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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미 Nov 13. 2024

형제의 난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쓰아랑

두 아들을 키우면서 제일 난감할 때는 이 녀석들이 더 이상 눈빛으로도, 어떤 말로도, 목소리로도 제압이 되지 않을 때다. 집에서 뛰지 말라는 경고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방금 갓 내린 따뜻한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고상한 대화를 나누는 육아를 꿈꿨건만. 현실은 커피를 코로 마시다가도 뿜게 만드는, 짱구보다 못 말릴 녀석들과의 생존기쯤 되는 걸 어쩌리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아랫집 어르신이 타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란다.

죄송함이 팔 할인 염치없음이 그 이유다.

타이밍이라도 잘 못 맞춘 날에는 한평 남짓되는 그 공간에서 여지없이 민망함과 죄송함을 적절히 버무려내야 한다. 어딘가 어색한 미소로 안 쓰던 얼굴 근육까지 쥐어짜 내 보는 건 덤이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안 공기가 제법 무거워진다.


"우리 집 아들 내외가 며칠 전에 왔었어어어. 그런데 윗집에 애들이 있냐면서 뒤꿈치 소리가 너어무 크다는거야아아아. 그런데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소리는 잘 안들려어어어. 괜찮아아 애기 엄마아."


느릿느릿 이어지는 할머님의 말씀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아들 내외의 의중인지, 슬쩍 숨겨진 화자의 의도를 1층에 도착하기 전까지 빠르게 파악해 내는 것이 관건이다. 하필 엘리베이터 광고 모니터에서는 뭄뭄실내화 마케팅팀이 열일하고 있는 중이다. 광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


그러다 며칠 지나지 않아 사단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난데없이 격투기 선수로 빙의한 내 새끼들의 우당탕탕 대혈전 난투극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 이로써 나는 아랫집 어르신을 뵐 면목이 더 없어졌다.


집에서 뛰지 말라고 했지.
가서 반성문 써와.



(좌) 반성 없는 반성문을 써온 사춘기 오월이 , (우) 일단 죄송부터 하고 보는 유월이


호기롭게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으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반성문 온도차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한다.(웃긴걸 어떡하랴)


사건을 낱낱이 풀어내긴 했지만 반성이라고는 딱 눈꼽 만큼 있었던 오월의 글과, 정확하게 다섯 번이나 '죄송합니다'를 써낸 유월이의 마음. 아들들과 글로 나눈 대화. 그걸로 나는 되었다. 

사로잡힌 자에게 나오는 눈빛이라 했던가. 반성문 검수관이 되어가지고 반달눈을 한 얼굴을 들킬 수 없으니 심호흡 한번 크게 내쉬고 비장한 얼굴 가면을 다시 장착해 본다. 단전에서부터 어올린 단호하고도 엄중한 목소리로 또 뛸 거냐, 또 싸울 거냐,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으로 격투기 게임은 종료다.



하루는 반성문 쓰고 다음 날 계획표 쓰는 게 인생 이랬는데, 

이번엔 또 무슨 소동이냐

축구공이 쏘아 올린 비극


새로운 취미생활을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화분 분갈이가 필요해 보였나.

이러나저러나 방구석 손흥민과 이강인의 빅매치 이벤트가 성사된 건 분명해 보였다.


바닥에 흩어진 흙과, 꺾여 나뒹구는 여린 잎을 보자 눈앞이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마다 잎사귀를 살피고 흙을 만져주며 물 한 방울 햇빛 한줄기 놓치지 않고 정성으로 애지중지 키운 내 화분인데.

엎어진 화분과 함께 내 머릿속 이성도 순식간에 뒤집혀버리고 말았다.


다 나가.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쓰아랑.



오월과 유월은 그렇게 현관문 밖으로 밀려 나갔다. 내복만 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겉옷까지 챙겨 줄 여유는 없었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펼치는 대치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입술을 꽉 다문 채로 한참을 서있었다. 아, 싸늘한 공기가 마음을 덮쳐온다.


나가있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문 너머의 공간이 어쩐지 낯설고 두려웠다. 차가운 날씨에 문 마저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다. 아이들의 얼굴에 남은 찬 기운이 내 속을 더 아리게 한다. 부끄러움과 미안한 감정이 잔뜩 묻어난 내 얼굴이 다시 부끄러워지자 서둘러 거실 불을 껐다. 그리고는 깔아 둔 이부자리 속에 나란히 몸을 뉘어 아이들의 여린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작은 온기가 온몸을 감싸온다. 잔잔한 숨소리를 내며 자는 아이들과 함께 따스한 온기 속에 눈을 감았다. 긴 하루 동안 있었던 온갖 소동과 반성문, 아랫집 어르신의 목소리도 이제는 흘러가 버린 먼 이야기 같았다. 


가을의 끝자락, 세 모자의 가슴에 미풍이 불고 있었다.





사진출처: niekverlaan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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