 그저 그런 한국 멜로겠거니 했다. 그땐 몰랐다. 한참 후에 다시 보게 된 18부작을 단 며칠 만에 다 보게 될 줄은.
한국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찌질하지 않다. 아니, 찌질하면 안된다. 그런데 오해영은 찌질하다.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오해영이 좋아서다. 오해영은 과하게 찌질하고 솔직하다. 찌질하고 솔직한 나조차 가끔 ‘아우, 징글징글하다.. 그만 좀 해라 진짜’ 싶을 때가 있었으니까. 그치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난 오해영을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랑스럽게 찌질해서, 솔직해서, 나 같아서. (외모 빼고요)
이 드라마를 볼 당시에 난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짝사랑 중이었다. (사실 이 나이가 짝사랑과 어울리지 않는단 것도 짝사랑이 끝난 후에 나보다 몇 살 많은 언니에게 들어서 알았다) 남들은 이 나이면 사귀기 전에 재고 따져서 마음을 줄지 말지부터 정한다는데, 나는 이미 마음을 다 줘버렸지 뭔가. 대체 이런 건 왜 나만 빼고 남들은 다 아는 건지. 나도 좀 끼워주라!
이 짝사랑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위로가 된 건 화면 속 오해영이었다. 간도 안 보고 냅다 고백하는 것도, 마음을 얻으려 별의별짓 다하는 것도, 갑자기 혼자만 이러는 게 힘들어서 먼저 연락 그만하자고 해놓고 며칠 만에 다시 연락하고 지내자고 연락하는 것도, 밑바닥을 보이고, 상대의 밑바닥을 볼 때까지 직진하는 것도,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어보는 것도, 오해영은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남자 집 창문에 돌을 던진 오해영이 사이코패스 같다고, 먼저 모텔에서 자고 가자고 조르는 오해영이 여자 망신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였어도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안다. 그건 절대 술김에 한 행동들이 아니다.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셨어도 ‘오해영 과’의 여자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난 오해영이 나처럼 술을 못 마시더라도 그 찌질하고 솔직하고 기이한 행동들을 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그런 사람이라서. 라고 답할 수밖에 없겠다.
그렇지만 내가 드라마 작가였어도 굳이 여주인공을 술 못 마시는 캐릭터로 잡진 않았을 거다. ‘술 못 먹는 맨정신의 또라이’는 현실에선 몰라도, 화면에선 다소 이해하기 버거울 수 있으니까. 오해영을 보며 술 먹는 여성 시청자들은 “그래! 술 먹고 저래야지!” 했을 거고, 나처럼 술 못 먹는 여성 시청자들도 “그래! 저래야지!” 했으니, 오해영은 실로 대단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해영 본체는 술도 음식도 정말 예쁘고 맛있게 먹으니 술 마시는 장면을 안 쓸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더더욱 오해영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어라, 쓰다 보니 ‘어느 날 누군가와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오해영과 마시고 싶어진다. 여주인공의 외모와 해피엔딩의 여부가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임을 다시금 피부로 느꼈지만, 잠시나마 내가 짠내 로코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준 오해영에게 고맙다.
넌 예쁘고 해피엔딩이고, 난 덜 예쁘고 새드엔딩이었지만 괜찮아. 난 앞으로도 쭉- 찌질하겠지만 또 김연지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