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만밤 Dec 18. 2022

얼마를 아껴야 로지텍 콤보 터치를 살 수 있을지 몰라서

그런데 너무 사고 싶어서 소비기록을 시작했다.

일기장만큼이나 나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카드 지출내역과 유튜브 재생목록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게다가 일기는 매일 쓰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후자의 둘이 더 객관적인 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돈과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를 살펴보면 내가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일 거다.


부끄럽게도, 돈을 번지 몇 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누군가 나에게 ‘한 달 용돈이 얼마에요?’라고 물어보면 쉽사리 답하지 못한다. 몇 달간 가계부를 꼼꼼히 쓴 적이 있었지만, 깜박하고 며칠 건너뛰고 나면 밀린 걸 채워야 한다는 부담에 그만두곤 했다. 그러다 최근 두 달 동안 매일 나의 돈씀씀이를 돌아보는 ‘소비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소비기록을 갑자기 시작하게 된 이유는 아이패드와 연동되는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블루투스 키보드를 하나 가지고 있었고, 만족하며 쓰고 있었지만 글을 쓰고자 할 때 주섬주섬 키보드를 가져다가 펼치고, 블루투스를 연동하는 그 짧은 번거로움이 조금씩 쌓여갔다. 휴대폰으로 쓰기엔 긴 글이지만 각잡고 테이블에 앉을 만한 정도는 아닌 중편의 글들이 번거로움에 밀려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별도의 연결이 필요 없는, 아이패드와 딱 붙어있는 키보드를 사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잊을만 하면 한번씩 불쑥불쑥 나타났다. 장인은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지만 난 장인이 아니니 장비빨이라도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구매하기에 아이패드 키보드는 너무 비쌌다. 꼭 이걸 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미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몇 달을 끙끙 앓다가 ‘아니, 나도 월급 받는데 키보드 하나 못 사나?’ 하는 생각에 억울함이 들었다. 아껴서 사면 되지! 그러나 문제는 내가 어디서 얼마를 아껴야 이걸 살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숨 쉬듯이 나가는 지출은 손에 안 잡히고, 한번 아낀 돈은 오래 생각나서 보상 심리로 다른 소비를 더 하게 되기도 했다. 나 자신에게 키보드를 살 수 있을 만한 근거를 대 주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다.


그러나 키보드는 너무 비쌌다



소비기록 프로젝트*가 단순한 가계부 정리와 다른 점은 매일 ‘소비와 결부된 맥락’을 함께 적는다는 점이다. 어떤 마음으로 이 물건을 샀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함께 기록하면 침착하게 내 소비를 돌아보며 충동 구매를 줄일 수 있다. 매일 정리하다보니 생각 없이 쓰고 있던 자잘한 소비가 눈에 들어온다. 출근할 때 두어 개씩 사가지고 가던 감자빵 3,800원. 야쿠르트 아주머니를 만나면 꼭 하나씩 엠프로4를 사먹는 버릇 같은 것들. 이런 소소한 행복까지 제어해야 하나 싶지만, 저녁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꼭 먹고 싶을 때가 아니면 구입하지 않게 되었고, 구입할 때면 소중하게 먹게 되었다. 다이어트에도 절약에도 좋은 일이다.

 

  * 동명의 워크샵을 독립서점 ‘오키로북스’에서 진행한다.

소비기록 프로젝트의 일부. 돈 쓴 것이 하루의 정확한 족적으로 남는다.


소비기록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빠른 시일 내에 근거를 댈 수는 없었다. 객관적인 증빙을 위해서는 최소 세 달 정도는 추이를 지켜봐야 할텐데 이번 달에 얼마를 썼는지 알아도 비교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블루투스 키보드를 주문했다. 어차피 살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행복하자는 유혹의 목소리와, 하는 거 보니 이제 자기 소비도 잘 돌아보고 아껴쓸 것 같으니까 미리 보상을 주자는 관대한 자아가 이겼다. 스스로에게도 용서가 허락보다 쉬운 법이다.



결과가 좀 헛웃음나오긴 하는데, 결론적으로는 아직도 매일 소비 일기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소비 일기의 다른 좋은 점들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에게 얻어먹은 것에 더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커피값이 그렇다. 사내 카페에서 아무렇지 않게 카드를 꽂고 메뉴를 고르라는 동료에게 얻어먹은 커피를 무심히 넘기지 않고 소비일기에 적는다. 나에게 줄어든 소비는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 함이다. 이건 내가 아낀 돈이 아니라 선물받은 커피이니 다음에는 내가 대접해야지, 생각하고 다음 번에는 내 카드를 꽂는다.


내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는 점도 그렇다. 기록을 하면 뭔갈 살 때 한번 멈칫하게 되는데, 내가 쓰고 나만 보는 건데도 한번 더 돌아본다는 행위가 꽤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자잘한 소비가 많았던 날들이 있다. 지하철 가판대에 파는 복슬복슬한 집게핀을 산다던지, 평소에 마시지도 않던 꿀물 같은 걸 마신다던지. 어떨 땐 식사 메뉴가 죄다 고깃국이다. 갈비탕, 삼계탕, 순댓국… 돌아보니 스트레스와 야근이 많은 날에 그렇다. 스스로 좀 잘해주고 싶구나,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현생이 힘들면 뭘 아낄 힘도 없어진다.


다시 블루투스 키보드로 돌아오면, 매우 만족스럽다. 키보드가 있는 것이 고정값이라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마음의 허들이 낮다. 검색할 때도 키보드를 쓰고, 메신저할 때도 쓰다가 그냥 메모 앱을 켜서 드는 생각을 줄줄 적어내려가는 식이다. 부담이 없으니 글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좋은 침구를 마련하는 사람들은 자기와 시간을 많이 보내니까 좋은 걸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던데, 반대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은 쪽에 좋은 것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전략인 것 같다.


별도로 충전할 필요도, 블루투스에 연결할 필요도 없다. 패드만 쓰고 싶을 때는 키보드 부분을 분리해낼 수도 있다. 단점은 조금 무겁다는 건데, 그래도 가급적 키보드를 분리하지 않은 채로 데리고 다니려고 한다. 언제 어디서 쓰고 싶은 마음이 슬금 피어날 지 모르는데, 그때 키보드가 없으면 글은 마음에서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마음은 그렇게 자주 와주지 않으므로, 언제든지 오시라는 마음으로 묵직한 로지텍 콤보 터치를 가지고 다닌다. 이 글도 그렇게 쓰여졌다.


너무너무 맘에 들어


작가의 이전글 전복 하나에 숨 한 번, 성게 하나에 숨 한 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