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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밤 Apr 24. 2022

매일 식물을 죽이던 내가 이세계에선 꽃을 피웠다?!

물줄까 말까 식물과의 눈치싸움 티키타카 

어제까지 멀쩡하던 이파리가 축 쳐져서 시들어가는 모양새다. 처음 식물에 잎이 축 쳐진 걸 봤을 땐 이제 얘도 죽나보다 했다. 이제껏 내 손에서 살아나간 화분은 없었으니.


대체로 과습으로 추정되는 죽음이었다. 나름대로 물주기 날짜에 동그라미를 쳐가며 정성스레 물을 줬지만 식물에겐 물고문이었나보다. 물주기 텀이 긴 식물은 깜박 잊고 말려죽인 일도 있었다. 지나간 식물들의 생을 반추하니 얘도 죽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뭔가 내가 잘못했겠지. 노잣돈처럼 노잣물이나 주자(?)는 마음으로 물을 흠뻑 주고 몇 시간 지나 봤더니 이파리가 쌩쌩해져 있었다. 뭐야 넌, 과습이 아니라 물이 없는 거였어? 


물주기만 3년을 해야 물 주는 감이 온다더니, 식집사로서 한 번 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론 잎이 축 쳐지기를 기다렸다 물을 준다. 이번에도 보니 잎이 쳐져서 울상이고 나무젓가락으로 흙을 슬슬 파봤더니 버석하다. 물을 줄 때가 된 것이다. 물주기 타이밍을 맞췄다며 뿌듯하게 화분을 옮기는데 솜뭉치 같은 꽃봉오리가 성화봉송 하는 마냥 올라와 있다. 


꽃인줄 알았으나 꽃봉오리였던 그대


허브 종류라고만 알고 키우기 시작했는데 꽃이 피는 줄은 몰랐다. 아니 꽃이 피는 식물이래도 우리집에서 꽃을 피워낼 줄은 몰랐다. 어느새 저 조그맣고 몽글몽글한 꽃봉오리를 만들어 올린 걸까? 이제 다 자라서 꽃이 핀 걸까? 식물이 자라는 동안에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던 글이 생각났다.


자라는 데에만 완전히 집중하는 이 시기에는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거기 필요한 호르몬의 분비가 시작된다. 다른 십 대들과 마찬가지로 내 나무도 그 해를 그렇게 보냈다. 봄에는 엄청나게 키가 크고, 여름에는 새로운 잎을 만들고, 가을에는 뿌리를 뻗고, 내키지 않지만 따분한 겨울의 느린 리듬에 자신을 맞췄을 것이다.  - 호프 자런, 『랩걸』, 47페이지.


선물 받아 키우기 시작한 seedkeeper 허브들. 이중 세이지와 로즈마리만 살아남았다. 


작년 가을, 씨앗으로 와 펠릿에 심긴 세이지는 한동안은 그저 '가능성의 흙덩이'였다. 아침 저녁으로 흙이 마르지 않게 물을 주면서도 이게 싹이 나는건가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행여 흙이 쓸려 씨앗을 헤칠까 스포이드로 물을 방울방울 주고 방의 따뜻한 자리를 내주었었다. 무순같이 연한 떡잎이 올라오던 순간엔 눈을 가까이 대고 한참을 들여봤다. 새싹은 너무 약해서 물을 하루만 걸러도 죽은 것처럼 줄기를 축 늘여뜨렸고 몇 시간만 눈을 떼도 더 자라나는 것 같았다.


잘 자라 화분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는 겨울이 왔다. 건조하고 추운 혹독한 계절을 견뎌내고 한참을 같은 크기로 잎만 쳐졌다 뻗었다 하더니, 줄기가 나무처럼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날이 따뜻해지자 봄이 오길 기다렸다는듯 무섭게 잎을 내더니 대를 길게 뻗어 보라색 꽃을 피웠다. 아무래도 내 블루세이지는 이제 성장기를 지나 어른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다.


동네 사람들 우리 집 블루세이지 꽃 좀 보세요


동네에 치이는 게 화단이고 봄이면 꽃피는 것이 당연한데 내 식물의 꽃은 기적이다. 어린왕자가 지구에서 장미밭을 보고도 제 별에 있는 가시 네 개짜리 장미를 떠올린 것처럼 나는 우리 집 블루세이지 꽃을 생각한다. 왜 꽃 아래의 줄기는 길까, 벌과 나비가 잘 찾으라고 그런 걸까? 꽃이 핀 후로 잎이 조금씩 더 쳐지는 것 같은데 꽃으로 에너지가 더 많이 가는 걸까, 물이 더 필요한 걸까? 노지에 있는 꽃들은 참 잘 자라는구나. 우리집 화분들도 창문으로 말고 어디서든 해가 드는 땅에서 쨍쨍한 햇빛을 쐬어 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


꽃집 사장님들이 정성껏 키워두신 화분은 다 죽었는데 세이지가 살아남은 이유를 생각해본다. 어쩌면 얘는 씨앗부터 눈치를 챈 거다. 자기가 살려면 알아서 적응해야 한다는 걸. 목마르거나 추운 순간에도 식집사를 믿지 않고 나름의 생존 체계를 갖추었다는 가설이다. 그러면서 나도 얘도 서로 눈치보면서 타이밍을 맞춰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요샌 꽤 잘 맞는 파트너인 것 같기도 한데 세이지 의견은 어떨런지.


그러고보니『아무튼 식물』에서 몬스테라에게 추천서를 부탁하겠다던 저자의 말이 떠오른다.

추천서

지원자명 : 임이랑
추천자명 : 몬스테라
관계: 부양자와 반려 식물

위 지원자를 추천하는 이유

제가 이 지원자의 여러 덕목 중 가장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성실함과 식물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위 지원자는 2년 전 작은 모종에 불과하던 저를 본인의 집으로 데려와 성심성의껏 돌보았습니다. 

그는 매일 물을 줘야 하는 테라스의 식물들을 귀찮아하거나 곤란해하지 않고, 한여름에는 하루에도 두 번씩 세 번씩 물을 주며 열과 성을 다하여 식물들을 돌봤습니다.
(중략)

위 지원자와 함꼐 사는 2년 동안 저는 총 다섯 번 분갈이를 거쳤는데, 그때마다 그는 사이즈가 적절한 화분으로 저를 옮겨두었습니다. 흙을 구비해두는 데도 매우 신중한 편이라 배수가 원활하고 영양분이 충분한 흙을 공급해주었습니다. 또 토양 개량제나 영양제에도 관심을 두고 훈탄이나 알비료, 지렁이 분변토 등 그때그때 새로운 토양을 맛보게 해주었습니다.
(중략)

매일같이 식물등 타이머를 맞춰두고 제 일조량을 신경 쓰는 점, 하루 열두 시간씩 에어서큘레이터를 틀어 저와 주변 식물들의 공기 순환이 원활하게 돕는 점,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물을 주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지원자는 애정을 가지는 대상에 한해서는 확실한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지원자를 강력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임이랑, 『아무튼 식물』, 69-71페이지


임이랑 님처럼 대단한 식집사가 되겠다거나 내 정원을 가지겠다는 포부는 아직 없다. 그저 베란다에 올망졸망 자리한 화분 세 개가 맞이한 첫 봄을 만끽하기를, 여름 장마에 무르지 않고 겨울에 얼지 않기를, 아직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는 병충해로부터 무사하기를 바란다. 다음 분갈이할 때까지 얘네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코어 힘도 좋아졌을 테니 흙이 많이 든 큰 화분도 번쩍번쩍 들어올릴 수 있을 거다. 식물님들, 부디 죽지 말고 자라서 제게 코어 힘을 발휘할 기회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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