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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밤 Nov 07. 2022

전복 하나에 숨 한 번, 성게 하나에 숨 한 번.

더 할 수 있겠을 때 정리하고 퇴근해야 내일 또 힘내서 일할 수 있지

숨찰 때까지 하다간 죽는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해녀로 일하는 영옥은 늘 욕심껏 물질을 한다. 약속된 구역이 아닌 곳까지 멀리 나가 물질을 하다가 물질 종료 시간을 맞추지 못해 함께 일하는 해녀들을 크게 걱정시키기도 하고, 물밖으로 올라오려다 그물에 발이 걸려 죽을 뻔한 걸 해녀들이 살려주기도 한다. 해녀들은 영옥을 구해내고선 다시는 물질하러 오지 말라고 화를 낸다. 물질하다 욕심부리면 까딱 죽는다고, 너만 죽으면 다행인데 같이 일하는 해녀들도 같이 죽는다고. 이미 바다에서 가족을 여럿 잃은 해녀들이다.


영옥이 왜 그렇게 목숨 아껴가지 않으며 일해야만 했는지를 알게 된 해녀 혜자 삼춘은 영옥에게 다시 기회를 주며 단단히 이른다. “전복 하나에 숨 한 번, 성게 하나에 숨 한 번. 두 개 따고 숨 고름 너 나한테 디진다.”

두 개 따고 숨 고르면 디진다고 엄포를 놓는 혜자 삼춘


영옥이 죽을 뻔하던 순간, 영옥은 한 숨에 세 번째 전복을 떼어내고 있었다. 세 번째엔 숨이 모자르다는 듯 수면을 한 번 쳐다보고선, 다시 전복을 땄다. 그렇게 전복 세 개를 손에 쥐고 수면으로 올라오려던 순간 발에 그물이 걸렸고, 영옥은 이미 남은 숨이 없었다. 한 손에는 전복 딸 때 쓰는 칼이 있었지만 차근히 그물을 잘라낼 숨이 없었다. 칼을 가지고 그물을 자르려다, 숨이 모자라니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고 하다, 결국 물 속에서 기절하고 만다. 욕심껏 손에 쥔 전복은 이미 놓친 채였다.


혜자 삼춘이 전복 하나에 숨 한 번, 성게 하나에 숨 한 번 쉬라는 건 슬렁슬렁 물질하라는 얘기가 아니었을 거다. 숨을 남겨야 다음 숨을 더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고, 혹시나 발이 그물에 걸려도 침착히 떼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일 목숨을 걸고 물질을 하러 가는 해녀 공동체이기에, 혹여나 함께 일하는 동료가 바다 속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내 숨이 남아 있어야만 도와줄 여력이 있다. 혜자 삼춘은 이제 내 목숨 너한테 맡기는 거라며 영옥에게 단단히 주의점을 이른다. 너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꼭 지켜야 할 규칙이다.


숨찰 만큼 일하다 무너져버린 면역


지난 월요일엔 새벽 두 시까지 회사에 남았다. 화요일 0시에 출시하는 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뿐 아니라 이 서비스를 준비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대기했고,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서비스가 돌아가는 걸 확인했다. 그 다음 날엔 무리해서 출근하지 말고 쉬라는 사수의 배려에 정오가 넘도록 늦잠을 자고선 기력을 회복했다. 수요일과 목요일에도 꽤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우리 팀에서 기획하고 있던 상품의 출시가 결정되어, 가장 앞단에서 상품 구조를 설계하는 내 쪽에서 가능한 많은 것들을 빠르게 확인하고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요일 자정께는 협업하는 팀 기획자를 복도에서 마주치고 서로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얼굴로 안부를 전했다. 왜 이 시간까지 일하냐고 걱정어린 면박을 줬지만 그건 서로가 마찬가지여서 얼른 들어가자고 머쓱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고요한 회사에서 타다닥 키보드 소리만 들으며 조용히 일을 정리하니 집중이 더 잘 되기도 했고, 일도 많이 정리돼서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했다. 목요일엔 눈이 좀 떨려서 약국에서 마그네슘을 사러 갔다가, 요새 자주 피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곤 고함량 비타민B가 들어간 종합비타민도 60일치를 샀다.


금요일 아침에는 몸이 좀 안 좋은가 싶더니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 으레 감기 기운이겠거니 했는데 머리도 아파왔다. 회사가 더운 편이라 나도 전날까지 반팔 입고 일했는데, 그날은 두툼한 후드 집업에 목도리까지 둘둘 껴입었는데도 추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설상가상 그날 생리도 터졌는데 예정일보다 사흘이 빨랐다. 십 초에 한 번씩 재채기를 하면서 목도리를 둘둘 두른 모양새가 동네방네 저 몸 안 좋아요 광고하는 꼴이었는데, 팀원들에게 걱정어린 말들을 듣는 것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심지어 컨디션이 점점 더 안좋아지고 있었다.


집에 가야 했다. 오후에 있던 회의는 양해를 구해서 당겨 하고, 오후 반차를 썼다. 퇴근하기 전에 사수가 몸보신하라고 장어덮밥을 사줬는데, 장어덮밥은 굉장히 맛있었지만 머릿속도 만만치 않게 복잡했다. 사수도 항상 늦게까지 야근하는데 더 젊고 건강한 나만 골골대는 것에 대한 민망함, 조금만 업무 압박이 와도 몸이 아파버리는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아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며칠 야근했다고 이렇게 바로 아파버리나? 하는 건강에 대한 배신감.


소식을 들은 룸메이트 세향언니가 미리 전기장판을 따끈하게 뎁히고 가습기도 틀어 두었다. 고맙다고 말한 뒤 따뜻한 물로 씻곤 찜질팩을 돌렸다. 언니가 덮는 이불을 두 개나 올려 줘서 폭닥하고 따수웠다. 해가 중천이었는데 바로 잠들어선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저녁에 친구들이랑 훠궈 먹기로 했던 약속에도 못 갔다. 잠깐 깨선 기력이 회복된 것 같았는데 무슨. 다음날 아침에 예약되어 있던 PT도 못 갔다. 많이 잤다. 노쇼로 날아가버린 PT 비용이 속쓰렸지만 몸 상태를 보아하니 안 가는 게 나았을 것도 같았다. 감기 기운은 가셨지만 몸에 기력이 없었다. 탕수육을 먹었는데도.



더 할 수 있겠는데? 싶을 때 퇴근할 것


느즈막히 앉아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서 생각했다. 너무 욕심을 부렸구나. 뭘 그렇게 더 빨리, 많이, 미리 하려고 쉼을 놔버리고 날이 넘어갈 때까지 일했을까? 비단 지난 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요 몇 주간 (아니, 몇 달간인가? 생각도 안 난다) 저녁 약속이 있거나 운동 예약이 있어야만 발을 끌며 퇴근하고, 저녁이 빈 날에는 어김없이 야근을 했다.


새로 맡게 된 업무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봐야 하는 자료는 너무 방대했다. 나는 일에 빨리 적응해서 유용한 사람으로 기능하고 싶었고, 아낌없이 인풋을 넣어 빠르게 성장한다는 이미지를 사수와 팀장에게 주고 싶었다. 아직 사수가 있을 때, 내가 아직 주니어라고 불릴 때, 아직 누가 나에게 묻지 않고 나는 누구에게 물을 수 있는 지금 이 시점에 박차고 달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주간을 보내면서 내 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혹사당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내 몸은 파업했고, 수면과 쉼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면 집중력이 뚝뚝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면역력 질환에서 무사하지 못할 거란 경고를 보냈다. 눈이 뻑뻑해지고 ‘이젠 정말 눈에 글자가 안 들어온다’ 싶을 때까지 앉아 있으면 안 됐던 거다. 어떻게든 애써보겠다고 숨을 참은 결과는 과로로 인한 휴가와 사수의 백업, 쉰 것 같지도 않은 쉼과 바닥난 면역력이었다. 나에게도 사수에게도 팀에게도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다. 월요일 새벽까지 일하곤 화요일을 쉬고, 수요일과 목요일도 새벽까지 일하곤 금요일을 쉬었다. 편히 쉰 것도 아니고 수면 부족에 면역력이 바닥나버린 몸을 겨우겨우 달래가면서 몸을 재웠다.


간단한 산수를 해 봐도 밑지는 장사다. 여덟 시간을 푹 자고 여덟 시간을 집중해서 일하면 ‘더 할 수 있겠는데?’ 싶은 컨디션으로 퇴근할 수 있다. 숨을 남기고 퇴근하는 거다. 그럼 저녁에 충분히 쉬고 회복할 수 있다. 설령 문제가 생겨서 더 일하게 되더라도 남은 집중력을 가져다 쓸 수 있다. 옆 사람 힘든 일 좀 더 거들 수 있고, 오지랖 부리면서 팀원들 상황 들여다볼 여력이 생긴다. 고카페인을 때려부으면서 내 정신 또렷하게 만드는데만 집중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가오는 한 주를 맞이하면서 마음에 다짐한다. ‘전복 하나에 숨 한 번, 성게 하나에 숨 한 번.’ 더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퇴근할 것. 더 욕심내지 말고 오래 함께 일하기 위해 밸런스를 잡을 것. 안 그러면 디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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