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 사막에서 배운 것
몽골 여행 넷째 날이던가, 게르에 누웠는데 유정이가 읽어 주고 싶은 문장이 있다며 흠흠, 낭독을 시작했다.
오후에 도리스 레싱의 글을 읽다 이런 문장을 만났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아주 어린 나이에 이렇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전에 겪었던 일, 전에 만났던 사람이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날 뿐이다. * 도리스 레싱, 『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더 이상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 삶을 살 순 없다. 깨트리기! 쓴다는 건 멀쩡히 굴러가는 삶을 깨트리는 일이다. 깨트린 뒤 다시 조합해 새로 만드는 일이다.
책을 마무리할 때쯤, 내 삶에 고양이가 들어왔다. 내 첫 고양이이자 새 고양이다. 이름은 당주, 별명은 로티플(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이명은 소안, 내가 자주 부르는 호칭은 귀염둥이. 고양이를 보며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려면 무언가를 사랑하고 뛰어들고 다치고 도망가고 잡고 빼앗기고 슬퍼하고 으깨져야 한다. 가만히 두면 마음은 굳는다. 움직여야 한다.
박연준 산문,『쓰는 기분』, 10페이지.
다소 지쳐 있던 차였다. 피임약으로 생리 주기를 억지로 늦춘 탓인지 며칠을 연이어 달린 비포장도로에 몸이 찌뿌둥한 탓인지, 몸도 마음도 그랬다. 낮에 방문한 유적지에서도 '뭐 전에 봤던 거랑 비슷하네' 하면서 조금 시큰둥한 마음이었다.
여행지의 풍경이란 게 처음 경탄을 쉬이 잃어버리고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서도, 그런 자연스런 가라앉음보다도 마음에 잔뜩 뿔난 어린이가 들어앉아 '안 좋아할 거야!' '흥미있어하지 않을 거야!' 하면서 마음에 무게추를 달아 방방 뛰지 못하게 눌러둔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던 중에도 나는 의도적으로 말을 줄이고 질문을 튕겨내고 있었다.
전화도 안 터지는 게르에 누워 들려오는 글을 사탕처럼 굴려 녹이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뭔갈 가만히 두고 싶구나, 새로운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구나.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스스로 벌을 주고 있구나. 뛰어들어 다치게 될 상황을 마주하기가 겁나고 싫구나. 그런데, 가만히 있고 싶다면 여행을 떠난 의미가 없다. 새로움을 찾기 위해 멀리 떠났는데 마음을 꽁꽁 닫고 있으면 안대를 끼고 영화관에 간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여행의 마지막 날 동그랗게 앉아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얘기를 나누었을 때, 단연 모두의 1등은 고비사막이었다. 아마 그것이 우리의 가장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발도 벗어던진 채로 모래에 발을 푹푹 눌러 딛고, 경사진 모래언덕엔 두 발에 두 손까지 사용해 기어올라야만 했다. 한 발을 딛으면 모래가 쓸려 반 발이 흘러내렸다. 잠시 앉으려 물 뚜껑을 열면 입구에 모래가 토핑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니 귓속과 속옷 안쪽까지 모래가 범벅이었다. 아직도 이렇게나 생생하다. 말랑하고 따끈한 마음은 모래범벅이 되기를 감수하고 사막에 뛰어들 때에야 얻을 수 있는 거구나.
귀국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야다 작가님의 전시 <할매, 하고싶은 거 다~~~~해> 를 보러 갔다. 행복한 할머니가 맥주를 들고 불티 옆에서 춤추고 있는 흥겨운 포스터에 반해 가기로 결정했다. 작가님은 전시 소개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더욱 주체적으로 욕망하고 행동하는 노인을 그리고 싶다. 그 노인들은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며 호탕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지금의 노년의 현실을 반영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의, 우리의 노년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근육이 짱짱한 할머니, 영화 하는 할머니, 스킨스쿠버 하는 할머니, 구경하는 할머니, 태닝하는 할머니, 책 읽다 잠든 할머니들의 그림을 구경하다가 마음이 부웅 떠올랐다. 그림 속의 할머니들이 설레 보여서. 하나도 시큰둥해 보이지 않아서. 대단한 걸 하는 할매들 뿐 아니라 마실 나와서 뭔갈 구경하는 할매들조차 '새로운 무엇'을 일상에 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바다를 바라보며 설레는 미소를 짓고 있는 멋쟁이 할매 패브릭 포스터를 한 장 사고, 다시 전시를 한 바퀴 돌았다. 매일 고비사막에 오르지는 못하겠지만 일상에서 설렘을 가지고 살아갈 순 있겠지.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집중할 순 있겠지. 그런 시간들이 새롭고 말랑한 마음으로 쌓여 가겠지. 최선을 다해 시큰둥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글을 쓰다 보니 이 사진이 생각났다. 타이거 우즈가 결정적 샷을 치는 순간 맥주를 꼭 쥐고 카메라 없이 그 순간을 직관한 사람 때문에 유명해진 사진이다. 맥주회사는 이 사진을 광고로 쓰면서 아래 문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It's only worth it if you enjoy it.
일상을 설렘으로 살아가는 법을 이렇게 또 한 번 배운다. 마주한 순간에 몰입하고, 있는 힘껏 즐거워하자. 시큰둥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있는 힘껏 달려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