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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밤 Oct 30. 2022

일상의 행복한 순간들에 대하여

행복을 가만히 응시하고, 기억하고, 꽉 잡아버리기

언젠가 ‘행복한 기억 창고’에 대한 글을 한 블로그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해를 야무지게 마무리하려고 회고를 준비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행복한 기억 창고란 친구가 해줬던 말, 책에서 읽은 구절, 편지 등 자신을 행복하게 해줬던 것들을 한해동안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 두듯 저장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정리해 두면 한 해를 돌아볼 때 고맙고 따듯했던 기억이 다시 솟아오를 것 같았다. 방식이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휴대폰 갤러리를 이용해 캡처하는 방식이 가장 간편해 보였다.


날이 추워져서인지 얼마 전 그 생각이 다시 났다. 나도 갤러리에 뭔갈 정리했었는데, 찾아보니 2019년에 조금, 2020년에 조금, 2021년 7월을 마지막으로 사진이 끝나 있다. 다 해서 스무장 남짓. 마음에 남았던 웹툰 장면, 라디오스타에 나와서 송은이가 했던 이야기, 회사에서 선배들이 해줬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장수가 얼마 안 되고 날짜가 심히 띄엄띄엄인 걸로 봐선 생각날 때만 쌓아두고 아닐 땐 그냥 덮어뒀던 모양이지. 그래도 그 몇 장 안되는 사진들을 보는데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행복한 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추수감사절 즈음엔 난 올해도 이룬 게 없어, 하는 자괴감에 어김없이 휩싸인다. 교회에서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시작한단 걸 보니 이제 3주가 지나면 그 시즌이 또 온단 뜻이다. 더 늦기 전에 올해의 행복 곳간을 채워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후다닥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성과리뷰세션이라 쓰고 따뜻함에 만취하는 시간이라 읽는다

올해가 지나면 뿔뿔이 흩어지게 될 우리 팀. 지난 금요일에는 한 해를 돌아보며 ‘성과리뷰세션’을 했다. 말은 성과리뷰지만 서로의 고생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고마움을 나누는 자리다. 이제야 마음이 모이나 했는데, 이제야 농담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보다가도 서로에게 나쁜 기억으로 헤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우리 팀 정말 어벤져스였는데... 못내 아쉽다.


한 해를 돌아보니 뿌듯하게 잘해낸 일도 있지만 야심있게 시작했다가 흐지부지한 일도 많았다. 괜히 감정적으로 군 일도 있었고 사실은 내가 포기하고 싶어서 덜 힘을 쓴 일도 있어서 부끄러웠다. 내년에는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해야지, 시작한 일은 의지를 갖고 끝내야지 다짐한다. 그렇지만 3년간 맡아왔던 업무를 잘 인수인계하고, 안식 휴가도 다녀오고, 새로운 업무를 시작해 잘 적응하고 있으니 스스로에게 너무 박한 평가는 말아야지 생각한다.


팀 사람들이 준 피드백도 너무 소중해서 꼭꼭 눌러 담았다.

“업무를 대하는 태도가 회사에서 가장 좋은 하이디”

“늘 한결같이 잘 성장하는 하이디”

“명석하고 생각이 깊은 그리고 (하이디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배우고자 하는 애티튜드를 가진 하이디”

“매번 많은 고민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해내는 하이디”

“다정하고 일도 잘하고 말도 잘하는 하이디”


회사에서 올해의 가장 큰 성과는 이런 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 테다. 내가 이룬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얻은 가장 큰 것. 사람이 누구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을 안다. 애쓰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주고, 오래 붙잡고 끙끙대는 성정도 덮어 주는 우리 팀원들. 감정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 표정을 읽고선 회사에서 멀찍이 떨어진 데서 따뜻한 카푸치노를 사 주고,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며 그러니까 너도 괜찮을 거라고 같이 이겨내보자고 얘기해준 팀장님.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할까 늘 고민하는데 이렇게 한발짝 쿵 들어와 자연인인 나를 위로해주는 마음을 만날 때면 무장해제되버리고 만다.


내용도 그림도 연필의 촉감도 가만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책


요새의 주말은 결혼식 준비로 예약과 방문, 찬양팀 연습으로 꽉 차있었다. 내 내향 자아가 숨쉴 구멍이 없어 답답하던 차였다. 오늘은 예배를 마치고 잠시 빈 시간에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간을 읽었다. 인스타그램에서도 펀자이씨툰을 정말 좋아했는데 책으로 엮이니 또 새롭다. 꾹꾹 눌러담은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즐겁고 풍성했다. 이번 주말이 단풍이 절정이라던데 연세대 단풍도 참 예뻤다. 3년만에 열린 연고전에 신난 학생들의 플래카드를 읽으며, 산책하는 강아지와 아기와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을 구경하며 꼼지락거리면서 책을 읽는 시간이 행복했다.


한 권을 다 읽고선 손이 차가워져서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따뜻한 밀크티를 한 잔 시켜 한 권 책을 마저 읽을까 하다가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 글을 열었다. 블루투스 키보드가 무거워 두고 올까 고민하다가 들고 온 보람이 있다. 카페에 앉아 바깥 단풍을 보며 밀크티를 호록 하며 행복한 기억을 되짚으며 글을 쓰는 지금 시간이 행복하다.


점심시간에 산책하다 만난 나무들. 잎이 왕 커서 왕 예쁘다

지난 주에 점심을 간단히 먹고 산책하던 길에 마주한 왕 크고 왕 예쁜 나무들의 단풍, 어제 현상이랑 갔던 스페인 요리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딱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시킨 메뉴가 전부 너무 맛있었던 것, 새벽 수영을 마치고 젖은 머리로 유댕이랑 향이랑 둘러앉아 에어프라이어에 고구마 구워 사과랑 두유랑 아침 먹었던 날, 아침에 15분을 내어 몸을 구석구석 스트레칭 하곤 개운했던 기억, 짚어 보니 행복한 기억이 쫌쫌따리 계속 생각난다. 밤에 하늘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별이 점점 더 많이 보이는 것처럼.


이번 주는 여유를 내어 좀더 행복을 응시하고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더 많이 읽고, 쓰고, 연주하고, 대화하고, 맛있게 먹어야지. 선택적으로 행복한 기억들을 더 짙게 남길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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