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25년 6월 21일 CBS FM아침 9시 방송
(방송으로 보낸 글과 약간 다른데 퇴고를 여러번 하여 보낸거라 이해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지 쌓인 키보드를 딸아이가 털어 내놓으며
"엄마, 혼자 있을 때 건반 한 번 쳐보시려오?"
외국으로 떠나기 전 딸아이는 테이블 위에 먼지를 닦으며 선을 연결해 주고 있다.
'아.. 맞다 나 피아노 치는 여자지!!?'
이 방송을 들으면 우리 딸이 엄마가 그동안 건반을 치지 않은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겠구나..
40년이 훌쩍 넘어 거슬러 올라가는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말하면 창피할지 모른다고 기억 한 편에 담아두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떠올라, 애잔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고등학교 1학년, 전교 합창대회가 열린 봄이었다.
각 반에서 지휘자와 반주자를 뽑아 지정곡과 자유곡을 연습하고 열띤 경쟁을 하는 학교의 큰 행사였다.
그때 나는 누구보다 우리 12반의 반주자가 되고 싶었다.
피아노 실력이라고 해봐야 국민학교 때 1~2년 배운 게 전부였고, 체르니 100번을 치다 만 수준이었다.
악보를 제대로 읽는 것도 버거웠지만, 이상하게 귀로 들은 곡은 어느 정도 손으로 흉내 낼 수 있었고, 왼손은 화성 감각에 기대어 대충 코드로 채워 넣곤 했다.
그 당시, 집에서 혼자 악보 피스를 사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엘리제를 위하여’, ‘터키행진곡’ 같은 곡을 외우다시피 치던 게 전부였다.
그런 나였지만, 자유곡으로 선정된 산골짜기 등불을 익숙하게 알고 있었고, 오디션 날 악보도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그 곡을 연주했다.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고, 반 친구들은 만장일치로 나를 반주자로 뽑았다. 악보 없이 치는 나를 굉장한 실력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경쟁자 중에는 쇼팽을 자유자재로 치는 친구도 있었다.
내가 뽑힌 이유는 단 하나, 내가 그 곡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합창대회 지정곡인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훨씬 더 까다로웠다.
왼손 반주는 클래식의 전형적인 구조였고, 나는 그 악보를 달달 외웠다.
결국 외워서, 내가 익숙하게 내 걸로 만들었다.
이젠 안 보고도 칠 수 있다.
연습이 계속되는 한 달 동안, 내 마음속에선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 그냥 외워서 치는 거다.”
몇 번이고, 지휘자에게 고백하려 했다.
못 하겠다고, 다른 친구가 반주를 맡는 게 옳다고.
그러나 그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입을 가로막았다.
결국, 대회 날이 왔다.
나는 여전히 악보를 펼쳐 놓기는 했으나, 외운 대로 쳤다.
다행히 큰 실수 없이 무대를 마쳤고, 우리 반은 놀랍게도 3등을 수상했다.
음악 선생님의 심사평이 내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합창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만큼 비슷했지만, 어울림과 조화를 중점으로 보았습니다. 어떤 반은반주를 편곡을 한 반이 있었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선생님들 알고 계셨구나...'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아무도 난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지휘자도, 친구들도 3등 했다는 것으로 그동안의 수고를 토닥이며 즐거워했다.
지휘자도 나에게 엄지 척을 하며 기쁨을 보여주었다.
모두가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나만은 그 말에 온몸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은 단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다.
나는 그날, 솔직함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택했다.
진심을 말할 기회를 스스로 외면했고, 그것이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나를 나쁘게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때의 기억은 이후에도 어떤 자리에서든 내 능력을 먼저 돌아보게 했고,
용기란 때로 솔직함에서 시작된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60을 넘긴 지금, 다시 말할 수 있다.
그날, 나는 악보를 보지 못한 채 연주했고,
무대는 화려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나를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그 소녀는 단지 너무나 그 무대에 서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아이의 용기를 따뜻하게 껴안아주고 싶다.
비록 악보 없이 쳤을지라도, 그것은 분명 내 인생의 한 소절이었다.
서툴렀지만 진심이었고, 부끄럽지만 간절했다
이후로 나는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을 시작했고 피아노도 체르니 30번까지 마스터했다.
한 번의 오만으로 나의 인생의 한 소절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음악은 취미로만 머물러 있지만
늘 곁에 동행하는 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